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효순왕후 (문단 편집) == 생애 == 1715년 [[조문명]][* 아버지 조문명과 삼촌 조현명은 왕세제 시절 영조를 보호한 인물로, 완론탕평을 주도한 영조의 측근이다.]과 전주 이씨의 딸로 태어났다. 1727년 [[영조]]의 장남 [[효장세자]]의 빈으로 간택되었으나, 바로 이듬해 세자가 요절하면서 14살에 과부가 되었다. 1735년 [[사도세자]]가 태어나자 영조로부터 현빈(賢嬪)이라는 빈호(嬪號)를 받았다. > 이날 임금이 명하여 시임 대신·원임 대신과 양관(兩館)·정부(政府)·육조 참판 이상을 불러 빈청(賓廳)에서 회의하게 하였는데, 효빈(孝嬪)·철빈(哲嬪)·소빈(昭嬪)이라는 삼망(三望)을 갖추어 올리니, 의망(擬望)을 더하라고 명하였다. 또 장빈(莊嬪)·단빈(端嬪)·사빈(思嬪)으로써 의망을 더하였으나, 임금이 여러 글자의 음과 뜻이 모두 아름답지 못하다고 하여 손수 ‘현(賢)’자를 써서 내렸다. 반평생 정쟁 속에서 목숨을 위협받은 영조는 남자혈육들이 가장 위협적인 정적이거나, 영 못 믿을 지경이어서인지 남자에게는 의심을 하고 까다로웠다. 그 와중 자신에게 호의를 보여주던 사람들이 주로 궁중의 여성들이었던 탓에, 주변 여성들에 대해서는 관대한 면이 있었다. 실제로 영조의 불같고도 깐깐한 성격을 달래서 가정과 궁중의 화목을 지키는 데 여성들의 역할이 컸다. 정비인 [[정성왕후]] 서씨, 며느리였던 현빈 조씨, 딸 [[화평옹주]], [[숙종(조선)|숙종]]의 계비이자 영조의 법적 어머니인 [[인원왕후]] 등이 영조의 왕위 등극을 적극지원하거나 고집을 다독이고 후엔 아버지에게 치이는 사도세자를 그나마 감싸주었는데, 이 여성들이 짧은 기간에 줄줄이 죽은 후 사도세자에 대한 영조의 히스테리도 극심해졌다. 이 점은 마더 컴플렉스로 유난히 여성에게 적대적이던 [[성종(조선)|성종]]과 비교된다. 일찍 남편을 잃은 현빈 본인도 남편처럼 병을 얻어서 36세의 비교적 이른 나이로 사망했다. 시호는 효순빈(孝純嬪). 영조는 현빈을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두 자식[* 다른 한명은 친딸 [[화평옹주]].] 중 한 명이라고 했으며, 현빈의 사망 후에도 생일을 챙겼다. 또 영조는 현빈이 삶아주는 밤을 좋아해서 자주 며느리의 처소에 찾아가 밤을 얻어먹었고, 현빈의 죽음을 추모하는 시에도 '나를 위해 준비한 밤이 아직 소반 위에 있다'는 대목이 나온다. 사후 남편 [[효장세자]]의 묘에 합장되었으며, 영조가 [[정조(조선)|정조]]를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시켰으므로 정조 즉위 후 효장세자가 진종(眞宗)으로 추존됨에 따라 함께 효순왕후로 추존되었다. 이후 [[1908년]] [[대한제국]] [[순종황제]]에 의해 다시 황후로 추존되면서 효순소황후(孝純昭皇后)로 불리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