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성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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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세계사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났을 때 이 새끼를 찍으면 대충 맞는다.
역시나 이번 이야기도 세계 만악의 근원에서 출발한다.
이 밈에 널리 쓰이는 문구[출처]
역시 세상에 흉악한 물건은 죄다 영국놈들이 만드는군요.[1]
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 2권 중에서
1. 개요[편집]
2018년부터 대한민국 인터넷에 퍼진 역사 관련 밈. 대역갤, 패독갤 같은 역사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퍼졌다. 주로 19세기 이후에 제국주의 정책을 펴서 식민지를 착취하고, 더 나아가 현대 개발도상국들의 유혈 사태 등 내/외부 갈등의 단초까지 제공한 유럽 강대국을 비판/풍자/조롱하기 위해 사용되는 말로, 대부분은 당시 제국주의의 선두주자였던 영국, 시기상 대영제국을 가리킨다.
어원은 嫌性(혐오스러운 인성) + 國(나라). 그 이전부터 흔히 인터넷 용어로 사용되는 혐성이라는 단어에 특정 국가를 가리키는 단서가 없듯 영국 외의 다른 제국주의 국가, 이를테면 프랑스, 19세기 제국주의를 넘어 중세의 베네치아 공화국이나, 구유고 연방의 주자인 세르비아, 소련 이후 구소련에 대해 패권주의 외교를 보이는 러시아 등 맥락에 따라 다양한 국가를 풍자하는 데도 사용되기 때문에 맥락을 볼 필요가 있다.
비슷한 말로 영국이 뭔가 안 좋은 일을 하면 혐추장국[2] 이나 "별로 위대한 영국이 아니다"라고 한다.[3]
2. 배경[편집]
대영제국의 전성기인 19세기는 영국의 산업혁명이 본격화되어 서구가 그 폭발한 국력을 비서구 국가로 돌리고 무력을 동원한 침탈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제국주의 사상이 팽배했던 시절이었다. 무력을 앞세워서 미개척지를 식민지화하고 자원을 수탈하는 건 웬만한 강대국이라면 기본 베이스로 세팅되어 있던 때였다. 사실 식민제국주의 시절 영국이 벌인 각종 만행은 프랑스, 독일, 벨기에, 네덜란드, 미국,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 러시아 등을 비롯해 식민지를 보유한 전적이 있던 서방권 국가들이나 웬만한 강대국이라면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전부 했던 행동이지만[4] 19세기 패권국으로서의 영국의 영향력과 본토 면적 대비 해외 식민지 영토가 가장 거대했기 때문에 더 주목받는 측면이 있다. 거기에다 영국도 일본과 똑같은 제국주의 섬나라라는 프레임과 현 패권국인 미국 또한 영국의 식민지였던 13개 식민지로부터 출발한 만큼, "미국의 제국주의도 뿌리를 따져보면 영국"이라며 끌어들이는 논리까지 더해졌다.
다만 역사에 대한 평가는 현대적 도덕적 관점이 아닌 당시의 보편적인 시대상과 배경 등을 고려해야 하며,[5] 정확하지 않은 루머나 공과 중 과만 선택 열거하면 그 어떤 국가도 악으로 묘사할 수 있다는 점 역시도 유의해야 한다. 단적인 예로, 국내 인터넷상에서 퍼지는 혐성국이라는 밈과 별개로, 정작 영국은 영연방을 통하여 구 식민지 국가들과 경제적/문화적/사회적/정치적으로 깊은 교류를 이어나가고 있다. 물론 피지배국들이 민간에서는 민족감정의 일환으로 영국을 비판하는 일은 많지만 영국과의 공식적 수교에서는 그런 감정을 접어두고서 일단은 깊은 교류를 이어나간다. 이것은 타 서유럽 국가들에 비해 그나마 식민지들의 평화로운 독립을 허용했다[6] 는 역사적 맥락, 영국과의 교류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익 등 많은 요소가 작용하겠지만 하여간 타 식민제국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영국이 구 식민지들과 관계가 원활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는 프랑스와 네덜란드가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도 식민지 독립 운동을 무력으로 탄압하고 전쟁까지 거쳤던 역사와 대비된다. 한국과 일본도 공식적인 외교 관계는 밀접한 편이지만 영연방 국가처럼 서로에게 대놓고 다중국적 취득 우선권이나 취업비자 우선권이나 거주자 투표권 부여 등 상호 특권들을 부여하지는 않아서 한국인들이 영연방의 개념을 쉽게 이해하기 힘들다.
그리고 영국과 함께 식민제국 투톱이었던 프랑스도 영국 못지 않게 혐성국으로 꼽힌다. 실제로 프랑스 식민제국도 스케일은 영국에 밀렸을 뿐 타 열강은 가볍게 압도하며 식민지에서의 만행 수준은 영국보다 더욱 악랄했다. 게다가 전후 식민지가 해체되고 나서 국제 무대에서 영향력은 크게 약해졌지만 그 이후에 국제 외교에서 식민지에 관해 트러블을 별로 만들지 않은 영국과 달리 프랑스는 끝까지 식민지를 포기하지 않고 옛 식민지 국가와 전쟁까지 불사하다가 끝내는 패전한 역사가 있는데도, 현재까지 과거 식민지 국가의 내정에 대놓고 간섭하는 제국주의 시절의 외교를 유지하기 때문에 영국이 제국주의 건으로 비판받을 때 프랑스도 세트로 비판받으며, 영국이 '혐성국'으로 불리는 것처럼 프랑스도 현시대 중화인민공화국 못지않은 패악질로 인해 '유럽 짱깨'로 불리기도 한다.
주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혐성국' 드립을 꺼낼 때 주 소재는 보통 현 패권국인 미국이 중동, 남미에 저지르는 쿠데타 사주, 통수, 갑질이나 과거 패권국이었던 소련이 위성국에 저질렀던 패악, 21세기 중국이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저지르는 사채놀음 및 아시아 일대에 저지르는 문화침탈 등 유사 제국주의적 정책, 그리고 파룬궁, 위구르, 티벳에서 현재진행형인 인권 탄압보다는 18~19세기 제국주의 시대 영국을 필두로 서구(주로 영국과 프랑스)가 행한 중동, 아시아, 아프리카를 나눠먹은 각종 밀약, 다중계약, 통수들의 역사이다.[7] 상술한 중국은 현대 국제사회에서 세계구급 민폐를 양산하고 있기 때문에 단순한 조롱성 밈을 넘어 깊은 혐오가 동반되어 조리돌림을 당한다.[8]
요즘은 영국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서방권 대부분 국가의 제국주의 시절도 인터넷에서 비난의 대상이다. 때문에 온라인 커뮤니티를 돌아다니면 "아프리카가 친중/친러인 것과 중동 난민 문제는 100% 서방권의 자업자득"이라는 반응도 존재한다. 이슬람권 출신 난민과 이민자들 중 몇몇이 유럽에서 테러, 살인, 성폭력을 일으키면 이슬람을 경계하자는 반응이 나오기도 하지만 유럽 제국주의의 업보라고 조롱하기도 한다.[9]
한국 뿐만 아니라 최근 해외에서도 도덕적 감수성과 정치적 올바름의 확산과 함께, 과거 제국주의의 대표격 이미지 국가로서 영국에 대한 비판 여론이 증가했다. 이는 영국 내에서조차 다를 건 없어서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을 계기로 노예무역상의 동상을 강바닥에 수장시켜버리는가 하면 벵골 대기근과 관련 있는 윈스턴 처칠을 인종차별주의자고 비난하기도 했다.
그 밖에도 엘리자베스 2세가 사망했을 때 옛날에 영국의 식민지였던 나라의 일부 누리꾼들이 조롱을 하기도 했다.# 다만 SNS 등의 현지 일부 누리꾼의 의견을 일반화하는 것은 오류로서 일례로 반영감정이 심하다고 알려진 아일랜드조차 엘리자베스 2세의 붕어소식에 총리와 대통령의 공식적인 조의 및 정부청사 역시 아일랜드 국기를 내리며 애도를 표시한 바 있고#, 2011년 엘리자베스 2세의 아일랜드 방문 당시엔 아일랜드 국민의 77%가 여왕을 환영한다는 여론조사 결과에서 보듯 생각한 것 만큼 일반 대중들에게 이미지가 나쁜 편은 아니었다.# 또 200년 간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는 9월 11일을 '국가 묵념의 날'로 지정하며 붕어에 애도를 표시한 바 있다.[10]
여담으로 이러한 혐성국 드립과는 정반대로 제국주의를 재평가하는 수정주의적 역사관이 서구에서는 2000년대부터, 한국에서 관련 서적의 번역은 2010년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관련 대표 학자는 니얼 퍼거슨인데, 정작 한국 인터넷에서는 그에 맞물리는 시기에 본 항목의 혐성국 드립 등 제국주의 비판이 대두한 관계로 비판의 대상으로 굴러 떨어졌다.
3. 사례[편집]
3.1. 영국의 과오가 분명한 경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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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 동인도 회사(1600~1873) - 영국의 인도와 동아시아 깽판의 주역 중 하나였던 기업. 20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기업답게 수많은 행적이 있는데 대표적으로 벵골을 시작으로 인도를 식민지로 삼은게 있다. 이 과정에서 막대한 통치비용을 메꾸기위해 높은 토지세는 기본이고 식량을 재배할 경작지를 갈아엎고 쪽과 아편과 같은 상품작물 플랜테이션으로 전환했다.[11] 1770년 벵골 대기근엔 천연두와. 가뭄으로 약 100만~ 200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동인도회사의 세금정책도 이를 가중시켰다. 게다가 영국의 정치인들이 이 동인도 회사의 지분을 가지고 있어서 이들의 악행을 방관하고 뒤에서 지원했다. 그 중 하나가 하단의 아편전쟁이었다. 어느 정도 기간이 지난 후에는 동인도 회사가 소유했던 인도, 버마 지역은 영국 왕실령이 되었으나 그들은 여전히 고통받았다.
- 아편전쟁(1840~1842, 1856~1860) - 청나라의 무역 보호주의, 공행의 부정부패, 막대한 찻잎 수입 등으로 불어나는 무역 적자를 이유로 마약을 만들어 밀수출하고, 이 때문에 청나라에서 마약 중독과 국부 유출 문제가 심각해지자 국내에 아편 수입을 금지하는 조치를 취했을 뿐인데 이를 빌미로 1, 2차에 걸쳐 영국을 주도로 미국, 프랑스와 함께 청나라에 전쟁을 일으킨 사건이다.[12] 즉, 영국은 청나라가 마약 파는 걸 막았다고 전쟁을 개시한 거다. 의도와는 별개로 아편 판매만 놓고 보면 이는 당대 영국 내부에서도 논쟁이 심한 문제였다. 전쟁 반대파들에게서는 "승리할 것은 자명하지만 그로 인한 위신의 실추가 더욱 더 두렵다"는 자조가 나올 정도로 명분 없는 전쟁이었다. 당시 영국의 하원의원이었던 글래드스턴의 연설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막대한 이익을 얻을 수는 있어도 후에 영국의 위신과 명예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손상될 것이라며 이 전쟁의 불합리성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영국 내에서도 있었으나 단 9표의 차이로 전쟁이 승인되었으며, 예상대로 영국엔 '인류 역사상 가장 추악한 전쟁을 일으킨 나라'라는 꼬리표가 영원히 남게 되었다.
아편전쟁 이전에도 중국내 아편중독자는 400~1,200만 명이 존재했던 걸로 추정하는데, 이는 난징 조약 이후 약 2배 가까이 늘었난 것으로 보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아편 전쟁 이후 중독자의 수는 1,350만[13] ~4,000만 명[14] 까지 추정하고 있다. 반대로 다른 의견도 존재하는데 홍콩대 석좌교수인 프랑스 디콰터 (Frank Dikötter)는 모든 주류자가 알콜중독자는 아니듯이 중국내 심각한 아편중독자는 상당히 과장됐음을 지적한다. 예컨대 예수회 선교사이자 아편 반대론자인 ‘존 터너’ (John Turner) 역시 그의 중국기록에서 이 점을 언급하고 있는데, 19세기 말 아편 무역항인 광동에서 발견할 수 있는 매우 소수의 쇠약해진 사람들 중 평소 아편습관으로 인한 원인은 드물며, 대부분이 치료할 수 없는 질병에 대한 고통의 무게에서 벗어나기 위해 계속 아편만을 피울 뿐..이라는 점을 기록하고 있다. 또 인도인 역사가 ‘리처드 뉴먼’(Richard Newman) 역시 19세기 동안 상점에서 아편을 쉽게 구할 수 있었던 영국에서는 빈번하고 만성적인 아편 사용자가 아편으로 인한 해로운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며, 19세기 중국 역시 아편이 대부분의 흡연자의 건강을 해치거나 수명을 단축시키는 경우가 거의 없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사실 19세기 아편은 유럽, 미국, 중동, 아시아 등 세계적으로도 재배나 사용이 금지가 아니었고 전통적으로 아스피린 이전 진통제나 오락용으로 널리 사용됐었다. 예컨대 1830년대 영국에서는 한해 22,000 파운드의 아편이 인도와 터키에서 수입됐고 약국에서도 누구나 손쉽게 구입이 가능했으며 아편수입을 금지하는 법률도 없었다.[15] 그렇다면 유독 왜 당시 중국에서 아편이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는가에 대해 의문점이 남는데, 중국인 사학자 ‘정양원’(Zheng, Yangwen) 교수에 따르면 명-청 시대를 거치면서 나타난 도시화, 소비주의, 상업주의의 발달 및 주로 부유층과 젊은층 사이에서 하나의 세련되며 교양있는 문화의 상징처럼 여겨진 아편의 서민층 확산 등의 사회적 변화를 원인으로 뽑고 있다.[16] 반대로 영국의 경우에는 청교도적 윤리관이 중산층 이상에 팽배했던 사회상으로 인해 아편중독자를 자기 관리 및 절제도 못하는 인생의 실패자로 여기는 풍조가 강했고, 자연스럽게 아편중독자의 비중이 하류층에 몰려 있었다. 또한 중국의 ‘천쑹취안’(Chen, Song-Chuan) 교수에 따르면 백련교도의 난, 태평천국의 난, 난징조약, 의화단사건, 청일전쟁, 국공내전 등을 거치면서 발생한 중국 내 대혼란과 불안도 중국인들을 더욱 아편에 의존하게 만들었으며, 실제로 1830년대 아편 무역이 금지됐음에도 불구하고 청나라의 상인, 갱단, 부패한 관리들은 동남아로부터 엄청난 규모의 아편을 밀수했고, 쓰촨성과 원난성 같은 내륙지방에선 아편이 현금 대체품으로 사용됐으며, 중앙정부의 노력에 불구하고 지방에선 아편이 농민들의 수입원이자 지방정부의 주요 세수원으로서 이용되는 일이 빈번했던 점을 지적한다.[17]
이렇듯 시간이 지나면서 중국 내 아편의 자체생산-소비는 영국의 아편 무역 규모를 압도하는데, 이로 인해 19세기 후반에 이르면 아편무역은 수익성 상실로 결국 무역이 종식되는 결과를 낳았고, # 20세기에 청나라가 멸망한 뒤에도 중국내 ‘지방군벌, 국민당, 공산당 정권’에 의해 주 수입원으로 활용되거나, 중국밖의 경우 패전한 국민당 잔당에 의해 현재까지도 악명높은 동남아의 골든트라이앵글을 형성해가며 그 규모를 더욱 키워나갔다. 이러한 중국 내 아편 문제는 1950년대 마오아래 완전히 뿌리 뽑혀 현재까지도 마약에 대해서는 응보주의적 접근을 취하고 있다.[18]
이렇듯 시간이 지나면서 중국 내 아편의 자체생산-소비는 영국의 아편 무역 규모를 압도하는데, 이로 인해 19세기 후반에 이르면 아편무역은 수익성 상실로 결국 무역이 종식되는 결과를 낳았고, # 20세기에 청나라가 멸망한 뒤에도 중국내 ‘지방군벌, 국민당, 공산당 정권’에 의해 주 수입원으로 활용되거나, 중국밖의 경우 패전한 국민당 잔당에 의해 현재까지도 악명높은 동남아의 골든트라이앵글을 형성해가며 그 규모를 더욱 키워나갔다. 이러한 중국 내 아편 문제는 1950년대 마오아래 완전히 뿌리 뽑혀 현재까지도 마약에 대해서는 응보주의적 접근을 취하고 있다.[18]
- 북아일랜드 분쟁(1960~1998), 피의 일요일 사건 - 영국의 영국의 억압과 차별 정치에 의해 촉발된 갈등. 이후 50년 만에 영국 총리가 공식 사과를 하며 북아일랜드 벨파스트 사건에 대해 영국군의 시민 살해를 시인했다.#
- 아일랜드 대기근(1847~1852) - 다만 오늘날 영국에서 과거사 문제를 인식하고[19] 과거 피식민국이었던 아일랜드의 경제가 성장했기 때문에, 현대 21세기 들어서는 영국과 아일랜드의 국민 감정이 상당히 개선되었다.
- 보어 전쟁 당시 보어인 수감(1899~1902) - 영국의 식민지 점령정책에 저항하며 게릴라전을 통해 영국군을 괴롭히는 보어군을 차단하기 위해 강제수용소(Concentration Camp)를 운영하였고 관리 부족, 전염병 등의 이유로 민간인들과 병사들을 사망하게 만들었다. 당시 보어인은 인구 50만 명, 병력 7만명이였는데 이를 섬멸하기 위해 영국은 45만 명의 군인을 파견했으며 21만 명의 민간인을 강제수용소에 감금했다. 그 과정에서 보어인 병사 27,000명이 숨졌고 집단수용소에서 민간인 28,000명이 비참하게 죽었다. 이에 대해 1999년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100년 전 보어전쟁 때의 일에 대해 남아프리카 공화국 국민에게 유감의 뜻을 표시한다.#
- 전함 강탈 사건(1914) -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이후 윈스턴 처칠이 오스만 제국이 대영제국에 주문했었던 전함 2척을 강제로 압류한 사건이다. 전쟁 때문에 군함 한 척이 시급한 상황이라지만 멀쩡히 대금까지 다 양도하고 승무원도 다 승조한 전함을 강탈했다. 처칠은 오스만 측에 군함 대여비로 하루당 1천 파운드를 제공하겠다고 제시했는데, 해당 군함의 대금이 275만 파운드였음을 감안하면 2750일(7.5년)을 대여해 원금을 충당할 수 있었으며, 당시 상황상의 전력 공백을 감안하면 말도 안 되는 푼돈이었다.[20][21] 당연히 이런 푸대접을 받은 오스만 제국 측에서는 반영 여론이 듫끌었지만, 오스만의 대외적인 공식입장은 영국과 척을 질 생각이 없었고 끝까지 중립을 고수했다. 독일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스만이 계속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자 독일은 이 애진코트 사건을 빌미 삼아 오스만에 군함 2척(사실상 독일 지중해 함대의 명령을 받는 독일의 전함)을 제공했고 이들은 러시아 세바스토폴, 오데사, 노보로시스크 등의 항구를 선전포고 없이 무단 공격하며 오스만은 강제적으로 동맹국 편에 서게 되었다. 이는 향후 협상국에 큰 피해를 준 갈리폴리 전투로 이어졌다.
- 1876~1878년 인도 대기근 - 사망자 수 560만에서 960만에 달하는 대기근. 엘니뇨로 인한 가뭄으로 상당수 지역에서 흉작이 이어졌는데 당시 영국령 인도 제국의 현지 지역 유지들은 오히려 식량이 부족한 지방에서 다른 지방으로 고의로 식량을 수출시켰다. 물론 기근은 한 차례로만 끝나지 않고 여러차례 진행되었다. 이상기후로 인한 가뭄으로 인도 외에 중국(간쑤성과 산시성), 남미(브라질 북부) 및 동아프리카(수단과 에티오피아) 지역에서도 1,900만에서 5,000만 명 정도가 사망했다. 당시 영국령 인도정부는 재정난으로 이전 기근때 보다 적은 금액이 투입되면서 피해를 가중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천만 루피가 투입되었고, 영국이 직접 통치하지 않던 토후국인 마이소르, 하이데라바드에도 720만 루피의 지원이 이뤄졌다. 그 외 영국본토와 해외령에서도 840만 루피의 기금이 이어졌다.
- 인도 암리차르 학살 사건(1919) - 1919년 4월 13일 인도 북부 펀자브주 암리차르 중심가 잘리안왈라 바그 광장에서는 반영(反英) 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영장 없는 체포 등을 허용한 롤럿법에 의해 체포된 민족지도자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영국령 인도군은 이에 앞서 집회 금지령을 내렸지만, 시민 대다수는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추가로 이날은 시크교도들의 바이사키(Baisakhi) 축제가 열리는 날이었기에 광장에는 시위와 무관한 일반 시민들도 다수 모여 있었다. 사실 이 직전엔 당시 600명의 인도 어린이들을 돌보던 '마셀라 셔우드'라는 영국여성 선교사가 자전거를 타고 가던 중 인도 시위대에 둘려싸여 집단린치를 당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는 영국인들 분개하게 만들었고 그런 상황에서 인도의 시위대가 접근금지 선을 넘어 몰려들자 당시 흥분한 다이어 대령은 영국정부의 발포금지 명령에도 불구하고 총격을 명령했다. 결국 이 사건으로 379명이 숨진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에대해 당시 처칠은 이 사건을 영국 역사에 괴물같은 사건이며 비난했고, 인도 평의회의 일리엄 빈세트 경은 이에 대해 사과했다. 또 당시 피살자 유족들은 옥신각신 끝에 1인당 37파운드 10실링의 보상금이 지급됐다.
- 이란 모하마드 모사데크 축출(1953) - 석유 이익을 위해 영국에서 미국을 끌여들여 정보기관의 공작질로 이란 정부에 대한 쿠데타를 선동하여 정부를 전복시킨 사건. 사우디아라비아의 석유 이권을 독점하고 있던 미국 자본의 아라비안 아메리칸석유[22] 가 1950년 말 사우디정부의 압박에 굴복, 수익을 사우디와 50대 50으로 반분키로 합의함에 따라 이란에서도 영국계의 앵글로-이란 석유 역시 같은 압박을 받았으나 영국은 거부하였고 이에 모사데크가 국유화를 선언하자 뿔난 영국은 미국 정보기관인 CIA와 함께 모사데크를 축출하고 친미정권인 팔레비정권을 내새워 석유이권을 나누어 먹는다.[23]
- 노예무역 - 16세기 초 포르투갈이 처음 서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사들여 유럽 대륙으로 수송한 이후 영국 역시 대서양 노예무역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수송선의 국적별로 규모로 보자면 포르투갈 480만 명, 영국 230만 명, 스페인 130만 명, 프랑스 110만 명, 네덜란드 44만 명, 미국 40만 명으로 추정된다.# 영국 스코틀랜드의 최대 도시인 글래스고는 시 위원회 조사 결과 역대 시장 79명 중 무려 40명 이상이 대서양 노예무역과 관련된 인물이었으며, 글래스고 주요 건물 중 11개 이상이 노예상과 관련된 것이였다. 또 도시 곳곳에 노예상 8명의 기념비, 추모비가 있었고, 시내 대로 62개 중 대부분이 노예상의 이름을 따라 지은 것이다. 증기기관차를 발전시킨 산업혁명의 아버지 제임스 와트 또한 흑인 어린이를 사고파는 데 관여했었다.# 게다가 영국의 최고영웅 이라는 넬슨 제독 역시 노예제를 옹호하고 다녔다.[24] 다만, 당시 이러한 노동력 착취는 전세계적으로 보편적인 시대상이었다 라는 것을 어느정도 고려할 필요는 있다. 단적으로 조선만 하더라도 19세기 말까지 500년이 넘는 기간동안 자국민을 대상으로 노비제를 대량으로 운영하였으며, 성리학자인 이황만 보더라도 부리던 노비만 370명이 넘었다. 결국 아이러니 하게도 이런 노예무역의 폐지를 세계에서 제일 먼저 주도한 나라도 영국이였는데, 부족한 노동력을 식민지인과 자국민 저소득층을 차출해 부려먹으면서 근본적인 해결은 하지 못하였다.
- 제2차 중동전쟁 - 영국이 프랑스, 이스라엘과 함께 일으킨 전쟁. 수에즈운하 건설 자체가 당시 제국주의 패권 국가인 영국·프랑스가 식민지와의 거리를 줄이고 경제적·국제정치적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전략의 하나였으며 무엇보다도 자신들의 불만을 해결한답시고 이들이 전쟁을 택한 것은 이들의 명백한 잘못이였다. 결국 이들은 예상치 못한 국제사회 비난에 시달렸으며 영국과 프랑스의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여론이 거세졌다.#] UN에서는 프랑스, 이스라엘 "영국"의 철수를 결의했으며# 미국은 영국과 프랑스의 수에즈 운하에 대한 영향력 행사 우려와 당시 고조 중이던 소련과의 핵전쟁 위험. 그리고 이를 빌미로 중동을 비롯한 제3세계의 급격한 공산화 노선을 우려하고 있었는데, 당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은 전쟁이 발발하자 영국 총리 관저에 전화를 걸어 비난했으며, 그럼에도 영국이 고집을 피우며 전쟁을 포기하지 않자 "미국에서 영국을 제재하였다." 미국은 전쟁을 포기하지 않는 영국을 비난하며 미국이 보유하던 영국의 파운드화를 매각하여 영국의 화폐와 경제를 궁지로 몰았으며 미국산 원유의 영국 판매도 중단하는 제재를 취한다. # 결국 전쟁은 이집트의 승리로 끝났으며,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은 시나이 반도에서 즉시 철수하고 나세르는 수에즈 운하 국유화에 성공한다. 결국 영국 제국주의를 무너트린 것은 미국이였으며 이번 전쟁으로 지정학적 요충지를 선점하고 군사력과 경제력을 내세우며 패권을 추구하면서 약소국의 주권을 누르는 제국주의 시대는 노을 속으로 사라졌다.#
- 포턴 다운 - 인도 식민지 시절 수백명의 영국군 산하 인도인을 상대로 겨자 가스 독성 평가를 위한 인체실험을 실행했다.# 이 사건에 대해 Rawalpindi experiments로 불리기도 한다.
- 에티오피아 알레마예후 왕자의 유해 일방적인 반환 거부 - 영국에 포로로 끌려가서 영국에서 죽은 에티오피아 왕자의 유해를 왕자의 후손이 돌려달라고 요청하자 영국에서는 유해 발굴 시 다른 묘지들도 손상된다고 주장하며 거절했다.#
- 이라크 전쟁 - 미국과 함께 이라크에 대량 살상무기가 있다는 거짓명분을 내세워 이라크를 침공했다. 이 사건은 영국인들에게도 토니 블레어가 미국에 의존하게 만든 게 아니냐는 비판이 있다.
- 영국의 티베트 침공 - 영국령 시킴 왕국과 티베트 사이의 국경 문제와 러시아에 대한 완충국 설정문제로 티베트를 침공한 사건. 당시 영국은 청나라 강희제의 티베트 정복이후 중국인으로 구성된 내정간섭 기관인 암반(Amban)이 존재하자 청나라와 협상 하였지만 티베트가 이를 거부하였고, 이에 탐험대 원정을 통해 다시 티베트와 독자적인 협상을 추진하였지만 몇달 간의 기다림에도 끝내 협상은 거부당했다. 러시아의 티벳개입에 대한 영국의 의혹은 특히 달라이 라마 13세와 그의 영적 스승인 러시아계 궁정인 ‘도르지예프’(Agvan Dorzhiev)라는 승려를 중심으로 커져 갔는데, 실제 14대 달라이 라마의 증언에 의하면 13대 달라이 라마는 러시아와 관계를 수립하려는 간절한 열망이 있었고 영국을 배격했는데 그 중심엔 도르지예프가 있었다고 증언했다.[25][26]
또한 달라이 라마는 1900년 러시아에게 티베트의 공식적인 보호를 요청하고 1년 뒤엔 차르의 궁전에도 방문해 환대를 받는데, 이런 상황에서 이 문제를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았던 커즌 경[27] 은 달라이 라마에 편지 세 통을 보냈지만 그 편지는 뜯지도 않은 채 그대로 반송됐다. 이에 커즌 경은 협상을 체결하기 위해 티베트에 사절단을 빙자한 침략군 파견을 압박했다.[28] 결국 원정 과정에서 양측간 충돌이 있었고 구식 화승총으로 무장한 티베트군은 맥심 기관총으로 무장한 영국군에 학살당했는데, 이는 에드워드 시대에 이르러 부상한 반전 여론과 맞물려 영국내에서도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다만 당시 러시아는 1904년 러일전쟁으로 티베트에 영향력을 행사할 여력이 거의 없었고, 제공된 소총 역시 30정이 전부인 수준으로 밝혀졌다. 결국 이 결과로 체결된 1904 라싸 협정으로 중국으로부터 배상금과 함께 시킴 왕국과 티벳의 국경이 설정되었으며, 1906년에는 청나라 영토로서 재확정된다.
- 호주 원주민에 대한 학살 - 뉴캐슬 대학의 역사가 린달 라이언이 이끄는 호주 연구 위원회에 따르자면 영국 식민지 정착민이 호주에 정착한 1788년부터 독립이후 1930년까지 유럽 정착민들과 호주 원주민들의 충돌로 의해 약 304건의 크고 작은 원주민 학살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2022년 최신 기록에 따르면 토레스 해협에서 학살된 원주민 수는 412명으로 증가했다. #
- 프레스 갱 - 1797년부터 1815년 까지 무려 22년간 지속된 나폴레옹 전쟁의 영향으로 절반에 가까운 영국 해군 수병 숫자의 급감과 미국으로의 탈영병 급증으로 외국인인 미국 사람들까지 강제징집해서 미영전쟁의 한 원인이 되었다.[29] 당시 프레스갱은 영국의 사례가 유명하긴 하지만 18세기부터 19세기까지 있었던 서양문화권 해군의 부조리로서 미해군도 미국 독립전쟁 당시 강제징집을 이용했었다. 국가 행정력이 미약했기 때문에 이런식으로라도 전쟁에서 강제징집을 했지만[30] 그 중에서도 영국은 도를 넘어서 외국 선박을 나포하여 외국인을 징집하는 추태까지 저질렀다. 결국 이러한 관행은 1815년 나폴레옹 전쟁 이후 공식적으로 종료됐다.
3.2.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경우[편집]
- 거문도 점령 사건 - 러시아를 견제한다는 명목으로 조선의 영토를 무단 점거한 것 자체는 엄연한 침략이지만 오히려 이 당시 거문도에 주둔한 영국 해군은 거문도 현주민들과의 사이가 굉장히 좋았다. 영국은 비록 무단으로 점령했어도 애초에 러시아 제국의 남하를 견제하기 위해서 왔기 때문에 조선인과 무력충돌을 할 이유가 전무했다. 그렇기에 영국군도 일반적인 조선 지방관[31] 들과 다르게 노동에도 정당한 대가를 지급했고, 의료봉사나 식량 배급도 베풀었으며, 그 외에는 대민마찰을 최대한 피하기 위해 병사와 주민들과의 개인적인 접촉을 엄격하게 금지하였다. 이런 인연 때문에 거문도 주민들은 거문도에 거주하다가 병사 혹은 자연사한 영국군의 묘지를 지난 120년 동안 자발적으로 우수한 상태로 관리해주었는데, 후일 주한 영국대사관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2005년부터 2015년까지 거문도 학생에게 장학금을 수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고로 정부 차원에서는 분명 잘못된 침략 행위였지만, 실제적인 통치는 평화로웠으며 오히려 영국군의 철수 이후 거문도 주민들이 영국의 군정 통치를 그리워한 아이러니한 사례이다.
- 일본 제국의 한반도 강제 병합에 대한 승인 및 방조 - 영국은 1923년까지 약10년간 존속한 영일동맹을 통해 일본의 대한제국에 대한 특수한 지위를 인정하였다. 본질적으로 이는 두 제국주의 국가가 영합하여 약소국의 주권을 멋대로 침탈한 것이므로, 한국과 현대의 시각에서 보자면 이는 비판받아 마땅한 행위이다.[32] 다만 당대 영국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는 그레이트 게임 형국에서 영국 패권의 유지를 위해서는 어느 정도 불가피한 것이기도 하였다. 러시아-프랑스 동맹의 강화와 독일 제국의 팽창이라는 당대 동아시아 안보 질서 속에, 조선이 자신들의 적성국인 러시아에 아관파천으로 영합하는 것은 영국 제국의 극동 안보에 간접적으로 위협적인 변수로 작용했기 때문이다.[33] 과도한 군비경쟁으로 인해 유럽에서의 대응만으로도 벅찼던 영국은, 일본과의 공조를 강화함으로써 이에 대응하였다. 때문에 자국 안보를 위해 약소국의 운명을 팔아먹었다는 역사적, 인도적 측면의 비판과는 별개로, 정치현실주의적인 측면에서만 보자면 영국의 행동은 납득 가능한 결과이기도 하다.
물론 당시 이러한 강대국간 이권행위는 분명 잘못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을 보다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외부에 국한된 설명 외에도 틀:대한제국의 국권피탈과정에서 보듯 가장 중요한 당사자인 조선의 내부상황 역시 어느정도 고려할 필요가 있는데, 조선 왕가의 엄청난 사치와 부패 등으로 국고는 고갈 되어갔으며 # 때문에 병사들의 군료에 모래를 섞어 지급한 것이 발단이 되어 일어난 임오군란이나 민중들이 들고 일어난 동학 농민 혁명의 경우 외세의 힘을 빌려 진압하는 등 순전히 내치(內治)에 해당하는 문제까지도 외세에 상당부분 의탁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에 대한 식민지배의 본질적인 책임은 일본의 대륙진출 야욕에 있는 것은 자명하다.
- 수에즈 운하 - 이집트의 독재자 나세르가 군부 쿠데타로 집권한 직후 수에즈 운하를 일방적으로 국유화하고 이스라엘 선박의 통행까지도 금지하였다. 문제는 수에즈 운하는 프랑스와 영국의 막대한 자본, 기술을 투자하여 당시 이집트의 군주였던 사이드 파샤와 합의하에 진행한 사업으로서 이집트 정부와 5:5지분으로 99년의 운영권을 보장받았다는 것이다. 또 당시 나세르는 프랑스-알제리 전쟁에서 반프랑스 게릴라세력 지원과 이스라엘에 대해선 팔레스타인 게릴라를 지원했다. 이에 이미 제1차 중동전쟁에서 이집트의 침공을 받은 전력이 있는 이스라엘은 이를 우려하였고 이스라엘 군대의 침공을 필두로 영국과 프랑스의 특수부대가 합세하였다. 수에즈 전쟁은 전쟁이며 프랑스, 이스라엘과 짜고 전쟁을 일으킨 것은 그 어떠한 논리를 들고와도 영국의 변명 불가능한 과오이지만 전쟁을 제외한 수에즈 운하 자체에 대한 갈등은 영국으로서도 어느정도 할 말이 있었던 것이다.
- 사이크스-피코 협정 -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이 프랑스와 함께 오스만 제국이 지배하고 있던 중동 아랍권 지역을 영국령과 프랑스령으로 나눠먹자는 골자의 조약을 맺고, 제1차 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자 영국과 프랑스는 이들 지역들을 보호령, 위임통치령이라는 명분 하에 사실상 식민지화 하였다. 이 과정에서 자국 군인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를 통수친것은 덤이다. 이것으로 현지 종교, 민족, 역사를 고려하지 않아 현재 중동의 분쟁의 원인이 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 사이크스 조약은 그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단지 레반트의 남북을 A, B지역으로 나눠 영국과 프랑스가 일정기간 통치하기로한 밀약에 불과했고, 현재 중동의 세부적인 국경은 오스만 제국때의 행정구역과 현지 지도자의 협상과 전쟁등을 통해 결정됐다. 또 매우 복잡한 현재 중동의 분쟁과 정세를 모두 100년 전 사이크스 피크로 귀인하는 것은 상당한 비약으로서, 고대때 부터 분쟁이 끊이질 않았던 중동의 역사적 배경, 19세기 중후반 부터 '유럽의 환자'라 불리며 각종 외세의 외침과 내부반란으로 대혼란을 겪고 있던 당시 오스만의 정세를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 당대 중동은 부족주의가 더 강했다. 민족 개념이 뿌리박은 것은 이 이후이다.
- 맥마흔 선언 - 영국이 제1차 세계 대전 승리를 위해 유대-아랍측과 이중계약을 했다고 알려진 서한이다. 이에 대해선 매우 복잡하게 들어가야 하는데, 당시 아랍의 지도자 후세인과 맥마흔이 교환한 서신 원문#을 보면 레반트의 특정 서부지역은 옛부터 여러 종교와 민족이 함께 살던 지역이므로 순수한 아랍의 땅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랍의 영토에서 제외하기로 합의를 했다.[34] 맥마흔은 이 지역을 유대인에게 주기로 한 것이었는데, 이후 해석의 모호성으로 인해 이 지역이 팔레스타인이냐 아니냐를 두고 문제가 되었다.
또 20세기 초만 해도 과거 팔레스타인은 현재의 요르단을 포함한 지금보다 훨씬 더 큰 땅이었는데# 1차대전 이후 레반트 관할은 UN의 전신인 국제연맹(The League of Nations)에 이관이 되었고,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따라 ‘시리아, 이라크, 요르단’에 대한 아랍의 자결권이 인정받았듯이 ① 마찬가지로 팔레스타인내 ‘아랍, 비아랍계’ 인구비를 고려해 70%에 해당하는 동쪽 팔레스타인(현재의 요르단)은 아랍측의 영토로.. ② 나머지 30%에 해당하는 서쪽 팔레스타인은 유대인의 국가를 설립할 수 있는 합법적인 국제법상 권리가 국제연맹 51개국 회원국 만장일치로 인정받고 있던 실정이었다.# 이러한 결정에도 불구하고 이후 아랍측은 나머지 30%에 해당하는 서쪽 팔레스타인에 대한 영유권 마저 주장하며 충돌이 일어났는데, 당시 위임령 팔레스타인에 대한 신탁관리자의 지위에 있던 영국은 이를 중재하기 위해 1937년 아랍측에 훨씬 유리한 조건을 제시했으나 아랍측은 이를 거부했다. 이후 충돌이 심해지자 2차대전 이후 상황이 어려웠던 영국은 결국 이 문제를 다시 UN에 회부하였고, 1947년 UN 중재안이 나왔으나 아랍측은 이를 또다시 거부하였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언하자 바로 주변 아랍국들은 연합을 맺고 이스라엘에 전쟁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중동전쟁이다.
맥마흔-후세인 서신에서 쟁점이 되는 것은 1915년 10월24일에 양측간 합의한 다음 문장이다.
}}}||맥마흔-후세인 서신에서 쟁점이 되는 것은 1915년 10월24일에 양측간 합의한 다음 문장이다.
Portions of Syria lying to the west of the districts of Damascus, Hama, Homs and Aleppo cannot be said to be purely Arab, and should be excluded from the proposed limits and boundaries. (다마스커스, 하마, 홈스 그리고 알레포 구역의 서쪽에 위치한 시리아의 일부는 순수한 아랍지역이라고 할 수 없으며, 요구한 경계에서 제외되어야 한다.)여기서 국내 일부는 1915년의 시점의 오스만의 지도만을 보고 추측을 통해 당시 레반트 지역의 빌라예트 (vilayet)는 ‘알레포와 다마스쿠스, 베이루트, 데이르에조르’ 4개밖에 존재하지 않았고, 따라서 ‘홈스와 하마’는 그보다 하위의 행정구역인 산자크(sanjak) 밖에 없었으므로, Districts는 모두 산작크에 해당하며 따라서 팔레스타인은 제외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1915년 10월24일 이후에도 계속 이어지는 맥마흔과 후세인의 교신내용에 대한 객관적인 1차자료를 고려하지 않은 것으로서, 이에 대한 명확한 해답은 1915년 11월15일 후세인이 맥마흔에게 자신이 진정으로 구상하는 아랍 왕국의 영토가 어디까지인지를 보낸 서신 원문에서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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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을 보면 후세인은 자신이 구상하는 아랍왕국이 기본적으로 빌라예트를 기초로 계획 했음을 알 수 있는데[35] 그는 1) ‘알레포와 베이루트 빌라예트 및 그들의 해안가 지역’은 아랍의 땅이라며 배제를 완강히 거부한 반면, 2) 팔레스타인(현재 이스라엘)에 해당하는 오스만의 독립적인 특별구역인 ‘예루살렘 산자크'(Mutasarrifate of Jerusalem)에 대해선 일말의 요구가 없었는데, 이를통해 그는 자신이 구상하는 아랍왕국의 최남단 끝이 베이루트 빌라예트까지 이며 팔레스타인에 대해선 아랍의 영유권을 처음부터 주장하지 않았음이 비로서 명확해진다.[36][37]
1. Vilayets of Mersina and Adana: we renounce our insistence on the inclusion
(메시나와 아다나 빌라예트에 대해: 우리는 이 영토에 대한 주장을 포기합니다)
2. Two Vilayets of Aleppo and Beirut and their seacoasts: refusing the exclusion since they are purely Arab Vilayets, and there is no difference between a Moslem and a Christian Arab
(알레포와 베이루트 빌라예트 및 그들의 해안가에 대해: 이곳은 순수한 아랍의 빌라예트이며, 무슬림과 기독교계 아랍인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기 때문에 배제를 거부합니다.)
― 1915년 11월15일 후세인이 맥마흔에 보낸 편지
더더욱 확실한 증거는 아랍의 국경을 논의하기 위해 하심가의 아들이 아랍 대표로서 참가한 20세 초 파리평화회담 기록에서도 나타나는데, 국제연맹의 회의록 기록에 따르면 여기서도 하심가는 팔레스타인에 관해 “팔레스타인이 가진 만국적인 성격으로 인해 다양한 이해당사자들을 고려할 때, 이지역은 특별히 제외하고 아랍의 영토를 요구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38] 결국 파리 평화회담 및 후세인의 11월15일자 편지기록 이라는 객관적이고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1차 자료가 존재함에도, 이런 역사적 사실을 배제하고 20세기 오스만 지도만을 보고 개인의 단순한 추측을 통해 해당지역을 산자크 (sanjak)라고 말하는 것은 터무니 없는 해석이다. 근래 이스라엘과 주변국의 관계는 수니파의 수장국인 사우디가 이스라엘이 유대인의 영토임을 인정하고 # , '이집트, 요르단, UAE, 바레인' 등과도 평화협정 체결 및 합동 군사훈련을 하는 등 관계는 과거에 비해 크게 개선된 편이다. 그러나 팔레스타인과의 관계는 아직도 요원한 상태이다.
- 비르 타윌 - 영국이 그은 경계선으로 인해 갈등이 초래됐다.(출처: 한국일보)
- 폰티악 전쟁과 세균전 시도 - 프랑스와의 7년전쟁을 통한 재정고갈로 당시 영군군 장군 제프리 애머스트는 그동안 인디언에게 제공하던 선물제공과 사냥을 위해 필요한 탄약과 화약의 판매량을 줄였다. 이를 계기로 평소 애머스트의 강압적인 태도에 불만을 품던 인디언들은 1763년 5월 다수의 영국인 정착지와 요새를 공격해 정착민을 살해하기 시작했다. 이로인해 피트 (Pitt) 요새 역시 500명의 피난민들이 생존을 위해 몰려들었고 인디언들에게 포위되어 점점 고립되어 갔는데, 이런 절박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수비대는 인디언 협상 대표에게 600개의 식량과 함께 천연두에 감염된 담요 2개를 제공했다.[39] 그러나 이 작전이 성공했는지는 미지수인데, 천연두는 이미 현지에서 10년주기로 이전부터 유행하고 있었으며, 오히려 반대로 인디언들에 의해서 수비대가 천연두에 감염됐다는 기록이 다수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후대 연구결과에 의하면 이러한 방식에 의한 전파는 과학적으로 효과가 거의 없음이 밝혀졌다. 다만 애머스트의 편지와 어록에 비추어 보면 당시 그가 인디언들을 적대하며 극도로 증오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 해충들은 인간의 권리에 관한 모든 것을 박탈당했다."(1763년 6월 25일, 부켓 대령에게)결국 폰티악 전쟁으로 약400명의 영국군 병사가 전사했고, 50명은 체포된 후 고문으로 죽었다. 이 밖에 2,000명의 민간인 정착민들이 여성, 어린이를 할 것 없이 인디언에 의해 무차별적으로 살해되었다. 인디언의 경우 약200여명이 전투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나는 어떠한 야만족이라도 죽일 수 있는 자유를 주고 싶다."(1763년 6월 25일, 부켓 대령에게)
"인디언 부락 전체를 근절하기 위한 모든 조치를 취할 것입니다."(1763년 7월 9일 북미 인디언 관리부장 윌리엄 존슨 경에게)
"그들을 근절하는 것은 속죄의 대상이 아닙니다."(1763년 8월 7일 인디언 문제 담당부 대리인 조지 크로한에게)
"그들의 존재[40] 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중단이 될 것입니다."(1763년 8월 27일, 윌리엄 존슨 경에게)
- 윈스턴 처칠 치하의 벵골 대기근에 대한 비판 - 벵골 대기근에 대한 대처가 형편없었던 것은 영국의 실책이 맞긴 하지만 애초에 인도의 내정은 1935년 인도정부법에 의해 영국령 캐나다, 호주와 같이 인도 현지 자치정부에게 이미 이양된 상태였으며, 2차 대전으로 인해 당시 영국 역시 보급제 시행에 미국에게 식량을 의존받던 상태란 걸 감안해야 한다. 또 기근을 처칠이 의도적으로 일으켰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는 음모론이다.[41] , 국내외 웹에서 떠도는 벵골 대기근 당시 "처칠이 간디는 왜 안 죽었냐"라고 한 건 많이 와전된 말이다. [42]
- 윈스턴 처칠 치하의 쿠르드족 학살 연루 관련 비판 - 물론 쿠르드족은 무장봉기를 일으켰을 때 인명 살상을 줄이기 위해 최루가스를 쓰는 것이 어떻느냐고 제안한 것이 독가스를 쓰자고 주장했다며 루머로 와전된 것이다. 자세한 사항은 해당 문서로.
- 메르 엘 케비르 해군기지 전투 - 제2차 세계 대전 도중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게 점령당하고 독일이 세운 꼭두각시 괴뢰정권인 비시 프랑스 정권이 들어서자, 당시 세계 4위의 해군력을 자랑하던 프랑스 해군이 독일의 수중으로 들어갈 것을 우려한 영국 해군은 북아프리카에 있는 프랑스의 메르 엘 케비르 해군기지에 찾아가 프랑스 함대를 영국의 구금하에 두거나 독일의 손이 닿지 않는 프랑스령 서인도 제도로 옮길 것을 요구했다. 그러자 당시 프랑스 해군의 총사령관이자 향후 비시 프랑스 정권의 부통령까지 올랐다 암살당한 프랑수아 다를랑은 이를 계속 거부했는데, 결국 영국 전함의 공격으로 프랑스 해군 군함 4척이 격침당하고 프랑스군 1,500명이 전사했다.
이에 대해 프랑스 입장에선 분노할 수 있으나, 당시 프랑스 해군은 여전히 비시 프랑스의 명령 하에 있었다. 특히 실제 리슐리외급 2번함 장 바르는 비시 프랑스 편에 서서 횃불 작전때 미 해군과 포격전도 벌였다는 점, 당시 독일은 프랑스의 막강한 육군, 공군 전력을 노획하며 프랑스의 항구까지 마음대로 사용하고 있었다는 점, 촉각을 다투는 상황에서 프랑스 해군은 연합국에 붙을지 아님 비시 프랑스에 붙어 한자리를 할까하는 계산만 하고 앉았으니, 당시 영국으로서는 최악의 변수부터 제거할 수 밖에 없었던 사정 등을 모두 고려해야 한다. 일설 #에는 영국 해군이 오기전에 미리 미국으로 도주하기 위해 항해중이던 리슐리외급 전함도 격침시키기 위해 영국 함대가 추격을 실시했다고 말하고 있으나, 애시당초 그런 사실이 전혀 없다. 1942년 연합국이 북아프리카를 점령한 후, 미 해군이 현대화를 위해 노획한 리슐리외급 전함을 미국으로 가져가 개장해 쓴 게 전부일 뿐이다. # 이는 한때 정설처럼 퍼진 처칠의 벵골 대기근 루머 때처럼, 지엽적인 세계사에 대해 아무런 교차검증 없이 온갖 찌라시가 난무하는 국내 커뮤니티에 역사를 의존할때 나타나는 오류로서, 애초에 국내 커뮤니티에서만 퍼진 신뢰성이 없는 주장일뿐이다.
- 카렌족 - '앵글로-버마 전쟁'에서 버마족에 적대적이었던 카렌족은 영국군을 도와 승리에 기여했는데, 영국은 버마 통치 기간 동안 카렌족을 우대하는 정책을 펼쳤다. 카렌족의 기독교 개종 활동은 1813년 미국인 선교사를 통해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버마족이 점령한 지역에서 카렌족은 미국 침례교가 설립한 학교에서 교육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고 고문과 살해를 당하는 등의 차별 대우가 심각했는데, 이 때문에 복수심을 가진 카렌족들은 영국과 동맹을 맺고 1886년 버마를 완전히 장악하도록 도왔다. 카렌족의 약 20%는 기독교인이고 75%는 불교도인데, 영국은 이 중에서도 특히 자신들 입맛을 잘 맞춰 주는 기독교계 카렌족을 우대하는 정책을 펼쳤다. 이 때문에 2차 세계대전 때나 미얀마의 독립 이후로도 미얀마군과 대립하던 같은 카렌족 중에서도 불교도와 기독교도들이 서로를 견제하거나, 혹은 불교도가 미얀마 정부를 지지하여 기독교를 믿는 동족들을 공격하는 등의 혼란한 상황도 일어났다. 다만 카렌족이라는 분류는 19세기 영국과 미국인에 의해서 붙여진 개념으로서, 본질적으로 서로 같은 부류의 그룹이 아니었고 따라서 카렌의 다른 그룹들은 버마족이나 영국의 식민지 이전에는 같은 역사를 공유하지 않았다.[43] 독립 직후만 해도 정부와 군에는 상당수의 카렌족 출신이 있었는데, 네 윈이 쿠데타로 버마족의 군 수뇌부로 등장하면서 노골적으로 카렌족을 제거하기 시작했고, 이는 1949년 카렌민족연합(KNU: Karen National Union)의 주도 아래 일으킨 무장 봉기의 계기가 되었다.
- 로힝야 - 미얀마를 식민지배하면서 벵골인들을 데려와 친영파 중간계층으로 써먹었다. 1942년 2차 세계대전 당시에 로힝야족은 하라는 대일본전쟁은 안하고 아라칸인 학살을 저질렀고, 아라칸족 역시 일본군의 힘을 빌려 보복으로 학살을 저지르며 감정의 골이 더욱 악화되었다. 이들은 미얀마 독립 후 세계에서 가장 박해받는 민족집단이 되어 끝없는 갈등을 이어가고 있다. 다만 먼저 영국령 인도를 침공하여 민간인 학살과 약탈을 하여 시비를 건 쪽은 영국이 아닌 다름아닌 버마족이었고 수십년 간의 전쟁을 통해 영국 동인도 회사를 괴롭힌 장본인도 버마족이었다. 당시 버마 왕국은 팽창주의로서 영토를 확장하며 주변국을 침공하고 다녔는데, 엄밀히 말하자면 미얀마의 인도계, 중국계 인구 탄압 정책은 캄보디아의 폴 포트의 중국인과 베트남인 학살과 대동소이한 정책으로 옹호할 여지가 없는 짓이다. 그리고 독립 후 로힝야족을 같은 시민으로 인정하겠다는 조약을 군부가 쿠데타로 들어선 후 일방적으로 파기한 것 역시 감안해야 한다. 군부세력은 수십년간 독재를 하며 미얀마 경제를 타락으로 빠뜨렸는데 이것을 정당화 하기 위해 버마족 민족주의를 노골적으로 내세우며 로힝야족이나 타 민족을 탄압하는 성격이 있다. 최근 미얀마 사태에선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같은 버마족 시위대마저도 잔인하게 탄압했다.
- 카슈미르 분쟁 - 포스트모더니즘 사관에서 카슈미르 분쟁의 원인을 영국령 인도 제국에서 찾기는 하는데, 굳이 영국이 개입 안했더라도 카슈미르가 힌두교도의 성지인 이유로 싸움이 날 수 밖에 없었다. 인도가 독립한 시점에서 기존 토후국들은 인도 연방에 속할지 떠날지 결정해야 했는데 전통적으로 카슈미르의 인구 중 1/3은 힌두교도이고 2/3는 무슬림이었는데 전체 인구 1/3에 해당하는 힌두교도들의 입지가 훨씬 강했다. 이 때문에 힌두교도인 카슈미르의 번왕은 아예 카슈미르의 독립을 선언했는데, 이에 파키스탄이 카슈미르로 민병대를 파견하고 번왕이 인도에 지원을 요청하며 분쟁이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카슈미르인 문서로.
- 듀랜드 라인 - 현재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국경이 결정된 사건. 당시 아프간은 두라니 왕조때 부터 내부 확장정책과 외침으로 시시각각 국경이 변하고 있었는데, 당시 영국은 아프가니스탄의 군주이던 "압둘 라흐만 칸"과 명확하지 않는 영국령 인도와 아프가니스탄의 사이의 국경을 확정하기 위해 2년동안 국경 근처에서 합동조사단을 꾸려 협상을 통해 1,287㎞ 길이의 국경을 설정했다. 이로 인해 당시 넓게 분포했던 파슈툰족이 두 쪽으로 갈라져 다수가 영국령 인도로 귀속되었다. 후일 이 지역이 파키스탄이 되었는데 '북서 국경 주'(North-West Frontier Province - 현재 카이베르파크툰크와 주)를 위주로 파슈툰 분리주의가 자리잡게 되었다. 이로인해 아프간은 스와트, 치트랄 등의 영토를 잃었으나 반대로 역사적으로 통치한 적이 없는 누리스탄, 와칸, 이스마르 영토를 얻었다. 1970~1980년대엔 아프가니스탄에 친소정권이 들어서며 미국이 이를 견제하기 위해 사우디와 함께 탈레반을 양성했고 아프간 탈레반 유입의 주요통로가 되었다.
- 베를린 회담에서 아프리카의 문화적, 자연적 국경을 완전히 무시한, 자기들 편한 기준대로 직선 쭉쭉 긋는 식의 국경 지정으로 아프리카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종족 간 내전과 분쟁 등 정정불안의 단초를 제공했다. 이것도 영국이 적극 가담한 것은 맞긴 한데, 책임 소재를 자세히 따져 보면 영국만 잘못한 것은 아니고 오히려 이 회담을 주도한 주범은 회담의 명칭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당시 독일의 수상이었던 오토 폰 비스마르크였다. 이외에도 프랑스, 벨기에 등의 열강들 또한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 빅토리아 호 - 외래종인 나일농어를 빅토리아 호에 풀어놓아 호수 토종어류 감소를 조장하였다. 다만 영국이 처음 나일농어를 풀었다는 통설과는 다르게 누가 처음 나일농어를 풀었는지는 불분명한데, 1950년대에 우간다를 통해 처음 유입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미 나일농어가 호수에서 잡히며 존재했기 때문에 이후 별다른 반대없이 1960년대 식민당국을 통해 추가도입이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당시 빅토리아 호수는 급증하는 현지인구와 무분별한 어장 포획으로 인해 이미 심각한 문제가 있었으며, 나일농어 뿐만 아니라 남획과 개간을 위한 농수 확보로 인한 호수 면적 저하, 환경오염 등 복합적인 요소가 작용하였다. 또한 나일농어는 환경적인 측면에서는 분명 부정적이었으나 반대로 수백만명의 직간접적인 일자리와 빅토리아 호수 주변 3개국의 수출경제에 효자노릇을 하였다.
- 토끼전쟁 - 1859년 영국에서 영국령 호주로 이주한 토마스 오스틴(Thomas Austin, 1815~1871)이라는 사업가이자 농업인인 그가 사냥용으로 푼 토끼 24마리가 원래 정착해 있던 토끼들과 결합해 경이로운 번식률로 생태계를 뒤흔들기 시작했다. 오스틴은 사냥용으로 쓰기 위해 발빠른 야생 토끼들을 주문했는데, 조카가 충분한 숫자를 조달 못해 번식이 굉장히 빠르고 튼튼한 집토끼를 섞어서 보냈다. 토끼는 일반 대륙과 달리 천적이 적은 호주에서 어마어마하게 번식하였고[44] , 지나간 자리를 초토화시켜버리는 바람에 호주에서만 서식하는 토착종의 개체수가 눈에 띄게 감소했다. 호주정부는 소탕전, 세균전 등 별의 별 조치를 다 취했지만 그때만 반짝 줄어들고 곧이어 무서울 정도의 번식력으로 개채수를 회복했다. 다만 제2차 세계 대전 때는 식량난 해소에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45]
- 산업혁명 - 초기 산업혁명 과정에서 주로 농업에 종사하던 국민들은 돈을 벌기 위해 최악의 근로 환경에 노출되었고 특히 아이들의 경우는 더욱 처참했다. 결국 국민들은 해외 식민지로 도피하거나 남은 이들은 러다이트 운동을 벌였다. 사실 시간이 달랐을 뿐 산업화에 성공한 전세계의 대부분의 국가들은 비슷한 과정을 겪었다. 이는 초기 자본주의 병폐로서 아담 스미스 이후 정부의 시장개입을 최소화 하던 것이 미덕인 것이 당시 세계의 시대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영국은 아시아, 아프리카 같은 제3세계는 말할것도 없고 가장 잘 살던 서유럽에서도 네덜란드와 함께 가장 높은 소득을 자랑했는데, 각종 사회 개혁을 통해 꾸준히 사회를 안정시켰기 때문이다.
- 아이슬란드와의 대구 전쟁 - 영국은 과거 때부터 아이슬란드 근처 바다에서 대구 조업을 했는데 1944년 덴마크로 부터 독립한 아이슬란드가 기존 1901년 '앵글로-덴마크 영해 협정'에서 인정한 상호간 3해리 영해를 인정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12해리를 주장하며 외국어선을 배제하자 영국은 군함을 파견시켜 자국어선 호위를 하였고 조업을 이어갔다.[46] 이에 아이슬란드가 항의차원에서 군함과 실탄위협 사격을 통해 대응 및 영국과 단교하거나 나토에서 탈퇴한다고 경고했고 심지어 소련에서 군함 사와서 한판 시원하게 붙어보자는 조치를 취했다. 결국 영국 역시 실익이 크지 않다고 판단하여 물러섰고 아이슬란드의 승리로 끝났다. 다만 2차 대구전쟁은 아이슬란드가 1차 대구전쟁 이후 영국과 맺은 12해리와 국제사법소에 의한 분쟁해결 해결합의 조약을 일방적으로 무시하고 50해리를 주장한 것과, 당시엔 영해나 베타적 경제수역에 기준이 현재보다 훨씬 협소하고 모호했던 것을 감안해야 한다.[47]
- 케냐 식민지 독립 탄압 - 1950년대 영국령이었던 케냐의 독립 투쟁 단체 마우마우에서 1963년 독립을 이루기까지 무장독립투쟁을 펼치면서 각종 고문, 무장 진압 등 영국의 탄압을 받았다. 이때 영국이 저지른 만행들은 수십년간 외교부가 비밀리에 보관해오던 과거 마우마우 가담자 탄압 기록물의 영국 법원의 명령에 공개되면서 이뤄졌는데 비밀문건에 따르면 식민 통치에서 마우마우 조직원을 대상으로 한 영국 정부의 폭행, 구금, 학살 등의 범죄행위를 당시 영국 총리도 인지하고 있었다. 다만, 당시 마우마우라는 급진적인 무장단체는 정작 케냐 국민으로 부터 지지를 받지 못했는데, 유럽인 농장주 학살이나 충성서약을 거부하는 현지인들을 여성과, 아이를 가리지 않고 학살과 고문을 자행했기 때문이었다.[48] 때문에 마우마우의 공격으로 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현지인으로 구성된 경비대가 조직되었고 이후 영국군에 편입이 되어, 마우마우 군인들을 색출하고 심문하는 임무를 맡겼는데 이 과정에서 가학행위가 발생한 것이었다. 이에대해 2013년 영국정부는 공식적인 사과를 하고 피해자들에 대한 법적인 배상판결이 이루어졌다.# #
- 안다만 제도 원주민과의 충돌.
- 말라야 비상사태 - 영국군 해병대가 말라야 공산당 게릴라의 목을 잘라 들고 사진찍고 다니는 등, 도를 넘는 진압이 있었다.
- 나이지리아의 비아프라 전쟁의 원인을 영국 식민 지배로부터 찾는 경우도 있는데, 원래 비아프라 지역에서 살던 이그보족은 영국 식민지 시기에 영국이 친영파로 육성하여 나이지리아 국민 다수의 하우사족, 요루바족 같은 다수 민족들을 억압해온 것도 사실이지만 영국 지배 이전 이웃 부족들에게 일방적으로 침략과 노예 사냥을 당하던 피해자의 입장이었다. 비아프라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은 나이지리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요루바, 하우사족들이 부족주의 정치로 이그보족을 따돌리면서 정작 이그보족 거주지의 유전 개발 이익은 빼돌린데 있다. 자세한 내용은 영국-나이지리아 관계 문서로.
- 중화민국의 유엔 상임이사국 자격 박탈과 유엔 탈퇴(유엔 총회 결의 제2758호) - 영국 혼자서 벌인 일은 아니지만, 캐나다, 프랑스, 네덜란드, 이탈리아, 인도 등 전세계 76개 국가들과 함께 안건 가결에 표를 던져 자유주의 진영인 중화민국의 상임이사국 지위 박탈에 찬성하여 2차 세계대전 당시 동맹이었던 중화민국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49] 그 결과 상임이사국 자리의 주인이 중화민국에서 중화인민공화국(중국)으로 바뀌면서 21세기에 들어서도 중국, 러시아가 각종 안보이사회를 부결시키는 원인이 되었고, 중화민국 입장에서도 미국-대만 상호방위조약이 파기되고 외교적으로 상당한 악영향을 끼쳤다. 다만 당시 중소관계가 경색되어 중국이 독자 노선을 타면서 미중관계가 급호전된 분위기였으며, 장제스 체제의 중화민국이 부패와 독재 외에도 ‘본토 수복’을 위한 무력 도발 등으로 동북아 안정을 위협하고 있었던 때라서 이를 고려할 필요는 있다.
- 세포이 항쟁 당시 인도인 학살과 처형
동인도 회사의 경비절감을 위한 세포이들의 퇴직 연금 지급을 중단·축소에 대한 반발과 앤필드 소총 탄약에 종교적으로 민감한 소와 돼지기름이 문혀 있다는 루머를 기점으로 발생한 사건. 이로 인해 영국군은 군법에 따라 반역을 일으킨 세포이들을 교수형·총살형 등으로 처형했는데 그 중 수십명을 대포를 이용하여 잔인하게 처형시켰다.#[50]
다만, 대포를 통한 반역자 처벌방식은 영국이 인도에 처음 도입한 것은 아니고, 16세기 포르투갈 제국 식민지와 무굴제국을 거치며 수백년간 인도에서 집행되던 전통적인 처벌방식을 유지한 것에 가까웠다. 마찬가지로 소와 돼지기름 루머 역시도 단순 루머에 가까웠는데, 이에 따라 1857년 1월 27일 영국군 리처드 버치 (Richard Birch) 대령은 이러한 소란을 잠재우기 위해 세포이가 원하대로 혼합물을 사용하여 스스로 기름칠할 수 있도록 명령했고 카트리지 역시도 입이 아닌 손으로 찢일 수 있도록 장전 드릴을 수정했지만, 세포이들 사이에서 루머는 끊이지 않고 계속 재생산되어 확산되어 갔다.[51]
다만, 대포를 통한 반역자 처벌방식은 영국이 인도에 처음 도입한 것은 아니고, 16세기 포르투갈 제국 식민지와 무굴제국을 거치며 수백년간 인도에서 집행되던 전통적인 처벌방식을 유지한 것에 가까웠다. 마찬가지로 소와 돼지기름 루머 역시도 단순 루머에 가까웠는데, 이에 따라 1857년 1월 27일 영국군 리처드 버치 (Richard Birch) 대령은 이러한 소란을 잠재우기 위해 세포이가 원하대로 혼합물을 사용하여 스스로 기름칠할 수 있도록 명령했고 카트리지 역시도 입이 아닌 손으로 찢일 수 있도록 장전 드릴을 수정했지만, 세포이들 사이에서 루머는 끊이지 않고 계속 재생산되어 확산되어 갔다.[51]
- 차고스 제도 원주민 강제 이주(1967~1973) - 1968년 미군기지 건설을 위한 미국의 요청으로 차고스 군도의 원주민을 강주이주 시켰다. 이에 1972년 영국정부는 모리셔스로 이주한 426명에게 보상금으로 65만 파운드를 제공했다. 이 돈은 원주민들에게 직접 지불하기로 합의되어 모리셔스 정부에 전달되었지만, 모리셔스 정부는 1978년까지 지급을 보류했다. 이에 영국은 섬 주민들의 소송에 대응하여 400만 파운드를 추가로 기부하였고# 이 돈은 다시 모리셔스 정부에 인계되어 1982년과 1987년 사이 일련의 지출로 분배되었다.
- 식민지 출신 유색인종 영국군 전사자들에 대한 인종차별# - 아프리카 및 중동ㆍ아시아 출신 전사자들이 불평등한 대접을 받은 인종차별. 영국 언론 가디언은 "전사한 모든 군인은 무덤 위에 비석을 설치하거나 실종자 추모비에 이름을 남겨야 하지만 백인과 달리 유색인종 전사자들은 공식적으로 기념되지 않았다"고 전했다. 최소 11만 6,000만명, 많게는 35만 명이 이런 차별대우를 받은 것으로 조사됐으며 또 유럽 전선 전사자에겐 개별 묘지 혜택이 주어진 반면 유색인종 전사자들은 기념관 서류에 등재되는 게 고작이었다. CGWC의 전신인 제국전쟁묘지위원회(IWGC)는 식민지 출신 전사자들을 매장할 묘역을 조성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최근 영국 국방장관 벤 월러스(정치인)은 공식사과와 함께 디지털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이름 부족을 설명하는 명판을 기념비에 추가하기 시작했다. #
- 뮌헨 협정 - 일명 서구의 배신(Western Betrayal)이라고도 부른다. 프랑스는 로카르노 조약에 의해 체코의 군사 동맹국으로서 체코가 독일에게 공격받을 시 참전할 의무가 있었지만, 영국은 그런 의무가 없었는데 프랑스는 독일에 대항하기 위해 당시 영국의 개입이 절실히 필요했다. 결국 어떻게든 전쟁만은 막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는 뮌헨협정을 통해 체코 주데텐랜드를 일방적으로 독일에 넘겼다.[52]
다만, 당시 체코슬로바키아는 생겨난지 불과 20년밖에 안되는 신생국가로서 주데텐란트는 350만 주민 절대다수가 독일계에 역사적, 언어적, 문화적으로 원래 독일에 가까웠다는 점, 오히려 주민들 의사대로 독립을 허용하는게 베르사유 조약 체계 이후 정립된 민족자결주의에 부합했다는 점[53] , 당시 주데텐랜드는 주민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는 ‘수데텐 독일당’ (SdP)까지 창설되어 히틀러의 지시를 받으며 합병에 찬성했다는 점, 독일과 합병을 위해 실제 주데텐 주민들의 무장봉기까지 일어나 이때 히틀러는 이미 체코의 침공을 지시했다는 점, 당시 연합국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대규모 군축 등을 통해 전쟁준비가 안되어 있었다는 점, 당시엔 미국마저 외교적 고립노선을 고수하며 참전여부가 불분명 했다는 점, 당시는 대공황 시기로서 불과 20년 전만 해도 제1차 세계대전으로 젊은 한세대가 아예 갈려나가 국내 반전여론이 절대다수 였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결과적으로 뮌헨협정은 체코 뿐만 아니라, 현대에도 대표적인 외교실수로 기억된다. 다만 히틀러는 아이러니하게도 패전 당시 자신의 최대 패착을 바로 뮌헨협정을 체결한 것이라고 고백한 바가 있다.
영국과 프랑스는 불명예와 전쟁 사이에서 선택해야 했다. 그들은 불명예를 선택했다. 그리고 그들은 전쟁을 겪을 것이다.
윈스턴 처칠, 1938년
3.3. 개그성 밈인 경우[편집]
- 영국 요리 - 이쪽은 영국 요리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발전을 스스로 가로막으며 제 1세계 국가들 중에서도 가장 요리로 악명이 높은 국가가 된 걸 풍자 및 희화화했다. 당연히 영국인들 모두가 요리치거나 전통적인 영국 요리의 문제점을 자각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서, 영국인 스스로 자학하는 경우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특히 대영제국 시절부터 전세계를 통치하는 수준에서 정작 현지인들의 식문화는 참조도 안 했다며 왜 아직도 맛없냐는 글이 많이 돌아다닌다.
물론 밈과 달리 세계적으로 매우 보편화된 영국 음식도 많다. 대표적인 것이 샌드위치가 있으며, 탄산음료도 1767년 영국인 화학자 '조지프 프리스틀리' (Joseph Priestley,)에 의해 처음 탄생하였다.# 또 우리가 보편적으로 아는 카레인 '커리 파우더'를 세계 최초로 만든 것은 영국 회사 C&B (크로스 앤드 블랙웰)였으며, 감자칩 역시 1817년 영국인 요리사 윌리엄 키치너에 의해서# 처음 탄생됐다. 또 서양에서 고기류와 함께 흔하게 즐겨먹는 우스터 소스, 그레이비 소스나, 세계적으로 즐겨먹는 체다 치즈의 역시 영국 남서부 '체다' (Cheddar) 라는 마을에서 유래됐다. 그외 전 세계 호텔 조식의 표준인 잉글리시 브렉퍼스트나 피시 앤드 칩스, 로스트 디너, 비프 웰링턴, 패스티, 스콘, 파운드 케이크, 잉글리시 머핀, 클로티트 크림 등의 음식이 유명하며, 에일 맥주나 밀크티, 위스키 같은 음료 역시 영국에서 탄생되었다.
- 영포자 - 사실 영어 자체는 다른 유럽 언어들에 비해 그렇게 어려운 편은 아니며 반미 국가를 가도 영어를 사용할 만큼 대중적이다. 그 많은 굴절을 다 외워야 하는 굴절어인 다른 유럽 언어들(특히 러시아어, 폴란드어)과 반대로 고립어라 굴절만큼은 편하게 학습할 수 있다. 다만 영어 발음은 문자 표기가 덴마크어, 아일랜드어와 함께 전 세계에서 악명을 떨치고 있을 정도로 난해하다.[54] 철자와 발음이 불일치하는 경우가 수두룩하여, 단어를 외울 때마다 발음을 별도로 듣고 외워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 야드파운드법 - 통일된 단위의 부재로 인류의 소통을 방해하고 산업과 교육에서 낭비되는 요소가 생기게 한다. SI 단위와 야드파운드에 따른 장비와 부품을 별도로 구매해야 한다. 몇 가지 설계 프로그램만 들어가도 통일된 단위가 없으므로 옵션에서 SI 단위와 야드파운드를 어떻게 표기할지를 다룬 옵션 사항만 한 쪽을 차지할 정도. 이는 인류의 교육에서 낭비일 뿐만 아니라, 도면 작성이나 광고지 제작 등 같은 산업현장과 국가간 교류에서 방해가 된다. 심지어 항공사고까지 야기하고 화성 기후 궤도선을 날려먹었다. 자세한 것은 각각 에어 캐나다 143편 불시착 사건,
대한항공 6316편 추락 사고[55] 화성 기후 궤도선 문서로. 다만 야드파운드법이 영국에서 만들어지긴 했지만 현재 영국은 미터법을 사용하며 오히려 야드파운드법을 고집하면서 국가간 교류에서 많은 불편을 초래하는 나라는 미국이긴 하다.[56]
그렇다고 마냥 밈으로만 치부하기도 어려운 것이, 원래 미국은 독립전쟁 이후, 합리주의와 친프랑스 성향, 영국에서 벗어나기 위해 1793년 경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의 주도로 프랑스로부터 미터법을 도입하려 했다. 하지만 프랑스 과학자 조셉 돔비(Joseph Dombey)가 미터법 원기를 갖고 미국으로 향하던 와중, 그가 탑승한 배가 영국 사략선에 나포당하여 미터법 원기째로 실종되어버리는 통에 미터법 채용이 불발되었다. 조셉 돔비는 그렇게 잡혀간 후 영국령 카리브 식민지에서 죽고 말았다.
- 우핸들 자동차와 좌측통행 - 전세계 국가의 2/3 정도가 좌핸들 자동차와 우측통행으로 도로교통이 표준화되어있는 반면, 나머지 1/3은 우핸들 자동차와 좌측통행으로 표준화되어있는데, 당연히 그 나머지는 영국과 영연방 국가들이 차지한다.[57] 이로 인해 좌핸들 자동차와 우핸들 자동차를 따로 만들어야 하는가 하면 국경을 넘자마자 방향이 반대로 바뀌는 교통시스템 때문에 통일성 저해에 따른 불편함은 물론이고 사고를 유발할 위험성도 존재한다.
4. 반례 (긍정적인 사례)[편집]
반면 영국이 세계사에 긍정적인 기여를 많이 한 것은 사실이다. 세계 최초/외국의 경우 항목을 보기만 해도, 고대 이전이라면 이집트, 중세 이전이라면 중국, 근대 이후에 인류 역사에서 가장 필요한 물건의 발명은 영국과 미국, 독일이 대부분 했을 정도. 몇몇 아래의 서술은 혹자에 따라 식민지에 대한 옹호로서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홍콩, 싱가포르, 인도 등 식민지 관계 및 인식은 나라마다 각기 상이하며, 실제 공과사를 모두 인정하는 역사관을 가진 나라도 상당하다.[58] 따라서 이를 어떻게 바라보는가는 나라마다 별개의 차원에서 접근해야 하며, 이를 한일관계에 그대로 동치시켜 단지 식민지였다고 하여 모든 것을 부정만 할 수 있는 성격은 아니다.
- 노예무역 폐지 - 영국 역시 과거 대서양 노예무역에 적극 가담하긴 했으나 15세기 포르투갈 이후 성행했던 노예무역을 덴마크 다음 2번째, 강대국 중 최초인 1807년에 금지시켰다.[59] 1808년에서 1860년 사이에 영국 서아프리카 함대는 노예선 1,600여 척을 나포하여 아프리카인 15만명을 해방시켰다. 또 노예무역 금지에 대한 조약을 체결하는 데 거부하는 다른 국가들에게도 영향력을 행사해, 50명이 넘는 아프리카 통치자들이 “反노예제 조약”을 체결하고, 비엔나 회의와 파리 조약(1815) 등을 통해 다른 유럽 국가들에게도 외교적 압박을 가하여 공식적으로 노예제도를 규탄하고 무역을 폐지하도록 촉구했다.
또한 1833년 노예해방법을 통과하여 영국령 농장주들에게 당시 2천만 파운드의 보상금을 지급하여 노예를 해방 시켰고 한때 영국 정부는 이로인해 재정위기까지 갔는데, 이는 1860년대까지 노예문제로 치열한 내전을 벌인 미국과 대조적인 것이었다. 그 이후로도 영국은 일본에서 일어난 마리아 루스 호 사건에 연관되어 반노예무역의 움직임을 이어갔고, 그 여파로 일본에서 인간 취급도 받지 못하던 일본 유녀들에게 예창기해방령이 나타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60] 참고로 1839년 영국에서 설립된 '노예제 반대 협회' (Anti-Slavery Society)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권단체이며, 1833년 영국 정부는 농장주에 대한 보상금을 지급하기 위해 국가예산의 40%를 지출하고 막대한 채권을 발행했는데, 이를 2015년에서나 공식적으로 모두 갚았다고 한다. #
- 자본주의 - 영국의 산업혁명이 이후 세계적으로 널리 퍼진 자본주의는 현대 세계경제의 주류 시스템이 되었다. 물론 초기 자본주의는 극심한 빈부격차 등 병폐도 심했고 가장 이상적인 시스템이라고 볼 수도 없으나, 중세 봉건주의 사회가 근대 자본주의 사회로 넘어감으로써 많은 국가가 경제 및 문화 양면에서 빠르게 성장한 것은 사실이다. 그 유명한 마르크스주의 역시 자본주의의 성과를 아예 부정하고서 자본주의를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귀태로 여기는 개념이 아니라, 초창기 영국의 자본주의 시스템의 성과를 인정하면서 그 병폐에 대한 비판과 대안으로 출발한 개념이다. 자본주의 경험이 없거나 불충분한 현실사회주의 국가의 집권세력이 개발독재를 벌인 명분 역시 "우리는 자본주의를 제대로 경험하지 못했으므로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려면 자본주의 국가의 생산력 수준을 따라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영국에서 탄생한 자본주의 이례 애덤 스미스, 존 메이너드 케인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앨프리드 마셜 같은 학자들이 경제학이란 개념과 이론을 정립시키며 현대 경제시스템의 기반을 만들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