가톨릭대학교/성심교정/학생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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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학생회
2.1. 남성 중심 총학 첫 탄생
2.2. 25대 총학생회장 후보자 낙선
2.2.1. 반론
2.3. 25대 총학생회장 보궐선거
2.4. 이후 동향
2.5. 제29대 총학생회
2.6. 제30대 총학생회
2.6.1. 졸업준비위원장 선출
2.6.2. 2020 총선거
2.7. 제31대 총학생회
2.8. 2022년 총학생회 비상대책위원회 체제
2.9. 2023년 총학생회 비상대책위원회 체제


1. 개요[편집]


가톨릭대학교 성심교정의 학생회 활동 관한 내용을 정리한 문서이다. 부족한 점이 많다. 혹시나 가톨릭대 출신 중 나무위키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이 항목을 보게 된다면 추가했으면 좋겠다.


2. 학생회[편집]



2.1. 남성 중심 총학 첫 탄생[편집]


1999년 이전 까지는 총학의 구성원이 여성들로만으로 구성되었고[1], 단일의 후보가 나오는 경우가 많았다. 그 후 21세기 첫해 15대 때 처음으로 남학생이 부총학생회장 후보로 출마하였다. 또한 가톨릭대학교 첫 남학생이었던 95, 96학번 예비역들이 학생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따라서 15대 총학선거는 그동안 드물었던 복수 후보자로 선거가 치러졌으며 상당히 과열의 양상을 보였다.[2] 당선된 총학 임원진들은 처음으로 남학생들이 주를 이루었다. 또한 그 해 15대에 당선되었던 총학은 전국에서 제일 높은 투표율과 지지율로 당선되었다.[3] 바뀐 총학의 분위기 때문인지 학기 초부터 이전과 달리 등록금 투쟁을 강력하게 진행하기도 했고[4], 축제나 농활 등의 규모가 커졌다.[5] 하지만 학생회 전반이 임원진들의 개인 역량에 기대어 움직였고, 기존의 학생회와의 연결고리가 약했기 때문에 다른 대학과의 네트워크와 전국적인 학생운동의 흐름과 단절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2.2. 25대 총학생회장 후보자 낙선[편집]


2007년도 이후 가톨릭대학교는 운동권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다.[6] 그래선지 몰라도 누구도 총학 일에 잘 나서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대대로 가톨릭대학교 성심교정 총학의 학생후보는 전통적으로 단일후보가 나왔다. 다른 학교 총학선거와는 완전 다른 모습을 보였다. 게다가 이 총학후보들은 대부분이 새로이 나오거나 2~4개의 계보에서 나와 경쟁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예로부터 단대 학생회장, 학부 학생회장 등의 기존의 총학과 연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들이 회장후보에 출마했고 회장후보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보면 공약도 똑같고, 하는 짓들도 똑같고, 사람도 똑같고(...)

그런데 2011년 11월, 2012년에 활동할 25대 총학선거에서는 꽤 희한한 일이 일어났다. 단일후보로 기존의 총학이나 학생회에 연관된 사람들은 출마하지 않았고, 한대련, 민주노동당 소속 대학생이 선본을 꾸려서 나온 것이다. 이에 대해 한 쪽에서는 학교를 바꿀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였고, 다른 한 쪽에서는 그의 경력으로 인하여 학교가 소란스러워질 것을 우려하는 생각들도 가지고 있었다.

여기까지는 어디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다. 그러나 그 다음일이 대학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학교의 중심 커뮤니티라고 말할 수 있는 '가톨릭대에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이하, 가좋사)' 사이트에서 총학생회 후보자의 거짓말이 밝혀지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총학생회 후보자의 선거 포스터에는 한대련, 민주노동당에서의 활동 내역이 완전히 누락되었고, 이로 인해 가톨릭대 학생들은 후보자가 자신의 정치적인 경력을 고의적으로 누락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시했다. 후보자는 이러한 의혹에 대해 민주노동당 활동은 인정하지만, "제가 한대련 소속이라는 말은 유언비어에 불과합니다" 라며 한대련과의 연관성을 끝까지 부인했다. 또한 민주노동당에서의 활동도 인정은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하고 다녔는지[7] 밝히지 않겠다는 성명서를 발표해 물의를 빚었다.

후보자가 한대련과의 연관성을 끝까지 부인했으나, 선거의 유권자인 가톨릭대 학생들에 의해 후보자가 활동한 '대학희망'이라는 단체가 한대련과 관련이 있음이 밝혀지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후보자 본인이 대학희망을 한대련에 종속시켰으며, "대학희망은 한대련과 함께합니다" 라는 발언을 하고 한대련에 회비를 납부한 사실까지 가좋사에 낱낱이 폭로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특히 후보자와 대학희망에서 함께 활동하던 한 09학번 학우의 양심고백으로 인해 총학 후보자가 가톨릭대 8000명 학우들을 향해 거짓말을 한 사실이 분명해지자, 학생들은 적극적으로 투표 거부 운동을 펼쳤다.

일부 학생들을 후보자가 소속된 민주노동당과 정치성향이 정반대인 한나라당 아르바이트로 몰아갔는데, 대표적으로 당시 05학번의 "(한나라당)알바들 고생 많다.. 이런 글쓰면 얼마주디?" 라는 발언이 있었다. 진실을 요구하는 학생들은 자신들이 한나라당 아르바이트 생으로 몰리자 더욱 격분해 가좋사에 후보자 사퇴 요구글을 실명으로까지 올리고, 후보자가 한대련에서 활동한 증거 자료를 꾸준히 찾아 업로드하였다. 선거 막바지에 후보자는 자신이 소속된 '대학희망'으로부터 자신과 대학희망(즉 한대련)과는 2011년 8월 이후 관련이 없다는 사실확인증명서를 발급받아 해명을 시도하지만, 한대련에서 12월 2일에 활동한 사실기사이 밝혀지며 거짓말로 드러난다. 12월 2일은 심지어 투표 마지막 날이었다.[8] 즉 후보자는 투표 당일까지 학생들에게 겉으로는 웃으면서 뒤로는 한대련에서 활동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인 것이다.

총학생회장 후보자의 끝없는 거짓말에 가톨릭대 학생들은 후보자에 대한 신뢰를 잃고 총학선거에 참여하지 않게 되었다. 선거 종료 1~2일전이 되자 급해진 총학생회장 후보자측 선본에서는 자신들의 지인들을 대거 동원하여 지나가던 학생들을 납치하다시피 데려가거나, 쉬는시간 이외에도 강의에 방해가 될 정도로 투표하고 가라고 소리를 지르는 등 거의 강제로 투표율을 끌어올리려는 민폐까지 저지르게 되었다. [9] 후보자의 거짓말과 후보자측 선본의 파렴치한 행위를 본 학생들은 더욱 총학후보와 선거에 대해 반감을 가지게 되었다.

결국 총학선거의 투표율은 가톨릭대 역사상 최저 수치인 45.7%로 종료되었다.# 가톨릭대학교 총학 회칙에 총학선거의 후보가 단일후보일 경우 투표율 50%가 넘지 않으면 자동 낙선이 된다는 조항[10]이 있기 때문에, 유권자에게 끝까지 거짓말로 일관한 총학후보는 투표함도 열어보지 못하고 낙선하였다.# 결국 2012년 총학은 구성이 되지 못했으며, 단대학생회장+총동아리연합회장으로 구성된 중앙운영위원회가 총학을 대신하게 되었다. 투표율 45.7%는 생각보다 높은 수치였는데, 이를 통해 확실해진 것은 많은 학생들이 이렇게 잘못된 현실에 대해 항의하지 못하고 오히려 침묵으로 일관하거나 동조하는 경향이 갈대밭에 불붙듯이 퍼져나갔다는 사실이었다.

비하인드 스토리로, 후보자는 선거가 끝난 뒤 낙선사례에서 자신과 선본측의 잘못은 끝까지 인정하지 않은 채로 자신을 지지해준 학생들(45.7%)에게 감사하고(참고로 45.7%는 찬성 비율이 아닌 투표율일 뿐이다. 개표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45.7%의 표 가운데 찬성과 반대의 비율은 알 수 없다) 더 준비하겠으며 다음에 보자는 식의 발언을 남겨 논란이 됐다. (설마 또 나오려고?!)


2.2.1. 반론[편집]


2011년 25대 총학선거에서는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기존의 총학에서 경험을 쌓던 사람이 아닌, 전대련출신의 학생이 선본을 꾸려서 단일 후보로 출마한 것이다. 민주노동당 중앙대의원까지 지낸 인물이라고 한켠에서는 학교를 바꿀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였고, 다른 한편에서는 그의 경력으로 인하여 또 다시 총학이 운동권에 예속되는 것이 아닌가 우려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학교의 중심 커뮤니티라고 말할 수 있는 '가톨릭대에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이하, 가좋사)'에서 누군가들이 출마한 총학의 이력과 학과를 이유로 무차별 흑색 선전을 일삼기 시작하는 일이 발생했다. 당시 종교학과, 철학과에 에둘러 묶어 '종死철'로 악의적 워딩을, 또 국문과 프랑스어문화학과에 대해서도 흑색 선전을하자 이에 분개한 인예대 학생들이 당시 커뮤니티[11]를 대거 탈퇴하게 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러나 총학 선본에서는 이 발언을 무리들에 대해 회유책을 사용하였고 이에 흑색 비방을 일삼던 무리들은 오히려 승리감에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앞서 언급했듯 총학생회장의 강력한 리더쉽과 개혁을 바랬던 학우들은 실망을 느낀 학우들이 총학 선거를 보이콧하게되고, 이로 인해 선거 종료 1~2일 직전에도 투표율이 미진하자 급해진 선본에서는 더 많은 학생들을 동원하여 선거 독려, 종래엔 강권하는 분위기까지 치달아 여론을 더욱 악화시켰다.

결국 총학선거의 투표율은 45.7%로 종료되었다.

2.3. 25대 총학생회장 보궐선거[편집]


보궐선거마저 단일후보가 출마하거나 후보 자체가 없지 않겠냐는 학생들의 우려와는 달리 , 2012년 3월에 치러진 25대 총학생회장 보궐선거는 두 후보가 나왔다. 두 후보의 가장 큰 차이점은 공약에 있었는데, 기호1번은 현실성에 기반한 공약이 주를 이룬 반면 기호2번은 실현 가능성은 없으나 시도에 의미를 두는 공약이 주를 이뤘다. 실현 가능성도 없는 공약을 남발하자 기호2번 후보자는 정책적으로 포퓰리즘이 아니냐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공약 이외에 후보자의 자질을 검증하는 차원에서 기호1번 후보는 MT자리에서 성희롱 혹은 성추행을 했다는 치명적인 공격을 받았으나 당시 MT에 참가한 학생들의 증언으로 인해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되었고, 비록 사실이 아님에도 불미스러운 소문이 도는 것에 대해 사과이다. 반면 기호2번 후보는 민주노동당 활동은 인정하고 나왔으나 한대련에서 활동했다는 사실에 대한 해명은 이번 선거에서조차 없었다. 참고로 기호2번 후보는 2011년 25대 총학생회장 후보로 출마한 경력이 있는 학생이다.

그리고 포퓰리즘이나 현실성을 떠나서 이번 기호2번 후보의 선거운동 중 또 물의를 일으켰다. 첫번째는 학교 선관위에 등록돼있지 않은 학우들을 끌어내어 선거운동을 시켰고, 두번째는 앞에서도 언급되었던 선거운동원을 투표기간에 동원하여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아 강제로 선거하게 하는 불법이 자행된 것이다. 첫번째 사유는 선관위에 적발되어 경고를 받았고, 두번째 사유는 선관위의 징계를 받지 않았다. (일단 아무도 신고를 안한모양이다.) 이 일로 인하여 저번까지 지지했던 지지자들 조차도 등을 돌리게 되었으며, 대놓고 기호2번 후보에 대해 지지를 철회하겠다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투표 결과는 불보듯 뻔했다. 기호1번은 60.82%라는 압도적인 지지로 총학생회장에 당선되고, 기호2번은 37.54%의 득표율로 낙선의 아픔을 다시금 겪게 되었다.


2.4. 이후 동향[편집]


2014년 말, 총학생회 선거 때 투표율 미달로 총학생회가 구성되지 않은채 2015년으로 넘어갔다. 2015년도 4월에 보궐선거를 실시했지만 이번에도 투표율 미달로 투표함은 개봉하지도 못한채 올해 총학생회는 꾸려지지 못했다. 이번 투표 거부현상에 대한 가대학보의 분석글 2014년도가 27대 째 총학생회로, 구성명은 '어깨동무'이다. 2013년도에는 '희망 메아리', 2012년에는 '따뜻한 드림', 2011년에는 '공감나누기', 2010년에는 '당찬우리', 2009년에는 '희망집합체', 2008년엔 '즐겨찾기'였다. 22대 총학생회의 주요 공약은 여러군데 존재하는 옥상을 쉼터로 바꾸고, 먼곳에서도 이용가능한 셔틀버스를 만드는 것이었는데, 전부 실패. 다만 등록금은 동결 성공했다. 애초에 학교에서 등록금을 올릴 필요를 못느꼈다는 의견이 많다.[12] 심지어 2012년에는 학생들이 별다른 요구를 하지 않았음에도 학교측에서 일방적으로 등록금을 3.4% 인하했다.[13] 셔틀버스는 최종적으로 실패로 긑났으나 니콜스 옥상을 쉼터로 만든 공약은 성공했다.

23대 총학의 주요 공약은 22대에서 이어지는 정규노선 통학버스 운영 및 학생휴게시설 확보, 등록금 카드분할납부제[14], 도서관 확충, 군대 내에서 사이버강좌를 통한 학점 취득[15], 생리공결제 등등. 최근 가톨릭대가 학부교육 선진화 선도대학에 선정되면서 불거져 나온 학부통폐합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16][17]

물론 총학[18]에서는 결사반대의 입장을 취하였다. 비교적 입지가 굳건한 상경계열[19]이나 사회과학 계열학과 학생들은 비교적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는 양상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 상경/사회과학 계열의 교수 들 중에서도 많은 분들이 학과 통폐합과 정원 조정 문제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견지함으로써 결국 이 갈등은 교수진 vs 학교 당국의 구도로 보이기도 했다. 이렇듯 총학생회는 발빠르게 학제 개편과 관련된 의견을 모았고, 교수들의 반대를 포함한 학내 반대 여론이 컸기 때문인지 당시 학교는 학제 개편를 하지 않았다.

당시 학제 개편과 관련한 커뮤니티에서 나타난 일부 여론을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부끄럽지만 사실이다.

학과 통폐합이 처음엔 '컴정프종'이라 불리는 가톨릭대 교내에서 가장 점수가 낮다고 이야기된 4개 학부[20](음악과 제외) 컴퓨터정보공학부, 정보통신전자공학부[21], 프랑스어문화학과, 종교학과와 심리학과 야간, 생명환경공학부(생명공학부와 겹치는 부분이 많은 것이 문제이다.)가 없어질 것이란 예상이 있었다. 게다가 10년 1학기 전과 학생 통계 결과 국어국문학과[22], 국사학과가 전과 유출학생이 제일 많다는 내용이 나타났고, 해당 학과들도 위기를 맞는 것처럼 보였다. 학교는 결국 위에 나온 대로 1차 변경안을 예고하였다. 그러나 당시에 학제 개편을 강행하지는 못했다.

결국 학제 개편은 몇년후 몇몇 학과를 일부 학부에 통합하는 수순으로 마무리되었다.[23]

그런데 2018년 학교는 2019년부터 종교학과 신입생을 모집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했다.[24] 사실상의 폐과 조치다. 학교에서 공청회를 실시하고 종교학과 학생회와 졸업생 및 강사와 의견을 들었다고 하지만, 이미 결론이 정해진 일이었다고 전해진다.[25] 만약, 2018년에도 총학생회 혹은 종교학과 학생회의 상위 학생회인 인문과학예능대[26]의 학생회[27]가 구성되어 학생들의 목소리를 모으고 연대할 수 있었다면, 학교의 결정을 저지하거나 늦출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든다.[28]

총학생회를 비롯한 학생회에 대한 관심이 없는 것은 비단 가톨릭대만의 문제는 아니다. 학생회로서의 책임은 무거운데 학생회 경험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딱히 없다고 생각되기 때문이 아닐까. 대부분의 20대가 그렇듯 아르바이트나 취업 준비만 해도 빠듯하다. 학생회 경험을 스펙으로 활용하는 사례도 있으나, 현재 취업준비 양상을 보면 학생회 경험이 이렇다 할 메리트가 되지는 못하는 것 같다. 그러나 많은 학생들을 대표하거나 일하는 경험은 사람에 따라서는 만족감을 줄 수 있다. 대학생활에서 몇 안 되는 리더십 함양의 기회이기도 하다. 또한, 학내 여론의 움직임을 살펴보고 학생들을 대표하여 학교와 소통하는 과정 등을 통해서 간접적으로나마 사회 경험을 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실제로 학생회는 많은 희생이 필요한 활동이다. 일정한 직책에 이르는 경우 소정 금액의 장학금이 지급된다. 그러나 그만큼 시간을 뺏기는 일이 많다. 학제 개편, 등록금 인상 등의 특정한 이슈나 축제와 같은 행사가 없더라도 정기 회의를 포함한 일상 활동만으로도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하는 것이 사실이다. 대부분의 학교의 학생회가 그렇듯, 학생회비와 관련하여 불신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29] 그러니 누가 학생회를 하고 싶어하겠는가. 어지간한 이유가 아니면 할 유인이 그리 많지 않다고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서 다룬 학제 개편 등 학내 문제를 가장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조직이 학생회다. 학생회는 학생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학교에 전달하는 창구 역할을 한다. 앞으로도 학생회에 대한 관심은 적겠지만, 학생회장으로서 책임을 질 자신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도전해보기 바란다.[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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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동향 파일:KakaoTalk_20171111_174936765.jpg[31]
아나키즘?

2019년도에는 총/부총학생회장과 생활과학대 학생회장에 각각 한 후보만이 입후보하였으나 총학은 투표율 미달로 낙선, 생과대 단대장만 당선되었다.

2019년 3월 말에 치러진 보궐선거에 총학생회, 이공대 학생회장, 총동아리연합회장에 각각 한 후보만 입후보하였다. 지난 선거에서 투표율 미달로 아쉽게 낙선했던 총학 후보측이 선거 홍보에 열을 올렸으며 학교선관위 측에서 과잉투표독려로 경고(…)를 받기까지 했다. 결국 총학선거는 유효 투표율 50%를 간신히 넘긴 50.94%를 달성해 당선, 몇년만에 총학이 구성되었으며 다른 두 후보도 여유롭게 당선되었다.


2.5. 제29대 총학생회[편집]



"우리의 봄, 바라봄"

2017년, 2018년 2년의 부재 끝에 2019년 제29대 가톨릭대학교 총학생회 "봄:봄" 선거운동본부가 당선되어 2019년 4월 3일부터 임기가 시작되었다. 임기 당시 총동아리연합회와 여러 충돌을 겪었는데 대표적으로 축제 진행과 분배금 조정에 대한 문제가 있다.[32][33]이러한 문제로 인해 애당초 소통을 강조했던 것과는 달리 모순된 행동을 한다는 비판 여론이 초기에는 강세였다. 하지만, 각종 제휴, 시설관리, 건의사항 해결, 민주적인 총장선출제 공론화 등 여러 사업으로 총학생회의 존재 가치를 어느 정도 증명하며 기본적인 체계를 갖추기 시작했다. 임기 후반에는 장도연 토크콘서트가 성사되는 기염을 토했다. 결정적으로 분배금 문제에서 총동아리연합회가 헛발질을 하는 바람에 초반 비판 여론은 완전히 뒤집혔다.역시 에브리타임

민주적인 총장선출제를 위한 TF "만개"를 발족하여, 총장선출제를 위한 기반을 마련하고 공론화를 하는 것에 힘썼으나 예상과 달리 저조한 서명운동 참여율[34]로 큰 행동력을 발휘하진 못했지만 적어도 가톨릭대학교에서의 학생 참정권 결여, 구조적 문제를 인식시키는 것에는 성공했다.

11월,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조직되어 총선거가 성사되었으나 입후보 단위는 약학대학 한 단위또 다시 아나키즘 뿐이었다. 약학대학 특유의 조직력 덕분에 70.25%[35]라는 역대 최고 투표율로 가뿐히 당선이 되었음에도 다시 총학생회 부재 시기가 도래하며 총학 부재에 대해 우려하는 여론이 생겨났다.[36]하지만 아무도 출마하지 않는다

이후 2년의 부재 끝에 탄생한 제29대 총학생회는 소통의 아쉬움은 뒤로하고 다양한 행사 기획, 사소한 문제 해결, 기본 체계 정립이라는 인상을 남기고 12월 31일을 끝으로 임기를 마무리하였다.[37]


2.6. 제30대 총학생회[편집]



"우리가 일으킬 새로운 물결"

2020년도 재선거를 통해 제30대 가톨릭대학교 총학생회 파랑 선거운동본부가 당선되어 2020년 5월 5일부터 임기가 시작되었다.[38][39] 제29대 총학생회의 명맥을 이어 출범하였으며, 2년의 부재를 깨고 2년 동안 총학생회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코로나-19로 인한 수업 운영 방식에 적절히 대응하면서도 총학생회를 구심점으로 여러 정책[40][41] 을 성사시키고, 향후 도약판이 될 수 있는 기초를 닦아 놓는데 큰 일을 했다. 이처럼 코로나-19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총학생회의 존재 의의를 다시 부각시키면서 높은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임기 말 후술할 큰 고초를 겪어 난항이 계속되었다. 그럼에도 뚜렷한 성과와 학생들을 대신한 그 동안의 노력으로 두터운 지지를 얻으며 임기를 마무리할 순 있었다.[42]




2.6.1. 졸업준비위원장 선출[편집]


졸업준비위원회 폐지가 논의되는 와중 시기적 문제와 학교 본부와의 이해관계로 인해 내년도로 본 안건을 이관하고자 일단 졸업준비위원장은 선출하도록 중앙운영위원회는 결정, 이에 위원 후보 모집을 공고하였다. 하지만, 순탄치 못한 졸업준비위원장 선출 과정으로 큰 난항을 겪었다. 당시 졸업준비위원장 후보를 모집하고 위원장 인준을 중앙운영위원회에서 논의하였는데, 해당 안건을 의결하는 과정에서 총학생회장단이 단과대학 학생회장들에게 연락을 돌려 B학우에서 A학우로 투표 변경을 종용한 사실이 단과대학 학생회장[43]들의 결의로 밝혀졌다.

사실 일반적인 논의과정이라면 찬반의견을 내며 서로 설득하는 과정은 문제될 것이 아니다. 하지만, 카카오톡 단톡방 투표로 의결이 진행된 상태에서 모든 위원이 투표를 끝마쳤음에도 투표를 종료하지 않고 연락을 돌렸으며, A학우가 총학생회장단과 친분이 있었다는 점, A학우의 지원 동기를 첨삭하여 중앙웅영위원회로 전달한 것이 모종의 의도를 가진 것인지가 논란의 중심이 되었다,[44]

이에 총학생회장단은 이에 전면 반박하며 충분히 있을 수 있는 논의 과정이며 A학우로 투표 변경을 요청한 이유[45]와 지원 동기 첨삭 이유[46][47]를 밝혔다. 더불어 중앙운영위원회 논의 당시 녹음본을 통해 단과대학 학생회장들의 발언[48][49]을 공개하여 진흙탕 싸움에 발을 들였다. 전반적으로 입장문의 내용에 대한 근거가 의심스러운 점이 많고 근거가 충분히 깔끔하지 못하다는 점에서 여론에 큰 반전을 꾀하진 못하였다. [50][51] 하지만, 적어도 단과대학 학생회장들의 주장이 신뢰성을 크게 잃었다는 것에선 논란의 여지가 없다.

해당 사태는 서로의 입장문 정도로 유야무야되었고 학우들에게 찝찝함만 남기며 깔끔한 해결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최종적으로 중앙운영위원회 차원에서 당해 연도 졸업준비위원회 폐지를 재논의하면서 일단락되었다.[52] 결국 명확한 소명은 없고 책임은 그 누구도 지려 하지 않았으며 문제가 되는 상황을 빨리 해소하기 위해 기존 방안이 아니라 폐지라는 강경한 카드를 내민 것으로 보인다는 평가가 절대 다수이다. 때문에 학생 사회에 대한 신뢰도가 급격히 떨어졌고 그들만의 리그라는 오명이 더 뚜렷해졌다.[53][54]

이렇게 임기가 마무리될 줄 알았으나..


2.6.2. 2020 총선거[편집]


2020 총선거에는 총무려 5단위[55]의 후보자 등록이 이루어졌다. 사실 총학생회장단에는 2단위가 출마한다는 소문이 돌았고 이렇게 된다면 가톨릭대학교 학생 사회에서 몇년 만에 경선이 이루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다:함 선거운동본부만 등록 되었는데, 상대 선거운동본부였던 다움 측 정후보가 에브리타임에 입장을 올리며 상황이 전파되었다.[56] 요지는 다움 측 정후보의 피선거권이 문제가 있다는 내용[57]을 다:함 측에서 이의제기하였고 이를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수용하여 후보자 등록이 불허됐다는 것이다.이를 두고 에타 여론은 다:함을 비난하는듯 들끓었다.[58] 오죽하면 시험기간에 에타 게시글이 끊이질 않을 정도였다.때문에 다:함 측 해명을 요구하거나 무투표를 요구하는 여론이 강세를 이루었다.

하지만, 피선거권은 그 누구도 챙겨주지 않는 본인의 권리이다. 집행부의 정의가 모호하다고 주장하지만 인권위원회에서 위원은 의사결정 뿐만 아니라 사업을 집행하는 역할도 실질적으로 하고 있다. 더불어 같은 특별기구인 도서관자치위원회와 비교해보면[59] 충분히 추론 가능하고 타당한 해석이었다. 정후보의 입장문에서도 설득력이 부족한 내용이 많다.[60] 때문에 규정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학생들의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방해한 처사가 된다. 아무리 경선이 학생들에게 더 많은 선택지를 제공한다고 해도, 규정상에 명확히 근거하지 못한 선거라면 기본적으로 치러져서는 안될 선거이기 때문에 개인에게는 아쉽고 안타까울 수 있어도 후보자 등록이 불허된 양상이 합리적인 결정이 맞다.[61][62]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잠잠해지는듯 하였으나..

선거운동 과정에서 후보자 등록 불허 사태에 더해 이를 두고 당시 총학생회였던 파랑과 다:함의 모종의 유착이 아니냐는 낭설이 돌았는데[63][64] 이를 두고 당시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이던 총학생회장이 다:함을 밀어준다는 이야기가 계속해서 올라왔다.[65] 이런 전반적인 선거 상황을 두고 학보사는 기획 취재를 진행하였는데 학생사회에 상당한 무지와 한 쪽에 편향된 몰아가기식 기사를 작성하는 모습을 보였다.[66][67][68] 하지만, 여론은 그만큼 들끓지 못했다.[69] 오히려 다:함 측 선거운동이 다방면에서 제대로 이루어지는 과정과 겹쳐 홍보를 해주는 결과를 나았다.이런 식으로라도 홍보가 되어야하는 대학생 학생자치의 웃픈 현실

하지만, 이후 불씨에 더 큰 불을 옮기는 사실이 밝혀진다. 학보사가 유착을 합리적으로 의심할만한 증거를 포착, 기사를 기재하였는데 내용은 2020년 총학생회 파랑이 당선된 재선거에서 당시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이던 다:함 측 부후보가 총학생회 선거운동본부 파랑의 실무진 단톡방에서 포스터 피드백을 남겼다는 것이었다.[70][71][72] 이에 다:함측 부후보는 수 많은 단톡방을 두고 있던 과정에 미처 확인하지 못해 단톡방을 착각하여 발생한 실수라고 해명하였으며, 정말 유착이 존재하였다면 해당 카톡 이외에 모든 내용을 공개해도 된다는 초강수를 두었다. 오히려 이에 "나도 저런 실수해봤다." 등의 동정 여론이 커졌고 이 이후 학보사도 더 이상 기사를 올리지 않음에 따라 큰 논란이 되지 않았다.[73] 이 이후로 모든 논란은 일단락되었고 투표기간은 다가왔다.

이런 상황 속에서 투표는 진행되었는데, 수 많은 악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함 선본은 연장투표에서 개표율을 넘기고 무난히 당선되었다.[74] 이로써 총학생회는 코로나-19의 악재 속에서도 몇년 만에 정선거에서 당선되었으며[75] 2021년 1월 1일부터 임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2.7. 제31대 총학생회[편집]



"다채로운 우리가 함께 더해갈 가치"

여느 대학이 그렇듯 코로나-19에 대한 수업 운영 방식 대응에 박차를 가하며 임기를 시작하였고, 임기 초에 진행한 수업 운영 방식 관련 서명운동에선 무려 3,555명의 서명을 받아내며 학생들의 큰 동력을 기반 삼아 활동하였다. 사실 여기엔 부총장의 발언으로 인한 것도 컸는, 코로나-19 확산이 교내에서 이루어지면 어떻게 책임질거냐는 총학생회의 질문에 "그땐 또 그때가서 생각해보면 된다."라는 망언을 쏟아내며 학생들은 격분한 것도 한 몫했다. 이후 서명 운동으로 위기감을 느낀 총장이 총학생회의 면담 요청을 수용[76]하였는데 여기서 총장의 발언 또한 학생들을 분노케했다.[77] 정말 귀신같게도 며칠 만에 교내 확진자가 발생하고 만다.

이처럼 학생들의 요구를 강력하게 전달하는 등 학생 대표 기구로써의 역할에 충실했다. 이후에도 여러 주요 사업을 성사시켰는데, 특히 군e-러닝 도입, 잡플래닛 제휴, 중앙도서관 홈페이지 개편, 수강신청 취소-시간차 지연제[78] 학생들이 그토록 불편하고 염원하던 정책들이 하나 둘 성사되었다. 더불어 학생들의 입장에서 뚜렷한 입장을 전달하면서 학생과 꾸준히 소통하기 위한 기조가 제대로 이행되었는지 전국적으로도 보기 드물게 임기 동안 단 한 번의 구설수도 나오지 않은 총학생회가 되었다. 오히려 가톨릭대학교 학생 사회에서 보기 어려운 릴레이 대자보[79]가 이어지기도 했다.

제31대 총학생회가 여러 사업을 진행하면서도 동시에 동력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소통의 역할이 가장 크다. 각 부처장 면담을 역대 총학생회에 비해 가장 많이 진행하면서 매번 면담 진행 사항을 공개적으로 보고하여 총학생회가 무엇을 하는 단체인지 알려 존재를 체감시켰고, 유튜브를 제대로 활성화시키며[80] 학생들에게 재밌게 다가가면서도 매월 짜잘한 회의나 활동 등을 일 단위로 공유[81]하는 등 학생과의 간극을 좁히기 위해 상당히 애쓴 모습이 엿보인다.[82] 뿐만 아니라 학생 자치 내부적으로도 많은 신경을 쏟은 걸 볼 수 있는데 인권위원회와 도서관자치위원회와 협업하여 사업을 진행하거나 총학생회칙 개정안을 1년간 17의안[83]을 발의하면서 내부 시스템 재정비에도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 때문에 차라리 연임하여 쭉 독재를 해달라는신종고문? 농담도 가볍게 볼 수 있다. 에브리타임이나 여러 창구 댓글 반응에서도 볼 수 있듯 역대 최고라는 평가를 받으면서 임기 말까지 쭉 그 동력을 이어온 총학생회로 각인되어있다.이렇듯 다양한 사업과 학생들과의 적극적 소통, 학교 본부 대응 등 다방면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남기며 1년간의 임기를 끝으로 2021년 12월 31일 임기를 마무리하였다. 슬프게도 당시 정선거에서 총학생회장단 단위에 아무도 출마하지 않아 제31대 총학생회를 끝으로 3년간 존재했던 총학생회는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로 돌입, 사라지게 되었다.


2.8. 2022년 총학생회 비상대책위원회 체제[편집]



2021년 정선거에서 총학생회장단 단위에 아무도 지원하지 않게 됨에 따라 2022년은 총학생회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로 이어지게 되었다.[84] 2022년 재보궐 선거에서 정경대학, 이과대학, 총동아리연합회, 총학생회장단 총 4단위가 출마하였으나 총동아리연합회는 피선거권 요건 미충족또?, 총학생회장단은 추천인 수 미달로 정경대학과 이과대학만 본 후보 등록이 허가되었고 이후 투표에서 2단위 모두 당선되었다.[85] 2022년 9월 현재는 정경대학 학생회장이 총학생회 비상대책위원장을 겸하고 있으며, 코로나-19로 인해 가을로 미뤄진 아우름제에는 10cm케이시가 올 예정이라고 한다.[86]


2.9. 2023년 총학생회 비상대책위원회 체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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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도 그럴 것이, 1995년 가톨릭대학교 통합 이전에는 성심여대였기 때문이다. 1995년에 입학한 남학생이 군휴학 없이 4학년이 되려면 98년도는 되었어야 한다. 공학으로 전환된지 얼마되지 않았던 때이고, 남학생보다 여학생의 비율이 높을 때였다.[2] 선관위가 양측 후보캠프의 항의에 힘들어하기도[3] 2000년 대학내일 신문 참조[4] 단식투쟁, 등록금 추가기간 내기 운동 등[5] 지금은 상상도 못할일이지만 메인 무대가 성당 잔디밭에 세워졌었다. 물론 축제가 끝난 뒤 잔디가 모두 압사(...)당해 그 해 내내 성당 잔디밭은 출입금지가 되었고, 그 이후로 축제 메인무대는 운동장으로 옮겨졌다. 또한 부천시장 원혜영이 와서 축사를 하기도 함. 재미있는건 당시 부총이 부천시장보다 학교에선 총학생회장이 우선이라며 총학생회장 먼저 우대하는 에피소드가 있었다고 한다.[6] 운동권으로부터 멀어지는 경향은 특정 학교에 한정된 문제는 아니다. 한편 2004년 총학생회 당선이 무효되는 사태가 있었다. 해당 사태가 운동권과 거리가 멀어지게 된 것과의 관련성을 생각해보는 것도 가능하다.[7] 정확히는 '민주노동당 학생위원회 중앙당위원회'로 활동했는데, 이조차도 후보자 본인이 공개하지 않고 성심교정 학생들에 의해 밝혀진 내용이다.[8] 25대 총학생회장 투표기간은 2011년 11월 29일 화요일부터 12월 2일 금요일까지였다.[9] 그 외에도, 어두컴컴해지는 저녁에 건장한 남학생 3~4명이 학생 하나를 에워싸고 "선거 하셨어요?"를 물어본다거나.. "예쁜 여자랑 못생긴 여자가 같이 지나갈 때는 못생긴 여자를 불러야 해. 예쁜 여자는 평소에도 시선을 많이 받아서 꿈쩍하지 않는데, 못생긴 여자는 평소에 받지 못하던 관심을 가져주면 좋아하거든" 등 이런 식으로 선거 독려하는 행위는 거의 선거회칙 위반에 가깝다라고도 볼 수 있겠다.[10] 가톨릭대학교 총학생회 회칙 중 선거 시행 세칙 제5장 33조~35조[11] 당시 싸이월드 내 커뮤니티인 가좋사[12] 학교에서는 등록금 인상과 관련한 설명회를 개최한 바 있다. 그러니 학교에서 등록금을 올리려는 시도가 없었다고 볼 수는 없다.[13] 2010년 총학생회는 미셸푸드 퇴출 등을 포함하여 등록금 인상 반대를 학교에 강력히 요구하는 행동을 보였다. 이뿐만 아니라, 많은 학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가톨릭대 구성원들도 등록금심의위원회와 관련된 대응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2011년에 있었던 반값 등록금 시위라는 맥락 생각해봐야 한다. 결국 당시 정부는 현재에도 시행되고 있는 국가장학금의 형태로 타협했다. 학교에서도 당시의 시류에 편승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가능하다. 앞선 각주의 학교의 등록금 인상과 관련된 설명회와 학생들의 반발, 등록금에 대한 사회적 이슈화라는 일련의 맥락을 생각해봐야 한다. 결코 저절로 주어지는 것은 없다는 것을 꼭 명심하자.[14] 현재 삼성카드를 통해 시행되고 있다.[15] 군내 학점 인정제를 인정하지 않는 학교들이 많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으나 학교에서는 인정하고 있지 않다.[16] 학교 측에서는 현재 39개인 학과/전공을 30개로 축소할 계획.[17] 결국 몇몇 학과를 학부에 통합하는 방식으로 학제를 개편한 바 있다.[18] 2010년 당시 23대 총학[19] 경영학과의 경우 경영대학 설립과 관련된 불만이 있었다.[20] 사실 이는 말이 되지 않는 발상이다. 입학 점수는 그저 선호도일뿐이라 매해 변한다. 프랑스학과는 1980년대 학교에서 가장 인기 높은 학과였고 1990년부터 2000년 초반까진 정보통신공학부와 컴퓨터공학부는 간호대와 같은 점수대였다. 이걸로 경쟁력을 따지는건 고등학생들과 아직 고등학생 티를 벗지 못한 정말 막 입학한 신입생들 중 일부나 하는 발상이다. 참고로 요즘은 사회복지와 심리가 속한 사회과학부, 이과는 2018년 기준 정보통신전자공학부, 생명 환경학부가 뜬다.[21] 애초에 공학 계열이 적어 공학 계열 신설과 확충이 숙원인 학교에서 전통적인 공학 계열인 두 학부가 통폐합 대상에 올라갈 가능성은 전무하다. 게다가 두 학부는 건겅 보험 기준 취업률이 흔히 알려진 대학들 중 항상 차상위권에서 중상위권 이상에 포진하며 공모전, 알고리즘, 해킹 대회 등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어 오고 있다.[22] 이와 관련하여 커뮤니티에서는 국문학과의 취업률이 가장 높다는 글이 게시되기도 했다.[23] 종교재단의 학교라는 특성상 사회적 비난을 받는 것에 예민할 수 밖에 없는 측면이 있다. 그러니 학제 개편을 무리하게 진행하기 어려운 점이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24] http://m.catholic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9986[25] http://cukkyoji.tistory.com/m/349 가톨릭대 종교학과 폐과를 다룬 성심교지의 글을 찾아볼 수 있다.[26] 줄여서 인예대라 불렸다. 사회과학대는 사회대, 이공계열은 이공대, 생활과학대는 생활대로 줄여서 불리곤 했다.[27] 공식적으로 단과대학은 없지만 학생회의 단위로 존재했다.[28] 다음은 어느 학과가 대상이 될지...[29] 학생회장을 하면 차를 한 대 뽑느다 라는 식의 카더라 등등[30] 책임도 학생회장에 나서지 않는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31] 모두 3학년 이상은 되어야 할 수 있다는 규정이 있어 본격적인 사회 진출을 준비해야 하는 시기에 맡는 것이 개인적으로는 부담스러운 일이다.[32] 당시 총학생회는 학교본부와 협의하여 장범준을 섭외하였다. 하지만, 섭외로 인해 변동된 무대 조율 문제를 총동아리연합회에 갑작스레 통보하면서 동아리 무대 조율에 대한 문제가 발생하였다.부총 : 공지가 곧 통보다 에브리타임에서는 우리 학교 학생이 먼저냐 연예인이 먼저냐 동아리 그들만의 리그보단 장범준이지의 여론이 충돌하면서 혼란을 빚었으나 장범준의 역대급 무대와 총학생회의 입장문이 올라오면서 갈등은 일단락되었다.[33] 2019년 9월, 총학생회칙 전부개정안이 총학생회를 통해 발의되었는데 재정과 관련된 내용 중 총동아리연합회의 예산이 기존 15.5%에서 10%로 하향 조정되어 논란을 빚었다. 이에 총학생회는 다른 단위도 모두 하향 조정된 결과이며 의결기구, 선거기구 등 학생자치를 위해 배정하였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 내용은 중앙운영위원회를 통해 지속적으로 논의된 사안이다. 문제는 중앙동아리를 대표하는 총동아리연합회장이 회의 당시 무단 결석하거나 제대로 반대의사를 밝히지 못하였고 발의가 다 된 시점에서야 공론화를 시켜 대표자로서의 자질을 의심받았다. 결국 대응도 한 번 제대로 못하고 여론전만 하다 임시전체학생대표자회의가 개회되었다, 이 당시 총동아리연합회는 대다수 대의원들에게 질문몰매폭격을 받았고 결국 압도적 표 차이로 전부개정안은 가결되었다.[34] 1396명, 절대로 적은 수는 아니지만 큰 의제에 비하면 관심이 저조했던건 사실이다.[35] 121명 중 85명... [36]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를 생각할 수 있지만, 약학대학과 다른 단과대학은 교류가 거의 없다시피 하기 때문에 사실상 다른 학교 사람인 것 같은 느낌이 강하다. 실제로 약학대학 학생들을 볼 기회는 거의 없다. 아예 한 번도 못보고 졸업할 수도...[37] 학사운영 대응이나 학사제도 개편에 대해선 대응이 미비하였으나 2년만에 생긴 총학생회의 역할은 충분히 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38] 코로나-19로 선거 방식이 온라인 투표로 변경되면서 선거일정이 한 달 남짓 늦게 시작되었다.[39] 연장투표 없이 본 투표에서 투표율 50%를 가뿐히 넘겼으며 공과대학, 인문대학, 생활과학대학, 이과대학도 함께 당선되었다.[40] 체육교과목 신설, 예비군 공결대체과제 폐지 및 완화, 온라인 축제 등[41] 온라인 축제는 토크 콘서트 형식으로 진행되었으며 제제김창옥이 참가하였다.[42] 총학을 비판하는 여론도 “일은 잘했다.”라는 말을 꼭 붙인다. 그만큼 총학생회의 존재의의를 명확하게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고평가받는다.[43] 약학대학 제외[44] 졸업준비위원장은 단과대학 학생회장과 동일한 단체장 장학금(180만원)을 수혜받는다.[45] B학우가 새내기라는 현실적인 점을 고려하여 졸업준비위원회 폐지 논의와 졸업 사무를 지속시킬 역량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46] 개인 정보 보호법에 의거하여 지원 동기 원본을 밝힐 수 없음에 수정을 거쳤다고 한다.[47] 하지만, 설득력이 떨어지는 주장이다. 중앙운영위원회 차원의 모집 공고로 충분히 논의 과정에 쓰일 것은 누구에게나 예측 가능한 상황이고 법령상 근거가 있었다면 미리 설명했으면 되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러나 수 천명이 보는 입장문에는 지원동기를 올린다! 지원 동기의 부분을 삭제하거나 어미나 조사를 수정한 것이 아닌 사실상 새로운 문장을 덧붙인 수준이라는 점를 미루어 볼 때 되는 대로 끼워맞춘 주장으로 합리적인 의심을 가질 수 밖에 없다.[48] "졸업준비위원장 개꿀이라 하고 싶다." "A가 하면 내가 총무한다." 등[49] 하지만 일각에서는 녹음본 공개의 목적이 졸업준비위원장 선출 과정에서 졸업준비위원회 폐지로 논점을 바꾸고 단과대학 학생회장들의 흠을 잡으려는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 존재한다. 실제로 입장문을 보면 "중앙운영위원들이 폐지에 동의한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 주요 목적인데 논란이 된 점은 위원장 선출 과정의 부정한 개입이었다.니네는 깨끗하냐? [50] 실제로 단과대학 학생회장을 비판하는 여론도 "총학도 잘못은 했지만"으로 시작한다. 때문에 부정한 개입으로 볼 여지 자체를 원천 해소한 것은 아니라 논란의 여지는 남아있다.[51] 민주적인 총장선출제를 지향하지만 내부적으론 반민주적인 행태를 보였다는 점에서 몰매를 맞기도 하였다.[52] 결국 폐지되면서 총학생회로 졸업 사무가 이관되었다.[53] 그도 그럴게 졸업사무는 의외로 신경쓸 일이 많은 일이다. 단순히 단체장 장학금 문제였다면 단체장 장학금을 재조정하거나, 기구의 쓰임을 달리하여 학위수여복 신규제작과 같은 새로운 목표를 기구에 부과했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세부적인 논의는 없었고 단순히 하는 일이 없으니 폐지한다 수준에 그쳤다.[54] 더군다나 20년도에 폐지를 결정하여 21년도에 졸업사무는 총학생회가 하게 되었지만, 총학생회 부재 시 공백을 메꿀 장치에 대하여 논의조차 없었다는 점에서 당사자들은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는 상황을 보면 총학생회장단과 단과대학 학생회장들의 입장과는 상당히 상반된 결과가 도출되었다.[55] 총학생회장단-다:함, 공과대학-초롱, 상경대학-상상, 생활과학대학-혜성, 약학대학-가약만사성[56] 당시 본문 : https://everytime.kr/380299/v/152508303[57] 정후보가 인권위원회 위원이기에 피선거권이 없다는 내용[58] "얼마나 총학생회장이 하고 싶었으면", "경선이라 기대했는데, 이번에 투표안합니다.", "반대측 무섭다 무서워.." 등[59] 당시 규정으로는 도서관자치위원회의 선거운동 자체가 불가하였고, 이를 도서관자치위원회으로 규정하지 않았다.[60] 1)인권위원회는 외부로 부터 부당한 개입이나 요구를 받지 않는다. = 후보자 등록을 위한 피선거권 논의는 정당한 절차이며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이를 결정 및 집행하는 기구로 적합하다. 2)특별기구로서 집행기구의 성격을 띄지 않는 자치기구 = 인권위원회의 실질적 사무는 의사결정에 따른 예산 및 사업 집행이며 이는 위원들이 분담하여 한다. 3)집행부의 정의와 범위가 모호하다 = 규정의 체계상 해석에 있어 모호하지 않다. 더군다나 실제 법률상에서도 모든 단어를 하나하나 명시하여 설명하고 있지 않다. 사실 이 부분이 앞 뒤가 안맞는 것이 설사 애매하다고 판단했다면 사퇴를 했어야.... 4) 회칙을 적용할 때 있어서 만든 의도와 목적에 대해 생각하여 판단하지 말고, 주관적인 생각을 배제해야 한다. = 이해관계에 따라서 공직의 역할을 뒤로하면 안되겠지만 각 개인의 주관을 배제할 순 없기 때문에 의결이라는 결정 과정을 거친다.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 괜히 있는게..., 더불어 입법취지는 실제로 판례에서 인용되기도 한다[61] 대학교 학생사회에 특성상 규정을 명확히 이해하고 이를 고민하는 이는 소수이기 때문에 학생사회의 안타까운 일면 또한 모습을 보였다.[62] 비슷한 사례로 2019년도 법정경학부의 학부 학생회장 선거에서 피선거권이 충족될 수 없는 이가 후보 등록이 이루어져 선거 무효에 더해 비대위체제로 전환된 적이 있다.[63] 이는 다:함 측 부후보자가 파랑 집행부였으며 동시에 2020년 재선거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이었기 때문이다.[64] 사실 다움 부후보도 마찬가지로 파랑 집행부였다. 재밌는건 당시 다:함 측 정후보가 행정학과, 부후보가 정보통신전자공학부였고 다움 측 정후보가 정보통신전자공학부, 부후보가 행정학과였다.[65] 명확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닌 추측성 글이 난무했다. 재밌는건 똑같이 총학생회 집행부를 같이 맡았던 다움 측 부후보에 대해선 언급도 없었다는 것이다.의도가 보인다.[66] http://www.cuk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3325[67] http://www.cuk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3336[68] 총학생회장을 대통령에 비유하거나, 총학생회장이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있는 총학생회장단 선거를 담당하는 모습은 문제가 있다고 하지만 정작 단과대학이나 총동아리연합회는 언급 조차하지 않고, 학생자치에 일면식도 없는 법학과 교수님에게 조언을 구하고 있다. 심지어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선거운동본부 등 인터뷰조차 없었고 타 대학 사례에 대한 조사도 없었다. 교수님께 조언을 받을 때조차 총학생회칙 전문을 사용하지도 않았으며, 담당기자들은 제대로 찾아보지 않고 중앙선거관리위원장 인준과정 공포 사실이 배포된 온라인 창구에 대한 잘못된 사실을 기사로 담았다.이미 야마가 정해진 기사,기레기[69] 그도 그럴 것이 기사 자체의 허점이 너무 많고, 다:함에 대한 낭설은 근거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힘을 계속 잃었다. 더불어 다움의 후보 등록 불허 또한 시간이 지날수록 학생들 사이에서 합당한 결과임이 자명하게 되었다.[70] http://www.cuk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3337[71] 참고로 2020.11월 총선거 기준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인 총학생회장은 2020.5월 재선거 당시 총학생회장 후보였으며, 2020.11월 총선거 기준 다:함 부후보는 2020.5월 재선거 당시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이었다.둘 다 자리만 바뀐..?[72] 이번 선거에 명확한 사실을 제공하는 기사는 아니지만 학생들의 의심을 어느 정도 합리적 수준으로 끌어올렸다.[73] 개개인의 관계와 별개로 사실 이러한 양상은 학생 자치의 아픈 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더 이상 대표자로 나오거나 학생 자치에 관심을 두지 않는 학생들이 많아지면서 어느 정도 애정이 있는 학생들만 계속해서 총대를 매고 일을 해오기 때문에 학생 사회에 내에선 굉장히 좁은 관계가 형성된다. 때문에 그 사람이 그 사람이라는 말이 어찌보면 반은 맞는 말이다.[74] 나머지 4단위인 생활과학대학, 공과대학, 정경대학, 약학대학 모두 개표 및 당선되었다.[75] 19년도 봄봄과 20년도 파랑도 모두 재보궐선거 당선이었다.[76] 총학생회장단 직접 서명을 비서실에 전달하여 해결을 촉구하는 보기 드문 광경도 펼쳐졌다.[77] "캠퍼스 라이프를 느끼게 하기 위해서라도 학교에 와야한다."코로나-19 걸리면 병상라이프[78] 그 밖에는 cuk멤버쉽 대폭 확대, 2022 온라인 아우름제 성사-카더가든, 메타버스 행사, 중앙도서관 미디어실 컴퓨터 개선, 니콜스 4층 게시판 전면 교체 등이 있다[79] 총장이 학생 대표자와의 면담을 사실상 거부하면서 발생한 릴레이 대자보 대응이다.[80] 총학생회 메인 컨텐츠는 1.7천회의 조회수, 축제의 경우는 1만회의 조회수를 기록하였다.[81] 월간 다:함 사업으로 각 국서별 내부 회의는 물론 외부 활동도 모두 적혀있다. 심심하면 한 번씩 읽어보는 것도 좋다.[82] 짜잘짜잘한 공지나 급한 소식은 인스타 스토리로 자주 올라왔는데 재밌게도 학교내 공식적인 단체에서 2021년 최초 교내 확진자 발생을 공지한 단체가 총학생회이다.학교 뭐하는? 심지어 이때 관할 담당부서인 총무팀은 화랑 카페에 이 소식을 전달조차하지 않아 화랑 사장님께서 전체 휴강이난 학교에서 재료들을 준비하고 하염없이 학생들을 기다리는 해프닝도 있었다.[83] 전부개정안,부분개정안 포함[84] 2021년 정선거에서는 사회과학대학과 약학대학 단위가 출마하였고 두 단과대학 모두 무난히 당선되었다.[85] 정경대학과 이과대학[86] 다맛제에는 구원찬과 주니엘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