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홍세완 (문단 편집) == 선수 경력 == ||<#182132> [[KBO 골든글러브|[[파일:KBO 골든글러브 로고.svg|height=40]]]] [br] [[틀:KBO 골든글러브/유격수|'''{{{#b58a5d KBO 골든글러브}}} {{{#ffffff 유격수 부문 수상자 (2003)}}}''']] || || {{{#ffffff KIA 타이거즈 NO.13}}} || || {{{#ffffff 홍세완(洪世完 / Hong Sewan ) }}}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image/020/2009/05/06/200905060200.jpg|width=100%]]}}}|| [[장충고등학교 야구부|장충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96년 [[해태 타이거즈]]에 2차 11순위 지명을 받은 후 [[성균관대학교 야구부|성균관대학교]] 체육학과(1996학번)로 진학하여 2000년 입단했다. 2000년 신인시절때 당시 리그 정상급 마무리였던 [[진필중]]의 공을 그대로 받아쳐 깨끗한 안타를 쳐냈는데 당시 이 경기를 중계하던 [[이효봉]] [[SBS 스포츠]] 해설위원이 상당히 좋은 선수가 될것이라고 칭찬한 것은 물론, 칭찬에 인색한 [[김응용]] 감독마저 "저 녀석은 큰 인물이 될 거다"라고 칭찬했다. 입단 당시에는 3루수였지만, 3루 수비가 불안해서 당시 유격수였던 [[정성훈]]과 수비포지션을 맞바꿨다. 그러나 그게 서로 윈윈이 되어 오히려 유격수로는 안정적인 수비를 보이면서 KIA는 [[홍현우]]가 FA로 떠났지만 1루수 [[장성호]]-2루수 [[김종국(야구선수)|김종국]]-유격수 홍세완-3루수 정성훈의 포메이션을 구축하게 되었다. 유격수에 안착한 2001년부터 .293의 타율에 14홈런을 기록하면서 본격적으로 주전 [[유격수]]로 활약하기 시작했으며 2003년에는 '''한국 프로야구 최초로 유격수 100타점'''[* [[유격수]]로 홈런왕을 차지했던 [[장종훈]]도, [[30-30]]을 기록하며 날아다녔던 [[이종범]]도 [[유격수]] 시절엔 달성하지 못한 기록이며, 11년이 지나서야 [[강정호]]가 두번째로 이름을 올린다.]을 달성할 정도로 공격형 [[유격수]]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타순도 4번에 들어설 정도로 클러치 능력이 좋았으며, 그 시즌 [[KBO 골든글러브]] 획득.[* 그 해 [[박진만]]도 만만치 않은 성적에 우승 프리미엄까지 있었으나 역시나 리그 출범 사상 첫 유격수 100타점이라는 기록의 상징성이 많이 작용하였다.] 그러나 그의 발목을 잡은 것은 악명 높은 [[무등 야구장]]의 그라운드 상태와[* [[무등 야구장]]과 [[인조잔디]] 문서에도 나와 있지만 당시 야구장에 깔려 있던 [[인조잔디|카페트형 인조잔디]]는 홍세완을 비롯해 여러 선수들의 커리어를 줄이고 부상을 야기하는 원흉이 됐다. 오죽하면 홍세완처럼 무릎 부상에 시달렸던 [[박진만]]도 선수 말년 흙바닥 내야와 천연잔디가 깔린 구장에서 뛰고 싶어서 고향팀 [[SK 와이번스]]로 이적을 결심했을 정도.] 이에 따른 부상이었다. 애초에 183cm 85kg라는 대형 [[유격수]]는 수비부담이 쌓이면 장기적으로 [[유격수]] 자리를 유지하기 어려운데, 홍세완 역시 이것을 피할 수 없었다. 만약 무등 야구장이 과거처럼 흙바닥 내야와 천연잔디 그라운드를 그대로 유지했다면 홍세완의 유격수 커리어도 더 길어질 수 있었겠지만 [[야만없|야구에 만약이란 없기에]]. 특히 홍세완은 커리어하이를 기록한 2003년 이후 100경기 이상 출장해 본 적이 없을 정도로 크고 작은 부상에 매년 시달렸다. 2002년에는 고막 파열, 2004년 이후로는 대형 [[내야수]]의 혹사테크인 무릎부상→재활→재발의 무한 루프를 타며 기아 내야진의 붕괴를 야기했다.[* 이 때문에 심각한 어깨부상을 입어 송구가 약해진 [[김종국(야구)|김종국]]이나 수비가 미흡했던 [[손지환]]이 [[유격수]] 땜빵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게다가 그 시즌 이후부터 KIA는 부진을 거듭하며 [[엘롯기]]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04년과 05년은 확실히 준수한 타격성적을 올렸으나[* 특히 04년의 경우 15홈런에 9할에 달하는 OPS, wRC+ 136을 기록하며 쾌조의 시즌을 보내고 있던 차였다.] 부상으로 인해 100경기도 뛰지 못하고 시즌 아웃이 됐으며, 06년은 부상의 여파로 멘도사라인에 걸칠 정도의 최악의 시즌을 보낸다. 2007년에 재활을 마치고 [[유격수]]로 복귀, [[무등 야구장]]에서 열린 [[삼성 라이온즈]]전에서 역전 만루홈런을 때리는 등 활약하다가, 또 다시 큰 무릎부상을 입어 시즌 아웃. 2008년은 아예 한 경기도 뛰지 못할 정도로 부상에 시달렸다. 2009년부터는 무릎 부상 여파 때문인지 주로 [[지명타자]]로 뛰었으며 6월에 [[최희섭]]이 한참 부진할 땐 [[1루수]]로 들어가기도 했다. 팀이 12년만에 [[KBO 한국시리즈]]에 진출하게 되어 처음으로 한국시리즈 무대를 밟나 싶더니, 이번에는 손목 부상으로 인해 한국시리즈 개막을 며칠 앞두고 엔트리에서 제외, [[최경환(야구)|최경환]]과 교체되었다. 결국 누적된 부상과 수술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2010 시즌을 마지막으로 코치직을 제의받고 결국 이른 나이에 은퇴하게 되었다. 야수로서 스타일을 보자면 전형적인 대형 유격수의 플레이스타일 그 자체. 수비 능력은 그럭저럭 평범한 [[유격수]] 수준이지만 뛰어난 펀치력과 클러치 능력을 바탕으로한 공격력으로 상쇄하는 케이스이다. [[유격수]]로서 수비범위는 평범하지만 나쁘지 않은 어깨를 살려 자신이 처리할 수 있는 공은 잘 처리하는 스타일. 즉 잡을 수 있는 공은 잡고 잡을 수 없는 공은 잡지 않는다는 것. 덕분에 '''수비율로 [[박진만]]을 제친 적도 있다'''.[* 그러나 가히 엄청난 수비범위를 보여준 [[이종범]] 전성기를 기억하고 있던 당시 KIA 팬들은 홍세완의 수비에 불만이 많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