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독수리 유격대 사건 (r0 버전으로 되돌리기) [[분류: 1950년/사건사고]][[분류:6.25 전쟁/전쟁범죄]][[분류:제2보병사단]] [include(틀:사건사고)] [목차] == 개요 == [[http://commando63.co.kr|독수리 유격대 공식 홈페이지]] [[6.25 전쟁]] 중반기인 [[1950년]] 말에서 [[1951년]] 초 사이 [[제2보병사단]]에 소속된 [[제17보병연대]] 1대대와 [[제32보병연대]] 3대대[* [[KCTC]] [[전문대항군연대]]의 모체 부대다.] 사이의 다툼이 [[유격대]]의 [[즉결처분]][* 총살 및 적전추방.]으로 이어진 사건. == 사건 전개 == 독수리 유격대는 본디 1950년 10월 포천 신읍에서 최종성과 최종철 형제를 포함한 63명으로 결성된 [[자경단]]이었으며 이후 17연대 1대대 부대대장인 김영필 대위의 주선으로 1대대의 비공식 [[민병대]]로 편입되었다. 그러던 중 1950년 11월 17일 서울 성동공업중학교(현 [[성동공업고등학교]], [[광희중학교]])에서 2사단이 재창설되면서 17연대가 사단으로 예속되었으며 31, 32연대도 창설되었다. 또 이 과정에서 김영필 대위가 소령으로 진급 후 32연대 3대대장으로 전출가게 되었는데 그동안 정들었던 1대대 예하의 독수리유격대원들을 함께 데리고 가려고 했다. 하지만 유격전을 할 정도면 정예 병력이기에 (17연대) 1대대는 당연히 이를 거절했고 이에 김영필 (32연대) 3대대장은 유격대가 있는 매복지까지 트럭을 몰래 추진해 기어이 빼내는[* 게다가 이는 대다수 유격대원들도 몰라서 단순 이동으로만 알았다.] [[월권]]을 저지르고 말았고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유창훈 1대대장은 김영필 3대대장에게 그들을 원대복귀시키라고 항의했다. 그러나 김영필 3대대장은 [[민병대|"이들은 본디 민간인이기에]] 특정 부대에 예속될 이유가 없고 유격대원들 또한 3대대에 있기를 희망한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군법회의에 소환하겠다'며 위협이 이어지자 김영필 대대장은 마지못해 유격대원들을 종용시켰지만 이에 유격대원들은 "우리가 너희들 장난감인 줄 아느냐? 17연대고, 32연대고 다 필요 없다. 태백산으로 들어가 독자적으로 작전을 펴겠다."며 반발했다. 그래도 김영필 대대장의 간곡한 설득에 마지못해 트럭에 올라타 원대복귀했다. 하지만 이 앙금은 이후에도 남아 1951년 2월 5일 밤 10시경 [[충주시|충주]] [[목행동|목행]]에 있는 17연대 1대대로 복귀한 유격대원들은 군장을 풀어 놓고 저녁 식사를 위해 집합하려고 했는데 무장 현역들에게 포위당한 뒤 도망병(!)이라는 이유로 창고에 감금되었고 유격대장 최종성을 포함한 5명의 간부가 정보과로 끌려가 탈영의 책임을 지고 대원들에게 "여기서 절대 무너지지 말고, 여기서 받아주지 않으면 김영필에게 가라"는 등 마지막 당부를 남긴 뒤 '대한민국 만세' 삼창을 끝으로 총살되었다. 게다가 남은 대원들조차 '''부정한 놈들이라며 팬티 차림으로[* 정확히는 '군에서 보급받은 옷들을 모두 벗고 가라' 여서 속옷까지 벗어야 했다. 그나마 이 와중에 민간 내복을 입고 있었던 대원은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강 건너 [[중국 인민지원군|중공군]][* 당시는 [[1.4 후퇴|중공군이 파죽지세로 서울을 밀고 남쪽으로 내려오던]] 시기였다.]이 있는 적지로 추방당했다.''' 이후 칼바람을 피해 골짜기에 모인 유격대원들은 연장자인 김익수 소대장이 "이렇게 된 건 김영필의 책임이니 그를 찾아가자"고 주장해 17연대의 감시를 피해 어찌어찌 32연대 3대대에 합류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연대 수색중대에 배속돼 경북 지역에 숨어든 북한군 10사단 유격대와 접전을 펼치거나 각종 고지 쟁탈전에 동원되다가 마침내 정전을 맞이했다. 하지만 이들은 군번 없는 민간인 신분이었기에 휴전 후 민간인 부대는 해체하라는 국방부령에 따라 해체 수순을 밟았고 소속 대원들은 유격대 경력을 증명받지 못한 채 날라온 [[입영통지서]]를 들고 현지 입대를 하거나 귀향했다. 하지만 적전도주로 국군에게 총살당했다는 오명은 여전히 이들에게 꼬리표로 붙어 한동안 고생을 해야 했다. 그나마 뒤늦게나마 국방부 조사가 들어가 그 꼴을 당하고도 국가를 위해 싸웠다는 점이 입증돼 명예복구와 더불어 즉결처분과 그 외 전사를 포함한 16명의 위패가 동작동 국립묘지에 봉안되었다. 또 생존 독수리유격대원들과 그들의 후손들은 현재도 32연대 창설기념일이면 32연대와 3대대를 방문해 당시를 되새기며 부대와의 연을 이어가고 있다. 다만 국방개혁으로 32연대가 2019년 말 해체되면서 관계자들의 모임으로 치러질 가능성이 높다.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