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덕수궁 즉조당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덕수궁)]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c19c22, #e3ba62 20%, #e3ba62 80%, #c19c22)" {{{#683235,#683235 '''덕수궁 즉조당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대한제국 황궁의 정전)] ---- [include(틀:조선 왕궁의 정전)] }}} || ---- ||<-3> [[파일:정부상징.svg|width=22]] '''[[대한민국의 사적|{{{#f39100 대한민국 사적 제124호 덕수궁}}}]]''' || ||<-3> {{{#683235 {{{+1 '''덕수궁 즉조당'''}}}[br]{{{-1 德壽宮 卽阼堂}}}}}}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include(틀:지도,장소=덕수궁 즉조당, 너비=100%, 높이=100%)]}}} || ||<-2> {{{#683235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서울)|중구]] [[세종대로]] 99 ([[중구(서울특별시)/행정#s-4|정동]] 5-1) || ||<-2> {{{#683235 '''건축시기'''}}} || 창건연대 미상 / [[1904년]] {{{-1 (중건) }}}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즉조당.png|width=100%]]}}} || || {{{#683235 '''즉조당[* [[http://www.deoksugung.go.kr/c/introduction/2|사진 출처 -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덕수궁관리소]]]'''}}} || [목차] [clearfix] == 개요 == [[덕수궁]]의 [[건물]]이다. == 이름과 현판 == '즉조(卽阼)'는 '즉위'와 같은 말로, [[인조]]가 이 곳에서 왕위에 오른 것을 기념하기 위해 붙인 이름이다. 자세한 내용은 [[덕수궁 즉조당#s-2|역사]] 단락 참조.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즉조당 현판.png|width=100%]]}}}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경운궁 현판.png|width=100%]]}}} || || {{{#683235 '''즉조당 현판[* [[http://www.heritage.go.kr/heri/gungDetail/imgDetail.do?detail_code=12&gung_number=4&img_serial_number=484&imgGubun=1&language=|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탈.]]]'''}}} || {{{#683235 '''경운궁 현판[* 사진 출처 - 국립고궁박물관.]'''}}} || 현판 글씨는 [[고종(대한제국)|고종]]의 친필이다. '즉(卽)'자 옆엔 '어필(御筆)', '당(堂)' 자 옆에 '광무구년을사칠월 일(光武九年乙巳七月 日)'이란 작은 글씨가 있다. 즉 1905년(을사년) 7월 어느 날에 [[임금]]이 직접 썼다는 의미이다. 즉조당 [[대청]]에는 '경운궁(慶運宮)'이란 편액도 걸려있었는데 역시 고종이 직접 쓴 것이며, 현재는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보존 및 전시 중이다. == 역사 == 1592년([[선조(조선)|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전부 불탔다. 1년 뒤인 1593년(선조 26년) [[한성부|한양]] 수복 후 환도[* 還都. [[임금]]이 [[수도(행정구역)|수도]]로 돌아오는 것.]한 선조는 지낼 곳이 없자 [[성종(조선)|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집]]과 주변 민가들을 [[궁|행궁]]으로 삼아 임시로 머물렀다. 처음엔 '정릉동 행궁(貞陵洞 行宮)'으로 불렀고 [[광해군]] 때 이름을 '경운궁(慶運宮)'으로 바꾸었다. 광해군 때 [[창덕궁]], [[창경궁]]을 복구한 후 [[임금]]들은 그 곳에서 거처했고, [[인조]] 재위 초반에는 [[건물]] 대부분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면서 [[덕수궁|경운궁]]을 사실상 해체했다. 하지만 이 때 정릉동 행궁 시절을 기억하기 위해 [[건물]] 2채를 남겼다.[[http://sillok.history.go.kr/id/kpa_10107012_003|#]] 이후 왕실 소용의 내탕을 마련하고 관리했던 [[명례궁]]으로 사용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영조어진.jpg|width=100%]]}}} || || {{{#683235 '''경운궁에 많은 관심을 보인 영조'''}}} || 비록 간신히 흔적만 남았으나, [[임진왜란]] 때 [[선조(조선)|선조]]가 [[개고생|고생]]한 것을 상기하려 [[조선시대|조선 후기]] [[임금]]들이 [[경운궁]]을 이따금씩 찾았다. 그 중 가장 많이 관심을 보인 왕은 [[영조]]였다. 1769년(영조 45년) 영조는 선조가 거처하고 [[인조]]가 즉위한 건물에 '양조개어(兩朝皆御)' 및 '계해즉조당(癸亥卽阼堂)'이란 글씨를 현판으로 만들어 걸었다. '양조개어'는 '두 임금이 거둥했다'는 뜻이고 '계해즉조당'은 '(인조가) 계해년(1623년)에 즉위했다'는 의미이다. 그 때부터 즉조당으로 불렀다.[[http://sillok.history.go.kr/id/kua_14511002_003|#]] 1773년(영조 49년)에는 선조의 환어 3주갑[* [[임금]]이 [[서울]]로 돌아온 후 60[[갑자]]가 세 번째로 돌아왔다는 뜻. 1653년([[효종(조선)|효종]] 4년)이 1주갑, 1713년([[숙종(조선)|숙종]] 39년)이 2주갑, 1773년([[영조]] 49년)이 3주갑이다.]을 맞아 [[정조(조선)|왕세손]]과 함께 즉조당을 찾아 추모했다.[[http://sillok.history.go.kr/search/searchResultList.do|#]] 그리고 즉조당에 '예전(昔)에 임금(御)이 머물렀다'는 뜻의 '석어당(昔御堂)' [[현판]]을 써서 걸었다.[* [[기록]] 상으로 석어당 명칭은 이 때 처음 보이며 원래 즉조당을 달리 일컬었던 이름임을 알 수 있다.[[http://sillok.history.go.kr/id/kua_14911004_002|#]][[http://sjw.history.go.kr/id/SJW-F49110040-02000|#]] 자세한 내용은 [[덕수궁 석어당]] 문서 참조.] 영조 승하 이후에도 왕들은 즉조당을 때때로 찾았다. 1893년([[고종(대한제국)|고종]] 30년) 10월에 [[고종(대한제국)|고종]]과 [[왕실]]은 [[선조(조선)|선조]]의 환궁 300주년을 맞아 즉조당에서 기념 행사를 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za_13010004_001|#]] === 아관파천 이후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2104CF37569DA0F7358A6A.jpg|width=100%]]}}} || || {{{#683235 '''경운궁을 중건한 고종황제'''}}} || 1896년([[건양]] 1년) [[아관파천]]으로 [[고종(대한제국)|고종]]은 [[경복궁]]을 떠나 [[주한러시아공사관|러시아공사관]]에 머물렀다. [[고종(대한제국)|고종]]은 장차 돌아갈 곳으로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을 선택했기 때문에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던 1896년에 경운궁을 수리, 중건하는 [[공사|대공사]]를 진행했다. 이 때 [[경복궁 선원전]]에 있던 [[어진]]을 즉조당으로 옮겨 모셨다.[[http://sillok.history.go.kr/id/kza_13309020_001|#]] 1897년([[건양]] 2년) 2월 [[고종(대한제국)|고종]]은 [[경운궁]]으로 환궁[* 還宮. 궁궐로 돌아감.]했다. 그러나 경운궁은 위에 언급했듯 즉조당 포함 2채만 남아있었다. 그래서 말이 중건이지 사실상 새 [[궁궐]] 하나를 짓는 것이었기에 제대로 모습을 갖추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정식 침전인 [[덕수궁 함녕전|함녕전]] 역시 아직 완공 전이었기에 [[신하]]들이 즉조당에 머물 것을 권했으나 고종은 거절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za_13310031_002|#]][* 이 때 거처한 전각은 확실하지 않으나 [[덕수궁 석어당|석어당]]인 듯 하다.[[https://blog.naver.com/minsu977/221256780196|#]], 이 무렵에 즉조당에 걸린 석어당의 [[현판]]을 지금 자리로 옮겨, 즉조당과 석어당을 분리한 듯 하다. 자세한 내용은 [[덕수궁 석어당]] 문서 참조.] [[정전#s-5]]으로 쓸 [[전각]] 역시 없었고 그래서 1897년([[광무]] 원년) 8월 경부터 즉조당을 임시 정전으로 사용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za_13408013_004|#]][* 고종은 즉조당에 있던 [[어진]]을 이미 같은 해 4월에 완공된 [[덕수궁 선원전|경운궁의 선원전]]으로 옮겼다.] 그 해 10월 7일 [[대한제국]]을 선포하기 며칠 전에 이름을 태극전(太極殿)으로 바꾸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za_13410007_001|#]] 제국의 정전이니 이름 역시 제일 높은 급인 '전(殿)'으로 올린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전각 앞에 넓은 월대를 설치하여 건물의 격을 높이고 여러 국가의 중요행사를 성대하게 치를 수 있게 만들었다. === 대한제국 수립 이후 === 태극전에서 [[고종(대한제국)|고종]]은 [[국호]]를 [[대한]]으로 바꾸고 [[황제]]로 즉위할 것을 반포했다.[[http://db.itkc.or.kr/dir/item?itemId=ST#/dir/node?dataId=ITKC_ST_Z0_A34_09A_18A_00310|#]] 즉 태극전은 [[대한제국]]의 상징적인 탄생 장소였던 것이다. 제국 수립 이후 고종은 이곳에서 [[신하|백관]]들의 하례를 받았으며[[http://sillok.history.go.kr/id/kza_13410013_001|#]] 황실 가족들에게 옥책과 금보를 내리고 책봉식[* [[왕국]]에서 [[제국]]으로 바꾸었으니 그에 맞게 기존 [[왕족]]들 역시 [[황족]]으로서의 지위를 다시 정해 책봉하는 의례가 필요했다.]을 거행하는 등[[http://sillok.history.go.kr/id/kza_13410014_001|#]] 정전으로써 태극전을 활발히 사용했다. [[고종(대한제국)|고종]]은 태극전의 이름을 1898년([[광무]] 2년) 2월에 다시 중화전으로 [[개명|바꾸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za_13502013_001|#]] 중화전으로 개칭한 후에도 이곳에서 국가와 황실의 주요 행사를 꾸준히 열었다. [[효정왕후|태후]]에게 존호를 올리는 의식과[[http://sillok.history.go.kr/id/kza_13702009_001|#]] 황실 제사와 관련된 행사를 주로 행했으며[[http://sillok.history.go.kr/id/kza_13611025_001|#]][[http://sillok.history.go.kr/id/kza_13611019_001|#]] 1900년(광무 4년) 8월에는 [[황자]] 의화군 이강과 이은을 여기서 각각 [[의친왕]], [[영친왕]]으로 책봉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za_13708017_001|#]][* 단, 이 때 의친왕은 [[미국]]에서 [[유학]] 중이었다.] 같은 해 10월 [[덕수궁 선원전|경운궁 선원전]]이 불타 그 안에 있던 [[어진]]도 사라져 다른 곳에 있던 어진들을 옮겨와 모사할 때 여기에 어진을 보관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za_13802005_003|#]]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KR20170424052200005_04_i.jpg|width=100%]]}}} || || {{{#683235 '''중화전으로 사용하던 때에 즉조당에 걸려있던 중화전 현판[* [[https://www.gogung.go.kr/specialView.do?cultureSeq=00017926EO|사진 출처 - 국립고궁박물관.]]]'''}}}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신축진찬의궤 - 중화전.png|width=100%]]}}} || || {{{#683235 '''정전으로 쓰이던 당시의 즉조당 그림(가운데 빨간 원 안).[br]1901년(광무 5년)'''}}} [[효정왕후|{{{#683235 '''명헌태후 홍씨'''}}}]]{{{#683235 '''의 71세 생일 축하연 모습을 다룬 책인 《신축진찬의궤》에 실린 그림이다.[* [[https://blog.naver.com/minsu977/221265544721|사진 출처.]]]'''}}} || 그러나 중화전(구 즉조당 - 태극전)은 [[정전#s-5]]으로 쓰기엔 너무 좁았다. 그래서 1901년([[광무]] 5년)부터 새 정전 [[공사]]를 시작하여 1902년(광무 6년)에 비로소 제대로 된 정전 형태를 갖춘 새로운 [[덕수궁 중화전|중화전]]을 완공했다. 그에 따라 1902년 5월에 기존의 중화전을 원래 이름인 즉조당으로 환원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za_13905012_001|#]]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즉조당 의궤.png|width=100%]]}}} || || {{{#683235 '''《경운궁중건도감의궤》의 즉조당 모습[* [[https://www.gogung.go.kr/ancientBooksView.do?bbsSeq=6157&bizDiv=2|사진 출처 - 국립고궁박물관.]]]'''}}} || 1904년([[광무]] 8년) 4월 [[경운궁]] [[화재|대화재]]로 불탔고, 직후 복구했다. 이 때 옛 모습 그대로 짓되, 칸 수와 규모는 간단하게 했다고 한다.[[http://sillok.history.go.kr/id/kza_14104022_001|#]] [[일제강점기]]인 1911년에는 [[고종(대한제국)|고종]]의 [[후궁]]이자 [[영친왕]]의 어머니 [[순헌황귀비 엄씨]]가 이 곳에서 서거했다. 1933년 [[일본 제국|일제]]의 [[덕수궁]] [[공원|공원화]] [[계획]]으로 많은 [[건물]]이 헐렸음에도 살아남아 오늘에 이른다. == 구조 == * 장대석을 3벌대로 쌓아 [[기단]]을 구성하고 기단의 상부는 [[벽돌|전돌]]로 마감했으며, 정면에 4벌짜리 [[계단]]을 3세트 두었다. 기단의 서쪽 측면은 기단 자체를 계단식으로 쌓았으나 동쪽 측면은 그렇지 않다. 그리고 그 위에 네모난 [[초석|주춧돌]]과 [[기둥]]을 쌓아 [[건물]]을 올렸다. [[지붕]]은 팔작지붕, [[처마]]는 겹처마로, [[공포(동음이의어)#s-2|공포]]는 초익공 양식이다. 용마루와 내림마루, 추녀마루는 [[기와]]를 쌓아 마감했으며 [[용두]]를 올렸으나 [[잡상]]은 두지 않았다. [[단청]]은 모루단청으로 칠했다. * 뒷면의 외관은 앞면과 꽤 차이가 있다. [[기단]]부터 다른데 지형의 특성 상 뒷면 기단은 장대석 1벌대이다. 그리고 동, 서 온돌방 바깥 칸에 각각 가퇴를 설치했으며 양 가퇴 사이에 [[마루|쪽마루]]를 설치했고 마루의 가장자리엔 [[난간]]을 두었다. 이 난간은 중간 부분을 아(亞)자 형태로 장식하고 돌림띠대에 하엽동자[* 荷葉童子. [[연꽃]] [[잎]] 모양의 짧은 [[기둥]].]를 세워 돌난대를 받치는 모습으로 양쪽으로 각각 10개 씩 있다. 난간 사이에 사람 한 명이 지나다닐만한 빈 공간이 있으며 이 앞에 2단의 댓돌이 있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즉조당 대청.png|width=100%]]}}} || || {{{#683235 '''대청[*A 사진 출처 - 네이버 지도.]'''}}} || 정면 7칸, 측면 3칸의 총 21칸이다. 정면 기준 제일 왼쪽(서쪽)의 1칸은 [[마루]]로 되어있고, 그 옆에 2칸이 온돌방, 그 다음 [[대청]] 3칸, 마지막 제일 동쪽의 1칸은 온돌방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앞면과 대청 뒷면의 가장자리 칸에 [[마루|툇마루]]를 깔았다. 대청의 [[천장]]은 우물반자로 마감하고 [[청룡]]과 [[황룡]]을 그려넣어 화려하게 꾸몄다. * 서쪽 협칸에 [[덕수궁 준명당|준명당]]으로 갈 수 있는 [[복도]]가 있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즉조당 서온돌.png|width=100%]]}}}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즉조당 동온돌.png|width=100%]]}}} || || {{{#683235 '''서온돌[*A]'''}}} || {{{#683235 '''동온돌'''}}} || 동쪽 [[온돌|온돌방]]은 이론 상으로 정면 1칸, 측면 2칸의 총 2칸이나 모든 공간을 1칸으로 트여 넓게 방을 쓸 수 있게 했다. 대청 쪽으로는 샛기둥을 두고 분합문을 설치했다. 서쪽 온돌방은 약간 다르다. 정면 2칸, 측면 2칸의 총 4칸으로 칸 수부터 차이가 나고, 방을 1칸으로 튼 것, 대청 쪽으로 분합문을 둔 것은 동온돌과 같다. 그러나 중간에 기둥을 두고 기둥 남쪽으로 문지방을 둔 것은 다르다. * 바깥 창호의 경우, 정면의 [[온돌|온돌방]] 바깥 칸과 뒷면의 [[마루|가퇴]] 부분은 정(井)자 살이다. 이를 제외하고는 전부 띠살이다. 실내 창호의 경우 [[대청]]에서 뒤로 나가는 문짝은 화려한 아(亞)자 살이고, 서온돌에서 측면의 툇간과 연결되는 창의 경우 정(井)자 살이다. 동, 서 양 온돌방에서 뒷면의 툇간으로 나가는 [[문]]은, 가운데는 정(井)자 살로, 위와 아래는 용(用)자 살로 꾸몄다. 나머지는 전부 용(用)자 살이다. * [[http://103.55.188.117/exterior/|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덕수궁관리소에서 제작한 사이버 전각전시관을 통해 더욱 생동감있게 내부를 볼 수 있다.]] * [[명례궁]] 시절을 그린 의궤와 일제강점기에 촬영한 사진을 보면 [[덕수궁 석어당|석어당]]과 복도각으로 붙어 있었다. == 여담 == * [[문화재청]]에서 2016년 이후 3월 말 ~ 4월 초 [[봄]]의 1주일 가량을 '''즉조당'''과 [[덕수궁 준명당|준명당]], [[덕수궁 석어당|석어당]], [[덕수궁 중화전|중화전]], [[덕수궁 함녕전|함녕전]] 등 덕수궁의 주요 전각 내부를 개방했다.[[https://www.news1.kr/articles/?2609655|#]] 해설자의 인솔 하에 단체관람을 했으며 덕수궁 홈페이지에서 예약을 하고 가야했다. 2020년에는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 19]] 사태로 진행하지 않았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즉조당 집기1.png|width=100%]]}}} || || {{{#683235 '''즉조당에 재현해놓은 집기류'''}}} ||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덕수궁관리소에서 2020년 10월 8일부터 11일까지 즉조당 서쪽 온돌방 내부에 [[병풍]], [[상#s-1.1|평상]] 등 집기류를 재현하여 시범 공개했다. 에르메스 코리아와 전통문화 보존단체인 아름지기와 협업했으며, 집기는 박물관 등에서 소장한 [[조선시대]] 물품들을 바탕으로 각 분야 전문가들이 제작했다. 다만,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 19]] 사태로 실내입장 대신 즉조당 외부에서 창호를 통해서만 감상이 가능했다. 덕수궁관리소 측은 상황이 좋아지면 실내에서 둘러보며 해설을 듣게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http://www.korea.kr/news/pressReleaseView.do?newsId=156414550&call_from=media_daum|#]] [[분류:덕수궁]]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