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산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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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24·25대 법무부 장관
황산덕
黃山德 | Hwang San-deok


파일:Hwang Sandeok.jpg

출생
1917년 6월 18일
평안남도 양덕군
사망
1989년 10월 19일 (향년 72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3가 63-2번지
본관
해주 황씨[1][2]

석우(石隅)·취현(翠玄)
재임기간
제24·25대 법무부 장관
1974년 9월 18일 ~ 1976년 12월 3일
제22대 문교부 장관
1976년 12월 4일 ~ 1977년 1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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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황경환, 어머니 배현도
배우자
황이선[1]
자녀
슬하 4남 2녀
학력
평양고등보통학교 (졸업)
경성제국대학 예과 (수료)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 / 학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법학[2] / 박사[3])
종교
불교
약력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사법과 합격
고려대학교 정법대학 부교수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동아일보 논설위원
성균관대학교 교수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원장
성균관대학교 총장
제24·25대 법무부 장관
제22대 문교부 장관
단국대학교 대학원 교수

1. 개요
2. 생애
2.1. 초년 시절
2.2. 대학 교수 시절
2.3. 관료 시절
2.4. 말년 시절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제24-25대 법무부 장관, 제22대 문교부 장관.

손녀사위가 현대백화점그룹 회장인 정지선이다.

한국 형법학의 대가로 지금도 꼽힌다. 학자 시절에는 국가재건최고회의박정희 정권에 의해 구속에다 해직까지 겪으며 존경을 받았으나, 유신정권시절 돌연 법무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장관 재직 중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사법살인인혁당 사건의 주역이라는 오명도 얻었다.


2. 생애[편집]



2.1. 초년 시절[편집]


1917년 6월 18일 평안남도 양덕군에서 아버지 황경환(黃慶煥)과 어머니 배현도(裵現道)[3]의 아들로 태어났다. 산덕(山德)이라는 이름은 아버지 황경환이 황산덕의 출생지인 양덕군의 덕(德)과 양덕군 옆에 있는 다른 행정구역인 맹산군의 산(山)을 각각 따서 지은 것이라 한다. 아버지 황경환은 16세 때 평양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와세다대학 강의록을 주문해 독학했다. 이후 양덕군의 금융조합 입사시험에 합격해 서기로 근무하던 시절 어머니 배현도를 만나 결혼했다. 어머니 배현도는 일찍이 상경해 이화학당을 다니다가 1916년 결혼하면서 중퇴했다. 이후 황경환은 성천군 금융조합 이사로 승진했다.

3살 되던 1919년 아버지가 성천군에서 전개된 3.1 운동에 참여했다가 이른바 보안법 위반 혐의로 1년 6개월형을 선고받아 평양형무소에 투옥되면서[4] 어머니를 따라 평양부로 와서 조부 황준식(黃俊植, 1861 ~ 1939)과 조모 청송 심씨(1864 ~ 1945) 아래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게 되었다. 아버지는 1920년 히로히토의 결혼을 기념하는 특별사면으로 2개월 일찍 출옥했다. 출옥 후에는 고베(神戶)상회에서 점원으로 잠시 일하다가 사상범 전과자라는 이유로 얼마 안 가 해고되었고, 등짐장사로 생계를 이었다. 이 시기 황산덕은 평양부 이문리교회의 유치원에 입학해 졸업했고, 5세 되던 1922년 아버지가 훗날 초대 국회부의장이 되는 김동원이 경영하는 평안고무공업사에 채용되자, 가족들은 평양부 상수구리 77번지로 이사했고, 이때 광성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평양부 창전리 50번지를 거쳐 1927년 평양부 상수구리 130번지로 이주해 이곳에 본적을 두었는데, 이곳이 원적지가 된다.

평양고등보통학교 재학 시절 본래는 여순공과대학 전기공학과에 지원했으나, 경성제국대학 미아케 교수 사건으로 조선인 출신을 배제한다는 정책에 따라 불합격했다. 이후, 1935년 4월 경성제국대학 예과 문과 갑류(文科甲類)에 전체 4등으로 입학했다. 예과 재학 당시 처음에는 카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을 비롯한 사회주의 관련 서적을 탐독하며 유물론에 빠져 들었으나, 앙드레 지드의 『소련기행』을 읽고 이오시프 스탈린 치하 소련의 실상을 알게 되면서 공산주의에 회의감을 느끼게 되었다. 이후 불문학에 심취하게 되면서 본과에서는 문학이나 미학 전공을 희망했으나, 부친의 간곡한 만류로 법학과 진학을 희망하게 된다. 1938년 3월 예과를 수료하고, 법문학부 법학과에 진학했다. 법학과 재학 당시 황이선과 결혼했는데, 결혼 생활로 인해 학부 학점은 과락을 겨우 면할 정도였다.

1939년, 아버지는 김동원과 결별하고, 젊은 부자 박승엽과 제휴하기 시작해 결국 박승엽이 상속받은 세창고무공업사의 공동 경영주에 취임해 탄탄대로를 걷게 된다. 그러나 이 즈음 어머니는 신경쇠약을 얻어 상수구리 집을 아버지에게 맡기고, 신양리를 거쳐 기림리에 집을 새로 지어 아버지와 별거생활을 하게 되었다. 1941년 3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과 1류(사법 전공)를 졸업하고, 법학사를 받았다. 1943년 6월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와 사법과에 동시 합격하여 동년 10월 조선총독부에 채용됐고, 경상북도청으로 발령받아 영천군에 근무하였다. 1944년 청송군으로 전보되었고, 1945년 경북도청 내무부 원호과로 전근됨에 따라 경상북도 대구부로 이주하기도 했다.

1945년 3월 경기도 경성부 종로구 성북정(現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323번지에 있던 집[5]을 구입했고, 8.15 광복 직후 상경했다. 아버지는 친구 장진섭(張震燮)과 합작해 35만원에 반도호텔을 구입했고, 미군정이 들어와 호텔을 빌려 쓰게 되자, 1945년 9월부터 임대료를 받으며 호텔 사무실에서 관리사무를 맡아 보았다. 그러나 1946년 2월 미군정 법령이 공포되어 반도호텔이 정부 귀속재산으로 강제 편입되었고, 대신에 영등포구 도림정(現 도림동)에 있던 조선타이어공장(現 한국타이어)의 관리인이 되었다.

황산덕은 1945년 10월에 서울시 성북구청장으로 임명되었으나 미군정에 맞서 충돌했다가 1개월만에 파면당했다. 동년 12월에 미군정청 보건후생부 법제국장에 취임했다. 1946년 1월초, 미군정청 조선인 직원 일동의 명의로 발표된 신탁통치 반대성명서를 기초한 뒤 공직을 버리고 집에서 요양하며 책을 탐독했다. 황산덕 연보


2.2. 대학 교수 시절[편집]


1932년부터 보성전문학교에 몸담고 있으면서 자신의 경성제대 후배들을 교원으로 영입하던 유진오에게 불려가서 1948년에 고려대학교에서 부교수로 교편을 잡게 된다.

한국전쟁 중이었던 1952년 당시 부산의 전시연합대학 체제하에서 서울대학교로 자리를 옮겨, 1966년까지 14년 동안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형법과 법철학을 강의하였다.

서울법대 교수 시절 동료 교수인 유기천과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다고 한다.[6] 사실 유기천과의 충돌은 양자의 개인 성정 차이 보다도 해방 후 서울대에서 벌어지던 동경제국대학 출신의 동대파(東大派)와 경성제국대학 출신의 성대파(城大派) 사이의 파벌 싸움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서울법대100년사(2004)에 따르면 해방 이후 경성법학전문학교장 고병국을 정점으로 유기천(형법)-이한기(국제법)의 동대파 라인과 보성전문학교 법과과장 유진오를 좌장으로 황산덕(형법)-박재섭(국제법) 등의 성대파가 갈렸고, 기존에 동대파가 헤게모니를 쥐고 있던 경성법전과 그 후신인 서울법대에서는 당시 학장에 재취임한 고병국 교수가 동경제대 후배인 유기천을 한국인 최초의 법학박사로 만들기 위해 황산덕이 제출한 박사논문 심사를 이유없이 미루었을 정도라고 한다(출처). 이 갈등은 결국 후일 유기천 서울대 총장이 황산덕 교수를 파면하는 데 이르게 된다(참조).

1954년 3월 1일에는 대학신문 지면에 정비석의 소설 '자유부인'의 내용을 통렬하게 비난하는 글을 게재하여 주목을 받았다. 대학 교수의 부인 오선영 여사가 삶의 권태를 이기지 못해 대학생과 춤바람이 나는 등 탈선한다는 소설내용에 대해 "갖은 재롱을 부려가며 대학교수를 모욕하고 있다"고 비판한 것이었다. 물론 이에 대해 정비석은 "작품을 다 읽지도 않고 작품을 중단 운운하는 것은 오히려 문학가를 모욕하는 탈선적 폭력이며, 그러한 허무맹랑한 원성에 결코 개의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반박하였으며, 황산덕 개인에 대해서는 "대학 교수답지 않게 흥분한다."고 비꼬았다. 그 후로 황산덕과 정비석은 격렬한 논쟁의 글을 주고 받았으나, 결국은 화해하여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1960년에는 서울대학교에서 ‘최신자연과학의 발달이 법철학에 미치는 영향’으로 대한민국 최초의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제목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박사학위논문은 법철학에 관한 것이었는데, 이처럼 형법학자임에도 불구하고 법철학에 조예가 깊었다. 물론 그 결과로 국내 형법학 이론이 매우 추상적이고 난해하고 애매모호한 방향으로 전개되게끔 조장했다는 부정적 평가도 존재한다.

국내 형법학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일은 1960년대 초반에 독일의 형법학자 한스 벨첼의 '목적적 행위론'을 국내에 최초로 소개하였던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전까지는 일본 형법학의 인과적 행위론이 마땅한 적수도 없이 잠을 자고 있을 뿐이었는데, 황산덕이 수입한 목적적 행위론은 국내 형법학에 신선한 충격을 던져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때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형법상의 행위개념에 관하여 새로운 학설들을 제기하였다. 마치 조선시대 이황, 이이의 이기론(理氣論)과 관련하여 수천 명의 학자들이 이기논쟁에 가담했던 것을 방불케 할 정도였다. 지금도 많은 법학자들은 법학의 한 이론이 이처럼 찬란한 황금기를 구가했다는 게 믿을 수 없는 일이며, 앞으로도 이런 일이 우리 법학계에 다시는 없을 것이라고 회고하고 있다. 형법상 행위론은 이토록 우리나라에서 한때 최고의 각광을 받았지만, 정작 독일 법과대학에서는 그에 대해 강의도 거의 하지 않는다는 소문이...

1962년 동아일보 논설위원으로 역임하면서 헌법개정에 관하여 비판하는 사설을 게재하였다가(7.17. 2회, 7. 23. 1회, 7.28. 1회) 허위사실유포죄로 구속된 바 있다 (8. 2. 구속, 12. 7. 출감).

1965년 9월에는 한·일 협정반대시위와 관련하여 학생들을 선동하였다는 이유로(이른바 '정치교수'라는 이유로) 구속되었다. 결국 박정희 정권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서울법대 교수직에서 물러나 변호사 개업을 하였다.

1966년 성균관대학교에 다시 법학교수로 임용되어 1974년까지 교수로 활동했고 같은 해 8월에 성균관대학교 총장에 취임하였으나, 9월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되면서 한 달 만에 총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성균관대학교 총장직 후임자는 그의 평양고보-경성제대 법대 2년 후배인 현승종이었다.


2.3. 관료 시절[편집]


그 후 1976년 12월까지 약 2년 3개월 동안 박정희 밑에서 법무부 장관을 지냈다. 그가 박정희 정권의 법무부장관 제의를 수락한 데 대해 “교수님은 그렇게도 자신을 미워하던 정권이 들어섰고 혁명세력의 칼날이 아직도 시퍼런 데다가 혁명세력인 젊은 김종필 국무총리 밑에서 법무장관으로 임명된 기분이 어떠냐”고 제자들이 물었는데, 이에 대해 그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자네는 잘 모른다네. 국가에서 부르는 확률이 0.03정도밖에 안 되고 이를 거절한다는 것은 국민 된 도리로 못 할 짓이지! 나같이 월남한 사람에게는 기회가 오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왔다고 해도 거절하면 그것이 마지막이야!”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된 뒤에는 당시 시골 지청장으로서 동기들 가운데 가장 뒤쳐져 있던 유아무개 검사를 대검 부장검사로 발탁하여 오르게 하였다. 이에 대해 측근들이 안 된다고 펄펄 뛰자 이렇게 대꾸하였다. “죽은 사람을 살리라는 것도 아니고 지청장을 대검 OO부장에 임명하라는 것일 뿐이야.” 나중에는 장관이 모든 책임을 지겠다며 들이댔고, 결국 유아무개 검사는 대검 부장검사로 임명되었다. 알고 봤더니 유 검사는 옛날 황산덕이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되었을 때 담당검사로서 교도소에서 그를 위해 온갖 심부름을 도맡았던 사람이었고, 황산덕은 그 은혜를 갚고 싶었던 것. 다행히 유 검사는 열심히 자기에게 주어진 임무만 수행할 뿐, 친구들에게 그 사실을 자랑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

법무부 장관 시절에는 대한민국 사법부 역사상 최악의 사건인 인혁당 사건에 1급 주역으로 활약하였다. 유신정권의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민청학련 사건과 관련하여, 인혁당 재건위가 학생시위를 배후조종했다는 얼토당토 않은 주장을 직접 발표했고, 인혁당 재건위 연루자들에 대해 혹독한 고문이 가해지도록 방치했던 것이다.[7]

그 후 19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인혁당 및 민청학련 사건 관련 피고인 36명의 상고를 기각함으로써 원심대로 형이 확정되자,[8] 그 선고 바로 다음 날, 그러니까 형이 확정된 지 겨우 20시간밖에 지나지 않은 때에 이례적으로 도예종, 서도원, 하재완, 이수병, 김용원, 우홍선, 송상진, 여정남 등 8명의 사형을 집행해버렸다. 게다가 사형 당한 8인의 시신을 유가족들에게 돌려주지 않았으며, 유족의 동의 없이 멋대로 시신을 탈취해버리고 화장시켜 버렸다.[9] 물론 이에 대해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과 인혁당 가족이 진상 공개를 요구하였지만, 법무부 장관 황산덕은 인혁당 사건에서 고문은 없었다고 부인하면서 앞으로 인혁당 사건과 관련, 조작설을 퍼뜨리거나 '민주 인사', '애국 인사'로 지칭하여 석방을 요구하는 등의 언동에 대해서는 반공법을 적용해 엄중히 단속하겠다고 공포하였다.

이렇듯 어마어마한 사법살인에 관여한 사람이었으나, 정작 본인은 그 당시 사형집행을 전혀 결재하지 않았다고 한다. 독실한 불교신자인 데다 학문적으로도 사형제도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나?[10] 실제로 황산덕이 법무부 장관에 취임한 1974년 이전에는 연간 20여 명 내외의 사형이 집행되었으나, 황산덕 재임기간에는 영부인이던 육영수를 살해한 문세광사법살인인민혁명당 사건 피해자들을 제외하고는 사형이 거의 집행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것도 문세광의 사형은 후에 황산덕 본인이 자신이 제주도로 출장 중이었을 때에 김종경 법무부 차관이 대결하였다고 밝혔으며, 인혁당 사건 사형 집행 명령서에 최종 결재를 한 사람도 황산덕이 아닌 서종철 당시 국방부장관이었다.

이렇듯 온갖 파란만장한 일을 겪은 후 1976년 12월 법무부 장관 자리에서 문교부 장관 자리로 직책을 바꾸었다. 그리고 1977년 12월까지 문교부 장관직을 수행하였다.


2.4. 말년 시절[편집]


1980년부터 1989년까지 단국대학교 대학원의 교수로 있었다. 1985년에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이 되었으며, 국민훈장 동백장과 청조근정훈장 등을 받았다.
[1] 규(圭) 항렬이나 항렬자를 쓰지 않았다. 조부와 아버지는 각각 식(植), 환(煥) 항렬로 항렬자를 따랐다. 원래 호적에는 제안 황씨(齊安 黃氏)로 되어 있었으나, 결혼 전에 부인 황이선이 제안 황씨로 당시 동성동본이었던 관계로 부친이 해주 황씨로 바로 잡았다고 한다. 본인 회고록 참조https://naver.me/FAQkiW5E.[2] 황산덕의 회고에 따르면, 해주 황씨는 장수 황씨(長水 黃氏)에서 파생된 본관으로, 황희 정승의 후손 중 누군가가 황해도 해주목(現 황해남도 해주시)으로 이주하면서 본관을 해주로 하게 되었다고 한다. 황산덕의 선대는 이후 임진왜란 이전에 평안도 강서현(現 남포시 강서구역)으로 이주했고, 영조평양부 성 밖으로 재차 이주해왔다고 한다. 그래서 평양부 사람들은 황산덕의 집안을 오성(외성) 황씨라고 했다고 한다.[3] 감리회 목사 배정일(裵貞一, ? ~ 1950)의 4남 1녀 중 장녀이다.[4] 이후 공소하여 1919년 7월 3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다소 감형된 1년형을 선고받았고, 이에 상고했으나 1919년 8월 28일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상고가 기각되었다. 한편, 판결문에 기재된 황경환의 주소지는 평안남도 순천군 신창면 신창리.[5] 원래 전라북도 익산군의 갑부 백인기(白仁基)의 별장이었다. 현재 이 주소지에는 길상사라는 절이 있다.[6] 이시윤, 민사소송법입문, 제2개정판, 139~141면.[7] 예를 들어 하재완 같은 경우는 혹독한 고문에 장이 항문으로 튀어나오기까지 하였다. 이 사실을 폭로한 조지 오글 목사와 제임스 시노트 신부는 강제 추방당했다. 시노트 신부는 동아일보 등에 인혁당 재판에 대한 부당함을 알리는 광고를 싣느라 무일푼 신세가 되었다. 그는 인혁당 사건 재판정에서 재판을 히틀러 재판에 비유하면서, "이것은 정의를 모독하는 당치 않은 수작이다! 공산주의 재판보다 더 나쁘다!"고 외쳤다. 법정에서 조용히 해달라는 말에, '참을 수 없는 분노에 싸여 노골적으로 혐오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이렇게 외쳤다. "법정이라고? 여긴 그저 오물들이 쌓여 있는 곳이라구!" (천주교인권위원회 2001)[8] 당시 대법원장은 민복기였다.[9] 이때 천주교 사제들이 응암동 성당으로 시신을 옮기려 했으나, 크레인까지 동원해 시신을 강탈, 벽제 화장터에서 화장시켜버렸다.[10] 황산덕의 말로는 자기 손으로 사람을 죽게 한다는 것이 꺼림칙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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