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훈구파 (문단 편집) === [[연산군]] ~ [[중종(조선)|중종]] 시기 === [[단종(조선)|단종]]과 세조 시기의 혼란기를 틈타 세조의 즉위와 치적들을 도우고 단종 복위 운동과 여러 반란 세력을 진압하며 공신이 된 정난공신파는 공적으로 하사한 토지와 노비, 권력 투쟁으로 제거된 신하들의 재산을 흡수하면서 경제적인 이익을 얻었다. 그리고 세조의 친분을 바탕으로 조선의 국정 운영에 깊게 관여하면서 사회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정난공신파는 대체로 유능하고 현실주의, 실학에 먼저 눈을 뜬 실질주의적 세력이라는 인식이 있으나 세조 시기에 이들이 공신이 된 뒤 후대에는 권신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권력 독주로 인해 왕권까지 견제를 받으면서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던 성종 등의 이해와 맞물려 사림이 등용되었고, 이들이 충돌한 끝에 [[사화]] 등의 대립이 시작되었다. [[연산군]] 시기에 정난공신파는 [[갑자사화]] 때 완벽히 몰락하고 [[중종반정]]으로 집권 세력이 된 신공신파는 명종 때까지 권력을 누린다. 한편 연산군과 [[중종(조선)|중종]] 시기는 [[사화]]를 비롯한 옥사들이 자주 일어나서 신하들이 죽거나 유배가 되는 일이 발생했고, 그 탓에 정국이 혼란 상으로 빠졌다.[* 중종 시기는 대형 옥사가 10년 주기로 발생했으며 중종은 신하들을 많이 죽이거나 유배를 보내지 않았으나 안정 기간이 10년 내외 수준이라서 중종 재위기간 내내 정치가 불안정했다.] 이러한 연산군과 중종 시기의 정치 혼란은 미래에 대한 불안함으로 확산되었고, 집권한 훈구파들은 보신주의에 빠져 이들은 자신의 재산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고리대와 자신들이 소유한 대토지의 이점 등을 활용하여 재산을 확대하였으며, 이로 인해 농민들은 유랑민 신세로 전락했다. 게다가 이들은 왕실 [[내수사]]와도 연관되어 폐단이 되었으며 [[조광조]] 등 신진 사림 세력이 비판하고 나선 것도 바로 이런 부분이었다. 그래서 [[세도정치]]기의 전유물로 알려진 삼정의 문란의 기운은 16세기부터 조선의 문제점으로 자리잡았다. 그 원인은 조선 중기에 [[국가 막장 테크]] 빠지게 했던 연산군의 폭정과 정치 판단력이 약해 옥사를 자주 저지른 중종의 실정이 한 몫을 하지만 '''보신주의에 빠져 재산을 늘리며 민생을 파탄하게 만든 훈구파의 책임도 매우 크다.'''[* 사실 연산군의 폭정과 중종의 실정이 합친 시너지 효과는 정치, 경제, 학문, 군사 분야의 문란으로 이어졌고 그 결과가 임꺽정의 난으로 대표되는 민생파탄, 그리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조선군의 고전 원인이었던 국방력 약화로 이어졌다. 훈구파도 마찬가지로 책임이 크다.] 중종 시기의 훈구파는 워낙 도를 넘어서 혼란 상에 이용한 재산 불리기에 모자라 자기네 끼리도 서로 간의 정치 투쟁을 벌여 옥사로 피를 봤다. 중종반정으로 집권하며 취약한 정통성을 이들의 비호로 커버하기 위해 힘을 실어줬던 중종 본인조차도 치세 전반에 이후로는 조광조를 중심으로 하는 사림 세력을 등용해서 등 훈구를 견제하나 훈구파들도 [[기묘사화]]로 반대파들을 족족 제거해버린다. 이후에 [[작서의 변]]과 [[김안로]]의 전횡까지 겪은 중종은 다시 한번 사림들을 등용하나 때는 늦었고 김안로가 죽은 지 7년이 지난 중종 본인도 사망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