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보기문서 편집수정 내역 금관후 (덤프버전으로 되돌리기) [include(틀:고려의 왕자/국조 ~ 문종)]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FF9D00, #FFB200 20%, #FFB200 80%, #FF9D00)" '''고려 문종의 왕자[br]고려의 제왕[br]{{{+1 금관후 왕비 | 金官侯 王㶨 }}}'''}}} || || '''츨생''' ||연대 미상 || || '''사망''' ||[[1092년]]^^([[선종(고려)|선종]] 9년)^^ [[4월 14일]] || || '''본관''' ||[[개성 왕씨]] || || '''휘''' ||비(㶨) || || '''부모''' ||부왕 [[문종(고려)|문종]] 모후 [[인예왕후]] || || '''형제자매''' ||[[문종(고려)#가족관계|13남 7녀 중 7남]] || || '''배우자''' ||금관후비(金官侯妃) → 장헌후비(莊憲侯妃)로 추정 || || '''지위''' ||[[제왕#諸王]](諸王) || || '''직위''' ||특진 검교사공 상주국 금관후 (特進 檢校司空 上柱國 金官侯) 검교상서령 수사도 (檢校尙書令 守司徒) 수태위(守太尉) 중서령(中書令)|| || '''작위''' ||'''금관후(金官侯)''' || || '''시호''' ||'''장헌(莊憲)''' || [목차] [clearfix] == 개요 == [[고려]] [[문종(고려)|문종]]의 [[왕자]]. 휘는 비(㶨). 작위는 금관후(金官侯)이고 시호는 장헌(莊憲)이다. 봉지인 금관(金官)은 [[금관국]]을 가리킨다. == 생애 == [[문종(고려)|문종]]과 [[인예왕후]]의 일곱번째 아들이다. 금관후는 학문에 뛰어났다고 전한다. 문종 31년인 1077년 [[조선국 양헌왕|조선후]]와 [[숙종(고려)|계림후]]가 공작으로 관작이 오를 때 처음으로 '특진 검교사공 상주국 금관후(特進 檢校司空 上柱國 金官侯)'의 작위와 식읍 1천호를 하사 받았다. [[선종(고려)|선종]] 3년인 1086년 2월 왕인 [[선종(고려)|선종]]의 결정으로 동복누이 적경궁주(積慶宮主)가 이복형제 [[부여공]]과 결혼하게 되는데, 금관후는 [[변한후|변한후 왕음]],[* [[인예왕후]] 소생. 금관후와 동복형제] [[진한공|진한공 왕유]][* [[인경현비]] 소생. [[조선국 양헌왕|조선후]], [[부여공]]과 동복형제]와 함께 이를 반대한다. 금관후 등은 형인 선종에게 [[근친혼|같은 성씨에게 장가]]들 수는 없다고 간언하지만 선종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같은 달 [[선종(고려)|선종]]이 형제들의 관작을 올리니 '검교상서령 수사도(檢校尙書令 守司徒)'의 작위와 식읍 2천호를 하사 받았다. 선종 5년인 1088년 [[선종(고려)|선종]]이 [[헌종(고려)|원자]]에게 '욱(昱)'이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모후인 [[인예왕후]]를 모시고 [[수춘궁]]에서 잔치를 여는데, 이 때 참석한 선종의 형제 삼공(三公: [[조선국 양헌왕|조선공]], [[숙종(고려)|계림공]], [[상안공]])과 이후(二候: [[부여공|부여후]], '''금관후''') 중 한 사람이다. 선종 9년인 1092년 4월 14일에 사망하자 '수태위 겸 중서령(守太尉 兼中書令)'에 추증되고 식읍 3천호, 식실봉 5백호를 하사 받았다. 후사없이 사망하자, 마찬가지로 후사없이 사망한 장순후(章順侯)[* 변한후의 시호]의 예를 따라 [[불교]]방식으로 [[화장(장례)|화장]]된다. 선종은 동생인 금관후를 '길지(吉地)에 장사지내고 봄가을로 제사를 올리라' 했으나 장례를 맡은 관청에서 불가하다 아뢰어 행해지지 않았다. [[시호]]는 장헌(莊憲)이다. [[분류:고려의 왕자]][[분류:개성 왕씨]][[분류:고려의 후작]][[분류:1092년 사망]]캡챠되돌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