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황산덕 (문단 편집) === 관료 시절 === 그 후 1976년 12월까지 약 2년 3개월 동안 [[박정희]] 밑에서 법무부 장관을 지냈다. 그가 박정희 정권의 [[법무부장관]] 제의를 수락한 데 대해 “교수님은 그렇게도 자신을 미워하던 정권이 들어섰고 혁명세력의 칼날이 아직도 시퍼런 데다가 혁명세력인 젊은 [[김종필]] 국무총리 밑에서 법무장관으로 임명된 기분이 어떠냐”고 제자들이 물었는데, 이에 대해 그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 “자네는 잘 모른다네. 국가에서 부르는 확률이 0.03정도밖에 안 되고 이를 거절한다는 것은 국민 된 도리로 못 할 짓이지! 나같이 월남한 사람에게는 기회가 오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왔다고 해도 거절하면 그것이 마지막이야!”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된 뒤에는 당시 시골 지청장으로서 동기들 가운데 가장 뒤쳐져 있던 유아무개 검사를 대검 부장검사로 발탁하여 오르게 하였다. 이에 대해 측근들이 안 된다고 펄펄 뛰자 이렇게 대꾸하였다. '''“죽은 사람을 살리라는 것도 아니고 지청장을 대검 OO부장에 임명하라는 것일 뿐이야.”''' 나중에는 장관이 모든 책임을 지겠다며 들이댔고, 결국 유아무개 검사는 대검 부장검사로 임명되었다. 알고 봤더니 유 검사는 옛날 황산덕이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되었을 때 담당검사로서 교도소에서 그를 위해 온갖 심부름을 도맡았던 사람이었고, 황산덕은 그 은혜를 갚고 싶었던 것. 다행히 유 검사는 열심히 자기에게 주어진 임무만 수행할 뿐, 친구들에게 그 사실을 자랑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 법무부 장관 시절에는 대한민국 사법부 역사상 최악의 사건인 [[인혁당 사건]]에 1급 주역으로 활약하였다. 유신정권의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민청학련 사건]]과 관련하여, 인혁당 재건위가 학생시위를 배후조종했다는 얼토당토 않은 주장을 직접 발표했고, 인혁당 재건위 연루자들에 대해 혹독한 고문이 가해지도록 방치했던 것이다.[* 예를 들어 하재완 같은 경우는 혹독한 고문에 장이 항문으로 튀어나오기까지 하였다. 이 사실을 폭로한 조지 오글 목사와 제임스 시노트 신부는 강제 추방당했다. 시노트 신부는 동아일보 등에 인혁당 재판에 대한 부당함을 알리는 광고를 싣느라 무일푼 신세가 되었다. 그는 인혁당 사건 재판정에서 재판을 히틀러 재판에 비유하면서, "이것은 정의를 모독하는 당치 않은 수작이다! 공산주의 재판보다 더 나쁘다!"고 외쳤다. 법정에서 조용히 해달라는 말에, '참을 수 없는 분노에 싸여 노골적으로 혐오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이렇게 외쳤다. "법정이라고? 여긴 그저 오물들이 쌓여 있는 곳이라구!" (천주교인권위원회 2001)] 그 후 19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인혁당 및 민청학련 사건 관련 피고인 36명의 상고를 기각함으로써 원심대로 형이 확정되자,[* 당시 대법원장은 [[민복기]]였다.] 그 선고 바로 다음 날, 그러니까 형이 확정된 지 겨우 20시간밖에 지나지 않은 때에 이례적으로 도예종, 서도원, 하재완, 이수병, 김용원, 우홍선, 송상진, 여정남 등 8명의 사형을 집행해버렸다. 게다가 사형 당한 8인의 시신을 유가족들에게 돌려주지 않았으며, 유족의 동의 없이 멋대로 시신을 탈취해버리고 화장시켜 버렸다.[* 이때 천주교 사제들이 응암동 성당으로 시신을 옮기려 했으나, 크레인까지 동원해 시신을 강탈, 벽제 화장터에서 화장시켜버렸다.] 물론 이에 대해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과 인혁당 가족이 진상 공개를 요구하였지만, 법무부 장관 황산덕은 인혁당 사건에서 고문은 없었다고 부인하면서 앞으로 인혁당 사건과 관련, 조작설을 퍼뜨리거나 '민주 인사', '애국 인사'로 지칭하여 석방을 요구하는 등의 언동에 대해서는 반공법을 적용해 엄중히 단속하겠다고 공포하였다. 이렇듯 어마어마한 [[사법살인]]에 관여한 사람이었으나, 정작 본인은 그 당시 사형집행을 전혀 결재하지 않았다고 한다. 독실한 불교신자인 데다 학문적으로도 사형제도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나?[* 황산덕의 말로는 자기 손으로 사람을 죽게 한다는 것이 꺼림칙했다고 한다.] 실제로 황산덕이 법무부 장관에 취임한 1974년 이전에는 연간 20여 명 내외의 사형이 집행되었으나, 황산덕 재임기간에는 영부인이던 [[육영수]]를 살해한 [[문세광]]과 [[사법살인]]인 [[인민혁명당 사건]] 피해자들을 제외하고는 사형이 거의 집행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것도 문세광의 사형은 후에 황산덕 본인이 자신이 제주도로 출장 중이었을 때에 [[김종경]] 법무부 차관이 대결하였다고 밝혔으며, 인혁당 사건 사형 집행 명령서에 최종 결재를 한 사람도 황산덕이 아닌 [[서종철]] 당시 국방부장관이었다. 이렇듯 온갖 파란만장한 일을 겪은 후 1976년 12월 법무부 장관 자리에서 문교부 장관 자리로 직책을 바꾸었다. 그리고 1977년 12월까지 문교부 장관직을 수행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