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혐성국 (문단 편집) == 반례 (긍정적인 사례) == 반면 영국이 세계사에 긍정적인 기여를 많이 한 것은 사실이다. [[세계 최초/외국의 경우]] 항목을 보기만 해도, 고대 이전이라면 이집트, 중세 이전이라면 중국, 근대 이후에 인류 역사에서 가장 필요한 물건의 발명은 영국과 미국, 독일이 대부분 했을 정도. 몇몇 아래의 서술은 혹자에 따라 [[식민지 근대화론|식민지에 대한 옹호]]로서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홍콩, 싱가포르, 인도 등 식민지 관계 및 인식은 나라마다 각기 상이하며, 실제 공과사를 모두 인정하는 역사관을 가진 나라도 상당하다.[* 일례로 인도 경우, 간디는 떠나는 영국을 친구라 표현했으며, 초대 수상인 네루는 영국의 근대화를 인정하는 발언을 하였고, 인도의 전총리 만모한 싱 역시도 공개연설에서 같은 취지의 연설을 하였다. 또 인도여론 역시도 20세기 중반 이전까지만 해도 인도의 많은 젊은이들은 영국이 가지고 온 근대화를 찬양했는데 그 반대 목소리는 오히려 소수파로서 국민 대다수에게도 배격당했던 것이 좋은 예가 된다.[[http://www.redian.org/archive/116164|#]]] 따라서 이를 어떻게 바라보는가는 나라마다 별개의 차원에서 접근해야 하며, 이를 한일관계에 그대로 동치시켜 단지 식민지였다고 하여 모든 것을 부정만 할 수 있는 성격은 아니다. * [[노예무역]] 폐지 - 영국 역시 과거 대서양 노예무역에 적극 가담하긴 했으나 15세기 포르투갈 이후 성행했던 노예무역을 덴마크 다음 2번째, 강대국 중 최초인 1807년에 금지시켰다.[* 이에 따라 당시 영국령이었던 캐나다에서도 노예제가 폐지되었고, 미국 노예해방/흑인운동의 시발점인 underground railroad(몰래 캐나다로 탈출하기 위한 경로)가 시작될 수 있었다.] 1808년에서 1860년 사이에 영국 서아프리카 함대는 노예선 1,600여 척을 나포하여 아프리카인 15만명을 해방시켰다. 또 노예무역 금지에 대한 조약을 체결하는 데 거부하는 다른 국가들에게도 영향력을 행사해, 50명이 넘는 아프리카 통치자들이 “反노예제 조약”을 체결하고, 비엔나 회의와 파리 조약(1815) 등을 통해 다른 유럽 국가들에게도 외교적 압박을 가하여 공식적으로 노예제도를 규탄하고 무역을 폐지하도록 촉구했다. 또한 1833년 노예해방법을 통과하여 영국령 농장주들에게 당시 2천만 파운드의 보상금을 지급하여 노예를 해방 시켰고 한때 영국 정부는 이로인해 재정위기까지 갔는데, 이는 1860년대까지 노예문제로 치열한 [[남북전쟁|내전]]을 벌인 미국과 대조적인 것이었다. 그 이후로도 영국은 일본에서 일어난 [[마리아 루스 호 사건]]에 연관되어 반노예무역의 움직임을 이어갔고, 그 여파로 일본에서 인간 취급도 받지 못하던 일본 유녀들에게 예창기해방령이 나타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당시 일본 유녀들의 실상에 대해서는 [[요시와라 유곽]] 문서로. 참고로 이 "인간 취급도 못 받았던 것"의 연장선상으로 해방 포고문에서조차 유녀들을 "생긴 건 인간이지만 일신의 자유를 상실한 소나 말 같은 가축". 즉, 끝까지 법적으론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참고로 1839년 영국에서 설립된 '노예제 반대 협회' (Anti-Slavery Society)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권단체이며, 1833년 영국 정부는 농장주에 대한 보상금을 지급하기 위해 국가예산의 40%를 지출하고 막대한 채권을 발행했는데, 이를 2015년에서나 공식적으로 모두 갚았다고 한다. [[https://www.usatoday.com/story/news/factcheck/2020/06/30/fact-check-u-k-paid-off-debts-slave-owning-families-2015/3283908001/|#]] * [[자본주의]] - 영국의 산업혁명이 이후 세계적으로 널리 퍼진 자본주의는 현대 세계경제의 주류 시스템이 되었다. 물론 초기 자본주의는 극심한 빈부격차 등 병폐도 심했고 가장 이상적인 시스템이라고 볼 수도 없으나, 중세 봉건주의 사회가 근대 자본주의 사회로 넘어감으로써 많은 국가가 경제 및 문화 양면에서 빠르게 성장한 것은 사실이다. 그 유명한 [[마르크스주의]] 역시 자본주의의 성과를 아예 부정하고서 자본주의를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귀태로 여기는 개념이 아니라, 초창기 영국의 자본주의 시스템의 성과를 인정하면서 그 병폐에 대한 비판과 대안으로 출발한 개념이다. 자본주의 경험이 없거나 불충분한 현실사회주의 국가의 집권세력이 개발독재를 벌인 명분 역시 "우리는 자본주의를 제대로 경험하지 못했으므로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려면 자본주의 국가의 생산력 수준을 따라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영국에서 탄생한 자본주의 이례 [[애덤 스미스]], [[존 메이너드 케인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앨프리드 마셜]] 같은 학자들이 경제학이란 개념과 이론을 정립시키며 현대 경제시스템의 기반을 만들어 갔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해저케이블.jpg|width=100%]]}}} || || {{{-1 1901년 세계 해저케이블 지도}}} || * [[세계화#s-3.1|1차 세계화]] - 1870년에서 1914년까지의 1차 세계화는 영국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 1,500년부터 1,800년까지 매년 1%씩 증가했던 세계무역은 18세기 들어 비약적으로 발전했는데, 19세기초 세계 GDP의 6%를 차지하던 수출은 [[제1차 세계 대전]] 직전엔 14%로 뛰어 올랐고, 세계 '상품, 노동, 기술'의 활발한 교류가 이어졌다. 특히 영국이 발명한 [[해저케이블]], [[철도]], [[증기선]]은 기존의 '통신, 이동시간,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여줬는데, '''해저케이블'''의 경우 수개월이 걸리던 기존 대륙간 통신을 당일 내 가능하게 만들었으며, '''철도'''는 내륙간 빠른 이동과 대량운송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또 '''증기선'''은 기존 해풍에 의존하던 배의 이동시간과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여 기존 1달이상이 걸리던 대서양 여행을 1주일 이내로 줄였는데, 이로인해 1850년까지 약 129개국이 증기선을 이용하여 무역을 했고, 5,000개 도시에서 수출입이 이루어지면서 세계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렇게 운임비용과 여행시간이 획기적으로 줄어들다 보니 인력의 이동도 자연스럽게 나타났는데, [[이탈리아]], [[그리스]], [[아일랜드]]의 경우 높은 이주율을 보였고, 인건비가 상대적으로 높은 [[미국]]과 [[호주]]엔 이민행 물결이 이어졌다.[* 대양간 뿐만 아니라 유럽 내 이동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또한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도계 상인이나 중국계 상인 또한 이 시기 세계적으로 진출하면서 지금의 탄탄한 네트워크를 형성하게 되었다. 물론 이 시기 크게 이득을 본 것은 자본과 기술이 뛰어난 영국이었으나, 다른 나라들 역시도 자신들의 경쟁력 있는 상품을 전세계에 수출하면서 세계화의 혜택을 누렸는데, 대표적으로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는 광활한 초원에서 나오는 소고기를 대량으로 수출하면서 국가의 황금기를 누리게 되었다. * [[자유무역]] - 1800년대까지도 세계무역은 매우 폐쇄적이었다. 대영제국 시절 제국 내 무관세, 이동의 자유가 보장되었고 이는 현대 자유무역 체계의 베이스가 되었다. 대영제국 내 역 뿐만 아니라 역외로도 자유무역이 이뤄졌는데, 독일인들은 독일 식민지를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제품을 인도에 팔았고, 프랑스 역시 알제리보다 인도에서 더 많은 판매량을 보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세계 대혼란은 20세기 초중반 당시 이미 세계 최대 경제를 자랑하던 미국이 [[대공황]]으로 [[보호무역]]에 들어서자 시작되었다. 이런 자유무역을 통한 교역과 수많은 가치사슬로 인해 세계경제는 급격한 성장을 보이게 되었다. * [[자유 민주주의]] - 자유 민주주의(Liberal democracy)의 기원은 18세기 유럽으로 올라가는데 당시 유럽 대다수의 국가는 군주제였으며, 정치권력은 군주 또는 귀족이 소유하였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며 권력자의 절대적인 통치권에 의문을 가지는 계몽주의 사상이 17세기 영국에서 태동되어 발전하기 시작했으며 1628년 영국에서의 권리청원과 1679년 인신보호법, 1688년 [[명예혁명]]과 1689년 [[권리장전]] 과정을 거치며 특정 권리와 자유를 성문화하며 자유 민주주의가 발전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상과 신념은 [[미국 독립 전쟁]], [[프랑스 혁명]]에 영감을 주었다.[[https://en.wikipedia.org/wiki/Liberal_democracy#Origins|#]] [[의원내각제]]와 [[입헌군주제]]도 영국에서 시작되었다. 민주주의 지수(Democacy index)에서도 구 영국의 식민지들이 다른나라 식민지 보다 상대적으로 순위가 높은 성향을 보이고 있다. 예외적으로 [[캐나다]], [[미국]], [[뉴질랜드]], [[호주]] 등 과는 비등하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2928N.png|width=100%]]}}}|| || {{{-1 B.C 400년부터 2000년대까지 인도의 인구추세 변화}}} || * [[인도]] - 영국 이전 수백개의 독자적인 왕국들이 존재하던 거대한 인도 아대륙을 통일해 현재의 모습을 갖추는데 기여했다. 때문에 현재도 영어는 [[힌디어]]와 함께 인도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언어이다. 무굴제국에 의해 무슬림 강제개종 등 종교탄압을 당하던 인도에 종교적 자유를 보장해주었다.[* 특히 [[아우랑제브]] 시절 타 종교에 대한 탄압이 극심했는데 이는 무굴-마라타 전쟁,(양측의 전쟁에서 무굴 제국 민간인 2백만여 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https://en.wikipedia.org/wiki/Mughal%E2%80%93Maratha_Wars|#]] 시크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아우랑제브는 임종 직전 "자신은 큰 죄를 지었으며, 무슬림들이 비난의 대상이 되어 살해돼서는 안된다"며 후회하는 서면을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참고로 히말리야 산맥의 힌두쿠시(Hindu Kush)는 "힌두인들의 무덤"이라는 뜻이 어원으로, 이슬람의 인도 아대륙 침략, 정복 기간동안 수많은 힌두인들이 중앙아시아에 노예로 팔려가다 힌두쿠시에서 얼어죽었기 때문이다.] 또한 수백년간 지속되온 여행자들을 대상으로한 노상강도 조직인 [[암살단]](Thug)을 근절시키고, 남편이 죽으면 아내를 화장시키는 풍습인 [[사티]](Sati)와, 과부재가 금지, 어린소녀 성노예 풍습 등 잘못된 토속 관습을 형법을 통해 금지했다. 이는 [[문화상대주의]]의 관점에서도 인정할 수 없는 명백한 인권 유린이자 철폐되어야 할 악습이다. 1892년에는 [[백신]] 강제 접종법안을 통해 인도에서 [[천연두]]의 피해를 막는데 기여하였다. 불가촉천민 등 하급 카스트에 대한 차별을 1850년 카스트 제거법(Cast Disabilities Removal Act)등을 통해 개선해 교육이나 사원출입의 기회를 부여했다. 인도에 각 지역별로 기근코드를 부여해 관리하고 철도를 통한 빠른 식량공급 및 보건소등 위생사업 등을 통해 인도인의 평균수명을 11년 늘리고[* 영유아 사망률 감소가 결정적이었다. 무굴 제국은 1년에 유아 100만여 명이 말라리아로 사망하고 200만여 명이 불구가 되었는데 항 말라리아제인 [[퀴닌]]이 영국 식민 지배 시절 도입되면서 사망률이 감소하기도 했다.] 기근방지에 도움을 주었다. 무굴제국에 비해 인도의 관개비율을 8배이상 증가시켰다. 1914년까지 연간 1,600만톤에 달하는 인도의 석탄생산은 처음부터 영국인에 의해 시작되어 발전되었다. 막대한 인프라 투자로 [[뭄바이]], [[첸나이]]가 인도 최대의 상업도시로 탄생하게 되었다. 인도의 [[산스크리트어]] 연구를 바탕으로 [[비교언어학]] 분야를 개척하기 시작한 것도 영국이며, 인도에 1784년 아시아 학회, 1861년 인도 고고학 연구소 설립을 통해 잊혀져 있던 인도 고대사 발굴에 기여를 하였다. > 인도의 독립운동가이자 초대수상인 [[자와할랄 네루]] 역시 영국이 인도에 서구적 의회정부와 개인의 자유라는 개념을 가져다 주었고, 인도인들 사이에 정치적 통일감을 발생시켜 하나의 단일 민족으로 탈바꿈 시켜주고 민족주의 발단에 불을 지폈다는 영국인들의 주장에 "'''많은 진실이 있다'''"라고 인정했다. 영국이 인도에 서구를 향한 인도의 창을 처음 열고 '철도, 전신, 전화' 등과 같은 산업주의의 전령을 도입함으로써 인도에 서구 산업주의와 과학을 알려준 공로를 인정해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 >― 네루의 자서전 - 《자유를 향하여(Toward Freedom), 1942》 中 * [[https://en.wikipedia.org/wiki/Bihar_famine_of_1873%E2%80%931874|1873~1874년 벵골기근]] - 벵골에 광범위한 기근이 발생했고, 약 2,150만 인구에 영향을 주었다. 벵골에 새로 부임한 "리차즈 탬플"경은 광범위한 구호활동을 펼쳤는데 그로 인해 사망자가 거의 발생하지 않거나 전혀 발생하지 않았다. 참고로 기근 문제는 수천 년 인도사에서 고질병이었는데, 북부 [[히말라야 산맥]] 중부 [[데칸 고원]]이라는 지리적 특성에 여름철 [[몬순]]에 대부분의 강수량을 의존하는 구조.. 국민 대다수가 극빈층에 높은 인구밀도 그리고 낮은 행정력과 위생, 보건 관념으로 인해 전염병이나 한해 풍흉이 들면 대량 사망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참고로 국가행정의 기초인 인구조사도 영국령 시절 처음 실시되었다.] * [[싱가포르]] - 작은 어촌마을에 불과했던 싱가포르의 발전에는 영국의 공이 컸다. [[영국 해군]]의 “동양함대 기지가 들어서고 거대한 “항만, 선박 수리, 물류 시설”이나, 연료를 보급하기 위한 거대 정유공장 단지로 발전 하게되었으며, 정유공장에서 생산된 정제유가 동남아 전체시장을 커버하고도 남았는데 1970년대까지 동남아 시장을 꽉 잡고 있었다. 또 [[말레이시아]]로부터 독립 후엔 원조를 제공했고, 과거 영국이 닦아 놓은 무역루트 거점이나, 영국령 시절 고무무역 같은 동남아 상품들이 싱가폴 선물시장에서 활발히 거래가 이루어지며 상업과 금융, 행정적으로 급성장하게 되었다. 싱가포르 건국의 아버지가 영국인 [[토머스 스탬포드 래플스]](Thomas Raffles)이며, 싱가포르의 국부인 [[리콴유]] 역시 철저한 [[친영|친영주의자]]인 것으로 유명하다. * [[남아프리카 공화국]] - 오랫동안 [[보어인]]들에 의한 가혹한 대우와 강제노동으로 고통받던 현지 흑인들을 노예제 해방과 1828년 차별철폐 정책, 백인과 동등히 재판을 받을 권리를 통해 인권을 향상시켰다. 영국은 1807년에 이미 노예무역을 금지하고 1833년엔 영국의 모든 식민지에서 노예를 금지시키고, 1834년엔 마찬가지로 케이프주 식민지에서도 남아 있던 흑인노예를 해방시켰는데, 이는 백인 우월주의로 점철된 보어인들에게 쉽게 허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정책에 크게 반감을 샀던 보어인들은 결국 그동안 영국인들과 공존하며 살던 케이프 식민지를 떠나 북쪽으로 흑인 원주민을 정벌하며 이주했는데 (Great Trek) 이는 향후 [[보어 전쟁]]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고, 이것이 보어 전쟁에서 많은 현지 흑인들이 영국 편을 드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케이프주는 [[수에즈 운하]] 개통 이전 인도로 가는 무역거점 역할을 하면서 무역과 경제가 번성하게 되었다. 이후 남아공의 악명높은 [[아파르트헤이트]] 철폐를 위해 앞장선 것은 덤. * [[그리스]] - 4백년 동안 오스만 제국으로부터의 식민지배를 받던 그리스를 1821년 [[그리스 독립 전쟁]]에서 [[프랑스]]와 함께 지원하여 1830년에 독립시켰다. * [[잔지바르]] - 오만 술탄의 점령에 의해 수백년간 탄자니아 노예수출의 교두보 역할을 하던 잔지바르를 1896년 술탄과의 전쟁을 통해 노예무역을 금지시키고, 1963년에 잔지바르를 해방시켰다. * [[UAE]]를 비롯한 [[카타르]], [[쿠웨이트]], [[바레인]] 등의 [[페르시아만]] 국가의 성립엔 영국의 공이 컸다. 원래 그 지역은 해적이 난무하던 지역으로 '해적 소굴'로 불리며 약탈이 극심했는데, 영국이 인도로 가는 상선을 보호하기 위해 현지 부족 추장과 '노예무역 금지, 포로학대 금지, 부족간 평화적인 분쟁해결, 외국 침략으로부터 보호' 등의 조약을 맺으며 영국의 영향력 아래 [[사우디아라비아]] 혹은 [[이란]]과 구분되는 정체성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1899년엔 쿠웨이트 무라바크 국왕의 보호요청 아래 독립을 시켜주었으며, 이후 [[걸프 전쟁|이라크의 침공]]때에도 미국과 함께 보호해 준다. 이런 연유로 카타르와 바레인엔 현재도 영국군 기지가 주둔하고 있다. * [[제2차 세계 대전]] - 사실 [[아돌프 히틀러]]는 2차대전 당시 대영제국에 대한 보존과 영국의 권리를 절대 침해하지 않겠다는 제안을 통해 끊임없이 영국을 회유하였다. 이를 모두 거절하고 항전하였는데 이는 제국의 해체를 각오한 결정이었다. 유럽에서 영국이 2년간 홀로 버티지 않았다면 대서양 건너 미국의 참전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만약 [[추축국]]이 승전하였다면 현재 세계는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파시즘]]이 주류사상이 되거나 그 영향력이 매우 오랫동안 잔존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 외 ①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루프트바페]](독일공군) 전력의 2/3 궤멸, ② 압도적인 해군전력 우위로 독일해군의 해양진출 의지 상실, ③ [[에니그마]] 암호해독, ④ 미국에 “핵폭탄, 진공관, 제트엔진, 레이더” 등 최신기술 이전 등을 통해 연합국 승리에 기여했다. * [[6.25 전쟁]] 참전(남한 기준) - 북한의 불법 남침으로 6.25 전쟁이 벌어지자 영국은 전후 경제가 엉망임에도 불구하고 4일만에 참전을 결정하여, 연합국에서 '''미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파병하여 한국의 공산화를 막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영국은 연 10만명이 참전해 전투를 벌였고, 그 결과 1,078명이 전사하고 2.000여명이 부상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3만7,000여명이 전사한 미군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희생을 치른 것이다. 특히 [[임진강 전투]]에서는 600여명의 '''글로스터 대대'''가 3만명의 중공군을 맞아 중공군 1만명을 전사시키고 59명만 전사하는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당시 글로스터 대대가 중공군을 3일간 막아준 덕분에 한국군과 유엔군이 방어 전열을 가다듬어 제2차 서울 함락을 막을 수 있었다. 이 전투는 향후 한국전 승패를 좌우한 지대한 공으로 평가받았다. 그외 영국 해군과 공군도[* 다만 미 공군의 일원으로 참전한 형태라 육군에 비해서 인지도가 떨어지는 편이다.], 항공모함 전대까지 이끌고 와 지원을 퍼부었다. 전후에도 1957년까지 사단급 병력을 주둔시키면서 한국의 안보를 지켜 주었다. 한편 당시 영국은 인도주의적 측면에서도 한국 국민들에게 좋은 영향을 남겼다. [[인천상륙작전]] 성공 이후, 영국군과 영국 의회, 외무부, 그리고 영국 언론들은 [[대한민국 정부]]가 북진 과정에서 민간인들을 공산당의 부역자로 몰아 벌였던 보복학살에 경악하고 국제사회에 이를 공론화하여 학살을 막는데 일조했다.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125916|#]] * [[대한민국]] 재건 지원 - 전후에는 재건을 위해 한국에 2,600만달러를 지원하였다. 1971년엔 당시 국가신용도가 낮던 한국에 영국 [[바클리스]] 은행은 [[현대중공업]]의 조선소 건설에 4,300만달러 차관을 제공하였고, 1975년엔 영국인 '잭 던컨'(William Jack Duncan)은 현대조선소에 광범위한 조선기술을 전수해 줬다. 이를 통해 한국 조선업 발전에 초석이 되었다.[[https://m.khan.co.kr/economy/industry-trade/article/201112092122145|#]] [[브리티시 레일랜드]]의 부사장이었던 영국인 [[조지 턴불]] 또한 한국 최초의 고유모델 자동차인 [[현대 포니]] 개발에 기여하였다. 또한 1961년부터 한국에 대한 영국의 대외원조 사업이 시작되어, 1988년까지 과학기술자 485명이 영국에서 연수를 받아 한국의 과학 기술 기반을 다지는 데에 큰 도움을 받았다.[* 1989년 [[한국과학기술원]] (KAIST)이 인공위성연구센터 연구진을 영국 [[서리 대학교]]에 파견하여 위성 제작 기술을 전수받아 [[우리별 위성|우리별 1호]]를 제작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외 1948년 유럽에서 제일 먼저 대한민국을 승인한 국가 영국이었고, [[샌프란시스코 조약]]에선 [[독도]]가 대한민국 영토임을 지지해주었다. * [[소말릴란드]] - [[소말리아]]가 총체적으로 엉망이 된 상황에서 소말릴란드는 독립국가를 선언하고 훨씬 안정적으로 국가로서 돌아가고 있는데, 그 원인의 하나가 소말리아의 다른 지역은 이탈리아의 식민지였지만 소말릴란드는 영국의 식민지라는 점이다. 둘의 차이는 과거부터 있던 사회구조를 얼마나 건드렸냐이다. 영국은 간접통치로 기존의 사회체계를 크게 건드리지 않았다. 그래서 분쟁을 중재할 수 있는 권위와 체계가 그대로 남아 타협이 가능했다. 하지만 이탈리아는 직접 통치하면서 기존의 사회체계를 다 없애버렸다. 그 결과 분쟁을 중재할 권위가 사라져버렸다. * [[나미비아 난민]] - 1904년~1908년 아프리카 [[나미비아]]에선 [[독일 제국]]의 강제노동, 강간 등 가혹한 식민지배에 반발하여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이에 독일은 '로타 폰 트로타'(Lothar von Trotha) 장군을 필두로 하여 [[나마족]], [[헤레로족]]에 대한 멸절에 가까운 인종학살을 벌였는데, 이는 20세기초 최초의 대량학살로 유명한 것이었다.[[https://www.timesofisrael.com/in-germanys-extermination-program-for-black-africans-a-template-for-the-holocaust/|#]] 여기서 대규모의 난민이 발생했고 헤레족 수천명은 생존을 위해 남아프리카의 [[칼라하리 사막]]으로 도망쳤는데, 이들은 당시 영국령이던 베추아날랜드(British Bechuanaland)로 망명하기를 희망하였다.[* 현 보츠와나에 해당한다.] 영국은 이들을 모두 받아들이고 학살로부터 보호해준다. * [[홍콩]]의 발전 - [[난징조약]] 체결 이후, 홍콩이 영국에 조차 되면서 이전까지 해적소굴로 유명했던 홍콩의 급격한 발전이 시작됐다. [[19세기]]에 홍콩은 영국의 주요 무역항이 되었고 홍콩은 영국의 물산 집산지로서 활용되는 '''자유무역항''' 및 '''[[중국]]으로의 [[관문]]'''으로 선언되었다. 이때 구룡반도-광둥성 광저우 간 [[동철선|철도]]가 개통되었으며 영국식 “법률, 행정, 교육, 문화, 경제 시스템” 등이 홍콩에 도입되었다. 1870년대~1880년대 이후 홍콩은 [[아시아]]의 영국령 중에서 가장 빅토리아 문화가 발달한 지역이 되었다. 1997년 7월1일 [[홍콩 반환]] 전까지 홍콩의 '경제, 금융, 문화' 등은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동양의 진주'''란 명칭으로 불렸으며, 국공내전, 문화대혁명 같은 중국의 大화마 속의 피해 역시 피해갈 수 있었다. 물론 영국령 기간동안 현지인에 대한 차별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① 1997년 홍콩 여론조사에 의하면 90%에 달하는 홍콩인들이 영국의 통치를 '''긍정적'''이었다고 평가했으며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1997/06/30/1997063070468.html|#]], ② 2013년 ‘사우스차이나 모닝포스트’ 여론조사에서도 마찬가지로 무려 92%의 홍콩인이 '''영국령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고 응답했다. [[https://mb.ntdtv.kr/news/china/news-censored-in-china/9729.htm|#]] 한편 2019년 홍콩 민주화 시위때에는 군중들 사이에서 [[유니언잭]]이 대거 등장하기도 했다. [[https://www.yna.co.kr/view/PYH20191208085100013|#]] * 킨더 트랜스포트 작전 (Kindertransport) - 영국이 2차대전이 발생하기 직전까지 9개월간의 구조활동을 통해 유럽에서 약1만명의 유대인 아동을 구출한 작전. 구체적으로 보면 1938년 11월9일 발생한 [[수정의 밤]] 사건 이후 독일전역은 [[반유대주의]] 광풍과 함께 나치 폭도들에 의해 유대계 상점 7천곳 이상에서 약탈, 방화등이 자행됐고, 사유재산 몰수와 함께 유대인 3만 명이 강제수용소로 끌려가야만 했다. 이 과정에서 부모를 잃은 수많은 고아들이 발생했고, 당시 독일내 유대인들은 전쟁 이전엔 비자만 있으면 독일을 떠날 수 있었지만[* 물론 재산은 가져갈 수 없었다.] [[미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나라들은 이들을 외면하며 비자를 내주지 않던 실정이었다. 이에 [[영국]]은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17세이하 보호자가 없는 유대인 아동에 대한 비자조건을 전면 면제하고, '난민 어린이운동' (Refugee Children's Movement)이란 조직의 긴급 형성을 통해 자금모집 및 독일, 오스트리아에 대표를 파견해 고아들에 대한 대대적인 구조활동을 펼쳤는데, 그 결과 1939년 9월 전쟁으로 유럽국경이 닫히기 전까지 '독일, 오스트리아, 체코, 폴란드'에서 약 1만명의 고아들이 영국으로 이송되어 귀중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https://en.wikipedia.org/wiki/Kindertransport|#]][* 런던 [[리버풀가 역]]은 이를 기념하기 위해 이제 막 기차역에 도착한 아이들의 모습을 형상화한 동상이 서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 [[미국 독립 전쟁]] 참전 흑인 병사 처우 문제 - 미국 독립 전쟁이 최종적으로 대륙군의 승리로 끝나자 승리한 미국인들은 [[파리 조약]]에서 영국군 흑인들은 자신들의 재산이므로 반환할 것을 요구한다. 반환시 이들의 운명은 뻔했는데, 영국은 이를 완강히 거부하고 몸값지불을 통해 이들을 [[캐나다]] [[노바스코샤]]에 정착시키며 자유의 몸으로 만들어준다. 결국 군 복무시 흑인들에게 자유를 약속한 조건을 지킨 셈이 됐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