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황두성 (문단 편집) === 늦게 드러난 두각, 그리고 마당쇠로 뛴 5년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cphoto.asiae.co.kr/2011121410271458553_1.jpg|width=100%]]}}}|| 2005년, 우리나라 나이로 30세가 된 황두성은 빛을 보게 되었다. 당시 [[심정수]]와 [[박진만]]이 FA 자격을 얻은 후 함께 [[삼성 라이온즈]]에 이적하며 현대의 전력은 무너져 가고 있었고, 에이스 [[정민태]]와 클로저 [[조용준]] 또한 부상으로 기대에 못 미치는 피칭 내용을 보여주는 등 투수진도 그야말로 부실해진[* 정민태는 2004년 이후 부상 및 노쇠화가 겹치며 2005~2006년 2년은 부상으로 날려먹었고, 조용준의 경우 2005년까지 1군 주전 마무리였다가 어깨 부상으로 2006년부터 1군에서 자취를 감췄고, 설상가상으로 부상 재발 및 불성실한 재활 태도까지 겹치며 4년 동안 1군에 올라오지 못한다.] 상태였다. 황두성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본격적으로 1군에서 자리를 잡아 [[마당쇠]]로 뛰면서 4월 24일 LG전에서 데뷔 첫 승을 올린 것을 시작으로 커리어 하이 시즌을 보냈다. 2005년 기록은 60경기에 등판해 128⅔이닝 ERA 3.29, 11승 9패, 137탈삼진, WAR 3.46.[* 이게 얼마나 심각한 혹사냐면, 이 중 선발 등판은 겨우 '''5경기'''에 불과했고, 나머지 55경기는 모두 중간계투로 등판하였다. 거기에 무려 128⅔이닝을 소화했는데, 2005 시즌은 126경기 체제였다 보니 사실상 불펜투수로 뛰면서 규정이닝을 채웠다. 은근 묻히는 사실이지만 지금으로 치면 거의 [[살려조]]나 [[KILL 라인]]급 혹사를 당한 셈.] 2005 시즌의 맹활약으로 인해 2006 시즌에는 주전 마무리로 내정되었다. 하지만 전년도에 무리한 탓인지 개막부터 부진한 모습을 보여주며 마무리를 [[박승민|박준수]]에게 넘겼고[* 이 해 황두성을 대신해 마무리를 맡은 박승민은 [[사이드암 스로|사이드암 투수]] 로서 KBO 리그 잠수함 투수 중 한 시즌 최다 세이브인 38개를 만들었다. 98년 '''[[임창용]]'''의 34개의 4개를 더 쌓아 올린 것], 한화와의 플레이오프 2차전에서 1이닝 '''2[[보크(야구)|보크]]'''라는 프로야구 역사상 포스트시즌 3번밖에 없는 '''[[반어법|진기록]]'''을 세우는 등 안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2006 시즌 최종 기록은 47경기 71⅓이닝으로 전년도에 비하면 이닝 수가 줄었지만 그래도 중간계투 치고는 많은 이닝을 소화했다. 2007 시즌에는 [[미키 캘러웨이]][* 시즌 중반에 팔꿈치 부상으로 퇴출 되었다.]의 이탈로 투수진이 다 무너진 상황에 선발, 중간, 마무리 가리지 않고 나오는 '''[[노예(야구)|믿을맨]]'''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시즌 성적은 46경기 139⅔이닝, 7승 9패 1세이브 3홀드 ERA 4.45. 여기에 탈삼진 142개를 잡아내면서 '''삼진 3위'''를 기록하기도 하였다. 다만 보직을 가리지 않고 마구잡이로 등판해서인지 전반기에 비해 후반기에는 부진하였고, 평균자책점이 4점대로 올라가며 시즌을 마쳤다. WHIP가 1.23으로 낮으므로 수비의 도움을 못 받았을 가능성도 높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황두성41.jpg|width=100%]]}}}|| [[현대 유니콘스]]가 해체된 뒤 팀이 [[키움 히어로즈|히어로즈]]로 바뀐 후로도 투수진의 구멍을 메꾸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2008년 황-장-마 트리오 결성시 '''[[장원삼]]'''과 '''[[마일영]]'''과 같이 황두성도 처음엔 풀타임 선발이었고, [[평균자책점]] 순위에 올랐으나, [[이광환]] 감독의 지시로 [[마무리 투수]]를 맡게 되었고[* 당시 이광환 감독은 황두성이 자진해서 마무리를 맡았다고 하여 그렇게 알려져 있었으나, 은퇴 후 이광환 감독의 일방적인 지시였다고 밝혔다.] 그 후 [[다카쓰 신고]]가[* 근데, 히어로즈 소속 당시 타자들이 물빠따여서 등판한 횟수가 얼마 없었지만 방어율이 거의 '''0'''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오면서 다시 선발로 보직을 변경 하였다. 2008 시즌 최종 성적은 34경기 104⅓이닝 6승 8패 8세이브 1홀드. 시즌 후 1억 3000만원에 연봉 계약을 맺으며 데뷔 첫 억대 연봉을 받아보게 되었다. 사실상 마지막 불꽃을 태웠다고 볼 수 있는 2009년에는 주전 마무리로서 9세이브를 기록[* 당시 타고투저라 팀내 마무리들이 죄다 [[방화범(야구)|삽질]]을 해서 결국, 최종적인 마무리는 '''[[이보근]]'''이 차지했다.]하다가 후반기에는 선발로 보직을 바꿔서 시즌 남은 기간 동안 2점대 방어율로 '''1선발급''' 투구를 보여주었다. 고정된 선발로 뛰었다면 전성기 동안 10승 투수로서 개인 기록이 화려해질 가능성이 높았지만, 항상 팀이 필요한 자리라면 자진해서 그때마다 보직을 변경하였다. 2009 시즌 최종 성적은 40경기 92⅓이닝 8승 3패 9세이브로 팀 투수진의 버팀목 역할을 함과 동시에 고참으로써 팀을 이끌어 가는 활약을 펼쳤다. '''그리고 이게 황두성이 1군에서 선수로 보여준 마지막 모습이었다.''' [[이현승(야구선수)|이현승]][* 2009년에는 팀 내 최다 13승]과 [[장원삼]][* 2008년에는 팀 내 최다 12승]이 모두 팔려가 신진선수들로만 구성된 2010년 [[키움 히어로즈|넥센 히어로즈]] 투수진의 핵심으로 부상할 것을 기대했으나 [[스프링캠프]] 도중 어깨에 이상을 보여 귀국했고, 2010 시즌 내내 2군에 머무르며 1군에 올라오지 못했다. 카더라 통신에 의하면 어깨 쪽 부상이 생각보다 심각한 상황이고, 이로 인해 구위가 급격히 떨어져 올라오지 않는 상태라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투수 전향이 늦었던 데다, 우리 나이로 30살에야 전성기가 찾아왔고, 그 후 어떠한 관리도 받지 못하고 5년 연속 70이닝 이상 던지는 등 전천후로 굴려지면서 혹사당한 후유증이 제대로 나타난 셈이다. 2011년에는 스프링캠프도 완주하고 시범경기에도 좋은 컨디션으로 등판하며 부상을 극복하고 다시 재기할 것이라고 예상되었으나, 시범경기 막판 다시 어깨에 탈이 나면서 2군에서 시즌을 시작했다. 이후 1군에 올라오지 못하며 시즌을 마쳤고, 시즌 종료 후 박준수 등 11명의 선수와 함께 [[넥센 히어로즈]]에서 방출되었다. 부상 부위가 투수 입장에서는 가장 치명적인 부분인 어깨였던 데다가 막판에는 무릎 연골에도 부상을 입었고, 구위와 구속이 떨어진 뒤 도무지 올라오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방출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예상대로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은퇴 당시 나이는 불과 35세로, 황두성과 동갑내기들인 [[이승엽]], [[임창용]], [[박정진]], [[홍성흔]] 등이 40대까지 롱런했던 걸 감안하면, 상당히 빠른 나이에 은퇴를 하게 되었다. 만약 풀타임 선발투수로 고정되거나 전문 마무리로 고정되어 관리받았더라면 어쨌을지 모르는 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