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 (r0 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나치 독일의 전쟁범죄)] ||<:>'''{{{#FFF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의 주요직책}}}'''|| ||<#FFF,#191919><:>{{{#!folding [ 펼치기 · 접기 ] [include(틀:역대 나치 독일 외무 장관)] [include(틀:역대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 지도자)] [include(틀:슈츠슈타펠/장성급 지휘관)]}}}|| ||<:><-3><#DD0000>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B70101 0%, #CC0000 20%, #CC0000 80%, #B70101)" '''{{{#white 초대 외무장관 [br]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 초대 총독 [br] 친위대 명예 상급집단지도자 [br]{{{+2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 [br]Konstantin von Neurath}}}'''}}}|| ||||<-3><#ffffff><:>{{{#!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콘스탄틴 폰 노이라트 프로필.jpg|width=100%]]}}} || ||||<:><#DD0000>'''{{{#white 본명}}}'''||콘스탄틴 헤르만 카를 폰 노이라트 남작[br](Konstantin Hermann Karl Freiherr von Neurath) || ||||<:><#DD0000>'''{{{#white 출생}}}'''||[[1873년]] [[2월 2일]] [br] [[독일제국|독일국]] [[뷔르템베르크 왕국]] 호프구트클라인글라트바흐 || ||||<:><#DD0000>'''{{{#white 사망}}}'''||[[1956년]] [[8월 14일]] (83세) [br] [[서독]] [[바덴뷔르템베르크]]주 엔츠바이잉겐 || ||||<:><#DD0000>'''{{{#white 정당}}}'''||[include(틀: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DD0000>'''{{{#white 최종계급}}}'''||[[슈츠슈타펠]] [[대장(계급)|대장]] (상급집단지도자)|| ||||<:><#DD0000>'''{{{#white 시민권}}}'''||[[독일인]]|| [목차] [clearfix] == 개요 == || [[파일:노이라트2.jpg|width=100%]] || ||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 (Konstantin von Neurath)''' ||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는 [[나치 독일]]의 외교관이자 [[슈츠슈타펠|친위대]] 상급집단지도자, 국가외무장관을 맡았다. == 초기 행적 == [[뷔르템베르크 왕국]] 호프구트클라인글라트바흐(Hofgut Kleinglattbach)에서 장원영주 겸 뷔르템베르크 왕국 궁정사무원의 아들로 태어난 노이라트는 튀빙겐 대학교와 베를린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고향인 뷔르템베르크 왕국의 법무관이 되었지만 [[1901년]]에 독일 외무성에 들어가 이 해에 결혼하여 두 자녀를 두었다. == [[제1차 세계 대전]] == 주 런던대사관 부영사, 주 콘스탄티노플 대사참사관으로 일하던 노이라트는 그 사이인 [[1916년]] [[제1차 세계 대전]]때 예비역 장교로 종군하면서 철십자훈장을 수상했다. [[1917년]]부터 이듬 해까지 뷔르템베르크 국왕인 [[빌헬름 2세(뷔르템베르크)]]를 보좌하며 궁정집사로 취임하기도 했다. == 정치인으로서의 행적 == 전후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대통령]]의 요청으로 외무성으로 되돌아 온 노이라트는 [[덴마크]] 영사, [[이탈리아]] 대사를 지냈는데 이탈리아 대사재임시 [[베니토 무솔리니]]의 [[파시즘]]에 감명을 받았다. [[1930년]]부터 [[1932년]]까지 [[영국]]대사로 부임한 후 귀족출신이던 노이라트는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총애로 [[1929년]]에 구스타프 슈트레제만 외무장관이 급사하자 그 후임으로 각광받았지만 의회의 지지를 얻지못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32년]]에 남작내각이라 불린 [[프란츠 폰 파펜|파펜]] 내각에서 외무장관으로 발탁된 노이라트는 이어서 [[쿠르트 폰 슐라이허]] 내각, [[아돌프 히틀러|히틀러]] 내각에서도 유임되어 [[1933년]]의 국제연맹 탈퇴와 [[1935년]]의 영독해군조약의 체결, 라인란트 진주 등 외교적인 역량을 발휘했다. 귀족출신에다가 국제적으로도 지명도가 높았던 노이라트는 실무경험이 부족한 히틀러 내각에서 위신을 부여받았다. 하지만 이후 히틀러 내각의 고문이던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가 두각을 드러내면서 [[1936년]]부터 노이라트의 외교활동은 제한을 받기 시작했다. == 나치당원 == [[1937년]]에 노이라트는 [[나치당]]에 입당했지만 히틀러의 전쟁계획에는 반대하여 [[1938년]] [[2월 4일]]에 외무장관 자리에서 해임되었다. 그러나 내각에 잔류는 했지만 외교정책은 리벤트로프에게 완전히 권한을 내주고 말았다. == [[제2차 세계 대전]] == || [[파일:노이라트1.jpg|width=100%]] || || 친위대 제복을 입은 폰 노이라트 || [[1939년]]에 체코 보호령의 총독으로 부임한 노이라트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체코인 레지스탕스 진압 등에 나섰지만 전체적으로 온건한 정책을 펴서 강권적 통치를 원한 히틀러의 신뢰를 잃고 말았다.[*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감형이 되는 요소 중 하나로 작용하였다. 1939년 체코슬로바키안들 석방을 위해 보안경찰과 SD를 중재한 것, 1941년 폰 노이라트가 너무 온건하다고 질책하면서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를 대신 보내겠다는 히틀러에 반기를 들었지만 설득에 실패하자 사임하겠다고 한 것, 그리고 본인의 사표가 수리되지 않자 체코 보호령 총독으로 일하기를 거부했다는 점이 판결문 후반부에 기록되어 있다. [[https://avalon.law.yale.edu/imt/judneur.asp|뉘른베르크 전범재판 본 노이라트 판결문]]] [[1941년]]에 부총독 자리가 신설되자 국가보안본부장이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부총독으로서 [[프라하]]에 부임했다. 하이드리히는 체코 전역에 극심한 탄압정책을 편 후 노이라트의 실권을 빼앗았다. 하이드리히의 암살 후에도 후임 부총독이 된 [[쿠르트 달루게]]와 친위대 상급집단지도자인 [[카를 헤르만 프랑크]]에게도 밀린 노이라트는 [[1943년]] [[8월 24일]]에 총독직을 사임하게 되어 전직 내무장관이던 [[빌헬름 프리크]]에게 자리를 내 주고 말았다. 노이라트는 [[하인리히 힘러]]로부터 명예친위대 대장의 칭호를 부여받았지만 이후 직접 정치에 관여하는 일은 없었다. == 전후 재판과 최후 == 전후 프랑스군에게 체포된 노이라트는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전범]]으로 기소되어 침략전쟁 기획, 전쟁범죄, 반평화적 범죄, 인도주의에 반한 죄에서 모두 유죄선고를 받고 금고 15년형을 선고받은 후 [[슈판다우 교도소]]에서 복역하다가 [[1953년]]에 건강악화로 인해 가석방되었다.[* 모든 범죄에 기소되어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들중 노이라트만 유일하게 금고형이 선고되었다. 그리고 이는 유죄 판결을 받은 이들의 형 중 [[카를 되니츠|되니츠]]의 10년형 다음으로 가장 가벼운 형이었다. 반면 나머지 인물들([[헤르만 괴링|괴링]],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리벤트로프]], [[알프레트 요들|요들]], [[빌헬름 카이텔|카이텔]], [[알프레트 로젠베르크|로젠베르크]])은 사형 선고.] 그 후 노이라트는 은거지였던 엔츠바이잉겐(Enzweihingen)에서 [[1956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각주] [[분류:1873년 출생]][[분류:1956년 사망]][[분류:독일의 남작]][[분류:제1차 세계 대전/군인]][[분류:독일 제국의 군인]][[분류:독일의 정치인]][[분류:나치당원]][[분류:친위대(나치 독일)/인물]][[분류:바덴-뷔르템베르크 주 출신 인물]]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