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훈구파 (문단 편집) === [[명종(조선)|명종]] 시기와 몰락 === [[명종(조선)|명종]]이 즉위하고 [[문정왕후]] 수렴청정기에 훈구 세력들은 [[윤임]](대윤)과 [[윤원형]](소윤)으로 나뉘었으며 외척(척신) 세력과 연합하면서 이 과정에서 [[을사사화]]가 일어난 것이며 이후에 [[정미사화|양재역 벽서 사건]]이라든지, 이홍윤의 역모 사건으로 대윤에 속했던 훈구 세력들이 제거되거나 유배를 당했으며, 사림들도 역시 떼거지로 죽임을 당하거나 유배를 갔다. 명종이 친정을 시작한 이후로 명종은 이전 연산군, 중종, 문정왕후와 다르게 정치적 사건을 옥사로 잇지 않았으며, 옥사를 통한 정치적 변동보다 안정을 중시하면서 훈구 세력들이 사림 세력들을 제거할 책모를 막았다. 시간이 흐르며 사림 세력들도 명종 친정기에 회복이 되었으며 여기에 혼란기에 은퇴한 관리들과 과거를 통한 관리 출사를 거부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성리학]]에 대한 연구가 본격화되었다. 은퇴한 관리와 관리 출사를 거부한 사람들로 형성된 중종, 명종 시기의 사림파는 성리학에 대한 연구가 본격화되면서 성리학에 대한 이론과 학설을 조선에서 독자적으로 발생시켰다. 여기에 1545년에 세운 백운동서원이 1549년에 사액 서원이 된 것을 바탕으로 서원들이 전국 곳곳에서 세워졌으며, 서원을 바탕으로 사림 세력들을 자신들이 내세운 학설을 바탕으로 제자들을 양성하면서 세력을 키우게 되었다. 반면에 훈구파는 연산군-중종-문정왕후 시기에 정치적 혼란을 막지 않았으며 오히려 혼란 상을 바탕으로 토지와 노비를 비롯한 재산을 확장하면서, 민생을 도탄에 빠지게 해 조선의 재정과 조세를 흔들었다. 학문적 정당성도 연산군과 중종 시기에 관학이 몰락해서 성리학으로 무장한 사림 세력을 이길 상대가 아니었다. 그래서 훈구파가 선택한 것은 사림 세력의 조정 진출을 허용하는 것과 자연적으로 소멸하는 길이었으며, 이 과정에서 살아남은 훈구파들은 외척 세력과 사림에 녹아들었고 [[선조(조선)|선조]] 이후 대부분 [[서인]]에 흡수된다. 그리고 훈구파 가문들도 대다수가 서인 가문이 되었다. 그것도 지식층이면서 실질적인 관료 집단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걸 대표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가 훈구파 영수였던 김국광의 후손이 대표적인 서인 가문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는 것이다. 훈구파는 훈구를 구성하는 권신들이 세월이 흐르며 연산군과 중종 시기의 혼란으로 권력을 잃고 중앙 정치계에서 밀리거나 늙어서 자연사하는 등으로 와해되었다. 명종 시기에 사림들의 정계 진출로 사림 세력들이 확장하는 와중에 훈구파들이 흡수되는 방식을 통해 소멸한 것으로 보는게 타당하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훈구파고 아들은 사림파라는 식으로 나뉜 경우도 많은 것이기 때문이다.[* 비슷하게 여말선초 때도 권문세족의 자제로 태어났지만 신진사대부가 되었던 몇몇 인물들이 있다. 유연하게 시대의 변화에 순응하여 후대에도 살아남은 경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