쑤이저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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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중국 후베이성 북부의 지급시. 우한에서 서북쪽으로 100km, 샹양에서 동쪽으로 80km. 난양에서 동남쪽으로 120km 떨어진 평지에 위치한다. 관할 인구 200만 중 도시 자체에는 120만이 거주한다.
시가지는 원수이 강 북안에 위치하며, 공단을 사이에 두고 북쪽의 쑤이현과 이어져 있다. 중국의 3번째 통일 왕조인 수나라 국호의 유래가 된 곳으로, 지금도 주민들은 그에 대한 자부심을 지닌다.
현대에는 농산물의 집산지이고 기계, 제약, 전자 산업 등이 발달하였다. 샹양-우한간 일반/고속철이 지난다. 1978년 시내 서부에서 발견된 증나라의 군주 무덤인 증후을묘(曾侯乙墓)와 쑤이현에 있는 염제 & 신농 유적(炎帝神农故里)이 주요 관광지이다. 2021년 여름 중국 대홍수 시에 21명이 사망하는 등 피해를 입었다.
2. 역사[편집]
증후을묘에서 출토된 편종 유물. 여기서 발견된 청동기 총량은 지금까지 한반도와 일본에서 발굴된 청동기를 합친 것보다 많다
중국 신화에서 농경의 신으로 나오는 염제와 신농의 탄생지라 히며, 후자의 탄생일로 전해지는 음력 4월 26일마다 축제가 열린다.
춘추전국시대에 역(歴), 증(曾), 당나라(唐)에 이어 수나라(随)가 있었고, 후자는 초나라의 속국이었다가 결국 그에 병합되었다. 다만 이후로도 지명으로 남아 한대에는 남양군 수현(随県)이 설치되었다.
서남쪽 한수이 방면의 루린(녹림)은 신나라를 멸망시킨 녹림군이 거병한 곳이다. 535년 서위 시기에 수현은 현 지명과 같은 수주(随州)로 개칭되었고, 그 귀족인 양충이 수국공으로 봉해졌다. 그를 계승한 아들 양견 역시 작위를 이어 수주를 영지로 삼았고, 후일 황제에 오른 후 국호를 수나라로 정하였다. 다만 양견은 随의 물수변이 불길하다고 여겨 그를 제외하고 새로운 隋를 국호로 삼았다.
남송 시기에는 금나라가 정복한 남양군과 접한 변겨이었다. 그후 몽골 제국에 맞선 명장 맹공이 유년 시절을 보냈고, 원명교체기에 명하를 세운 명옥진의 고향이다.
1912년 신해혁명 이후 수주는 쑤이현으로 개칭되었다. 현대에 들어 일대에는 공산당 활동이 활발하였다. 1927-29년 혁명위원회가 설치되었고 1931-32년 소비에트 정부, 1940-44년 애국민주정부가 수립되었다. 해방 후 1980년 현급시를 거쳐 1994년 지급시로 승격되었다.
3. 교통[편집]
관내에 쑤이저우역(随州站)과 쑤이저우난역(随州南站)이 존재하며, 쑤이저우역은 재래선인 한단철도(汉丹铁路)가, 쑤이저우난역은 고속철도인 한스고속철도(汉十高速铁路)가 지난다. 공항은 없다.
4. 출신인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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