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혐성국 (문단 편집) ===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경우 === * [[거문도 점령 사건]] - 러시아를 견제한다는 명목으로 조선의 영토를 무단 점거한 것 자체는 엄연한 침략이지만 오히려 이 당시 거문도에 주둔한 영국 해군은 거문도 현주민들과의 사이가 굉장히 좋았다. 영국은 비록 무단으로 점령했어도 애초에 러시아 제국의 남하를 견제하기 위해서 왔기 때문에 조선인과 무력충돌을 할 이유가 전무했다. 그렇기에 영국군도 일반적인 조선 지방관[* 다만 당시 거문도는 격오지 취급이라 세금도 안 걷었고, 지방관도 파견되지 않아 지역 유지들에 의해 자치로 운영되었다.]들과 다르게 노동에도 정당한 대가를 지급했고, 의료봉사나 식량 배급도 베풀었으며, 그 외에는 대민마찰을 최대한 피하기 위해 병사와 주민들과의 개인적인 접촉을 엄격하게 금지하였다. 이런 인연 때문에 거문도 주민들은 거문도에 거주하다가 병사 혹은 자연사한 영국군의 묘지를 지난 120년 동안 자발적으로 우수한 상태로 관리해주었는데, 후일 주한 영국대사관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2005년부터 2015년까지 거문도 학생에게 장학금을 수여한 것으로 알려졌다.[[https://www.yna.co.kr/view/AKR20150709129900054|#]] 고로 정부 차원에서는 분명 잘못된 침략 행위였지만, 실제적인 통치는 평화로웠으며 오히려 영국군의 철수 이후 거문도 주민들이 영국의 군정 통치를 그리워한 아이러니한 사례이다. * [[틀:대한제국의 국권피탈과정|일본 제국의 한반도 강제 병합]]에 대한 승인 및 방조 - 영국은 1923년까지 약10년간 존속한 [[영일동맹]]을 통해 일본의 대한제국에 대한 특수한 지위를 인정하였다. 본질적으로 이는 두 [[제국주의]] 국가가 영합하여 약소국의 주권을 멋대로 침탈한 것이므로, 한국과 현대의 시각에서 보자면 이는 비판받아 마땅한 행위이다.[* 미국 역시 조선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맺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어 조선과 필리핀에 대한 미일 양국의 식민지배를 인정하였다.] 다만 당대 영국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는 [[그레이트 게임]] 형국에서 영국 패권의 유지를 위해서는 어느 정도 불가피한 것이기도 하였다. 러시아-프랑스 동맹의 강화와 독일 제국의 팽창이라는 당대 동아시아 안보 질서 속에, 조선이 자신들의 적성국인 [[러시아 제국|러시아]]에 [[아관파천]]으로 영합하는 것은 영국 제국의 극동 안보에 간접적으로 위협적인 변수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다만 고종은 영국과도 좋은 관계를 수립하려고 노력했으나 [[영일동맹]]을 우선시한 영국은 어니스트 사토와 존조던등을 이용해 한국과 거리를 둔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광무개혁]] 역시 친일파 영국 고문 맥 리비 브라운의 트롤링 때문에 고종의 사비로 진행해야했다.] 과도한 군비경쟁으로 인해 유럽에서의 대응만으로도 벅찼던 영국은, 일본과의 공조를 강화함으로써 이에 대응하였다. 때문에 자국 안보를 위해 약소국의 운명을 팔아먹었다는 역사적, 인도적 측면의 비판과는 별개로, [[정치현실주의]]적인 측면에서만 보자면 영국의 행동은 납득 가능한 결과이기도 하다. 물론 당시 이러한 강대국간 이권행위는 분명 잘못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을 보다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외부에 국한된 설명 외에도 [[틀:대한제국의 국권피탈과정]]에서 보듯 가장 중요한 당사자인 [[조선]]의 내부상황 역시 어느정도 고려할 필요가 있는데, 조선 왕가의 엄청난 사치와 부패 등으로 국고는 고갈 되어갔으며 [[https://youtu.be/hvklzYtQLnQ?si=nTrElwaw7RQ-Xx9R|#]] 때문에 병사들의 군료에 모래를 섞어 지급한 것이 발단이 되어 일어난 [[임오군란]]이나 민중들이 들고 일어난 [[동학 농민 혁명]]의 경우 외세의 힘을 빌려 진압하는 등 순전히 내치(內治)에 해당하는 문제까지도 외세에 상당부분 의탁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에 대한 식민지배의 본질적인 책임은 일본의 대륙진출 야욕에 있는 것은 자명하다. * [[수에즈 운하]] - 이집트의 독재자 [[나세르]]가 군부 쿠데타로 집권한 직후 수에즈 운하를 일방적으로 국유화하고 이스라엘 선박의 통행까지도 금지하였다. 문제는 수에즈 운하는 프랑스와 영국의 막대한 자본, 기술을 투자하여 당시 이집트의 군주였던 [[사이드 파샤]]와 합의하에 진행한 사업으로서 이집트 정부와 5:5지분으로 99년의 운영권을 보장받았다는 것이다. 또 당시 나세르는 프랑스-알제리 전쟁에서 반프랑스 게릴라세력 지원과 이스라엘에 대해선 팔레스타인 게릴라를 지원했다. 이에 이미 [[제1차 중동전쟁]]에서 이집트의 침공을 받은 전력이 있는 이스라엘은 이를 우려하였고 이스라엘 군대의 침공을 필두로 영국과 프랑스의 특수부대가 합세하였다. [[수에즈 전쟁]]은 전쟁이며 프랑스, 이스라엘과 짜고 전쟁을 일으킨 것은 그 어떠한 논리를 들고와도 영국의 변명 불가능한 과오이지만 전쟁을 제외한 [[수에즈 운하]] 자체에 대한 갈등은 영국으로서도 어느정도 할 말이 있었던 것이다. * 사이크스-피코 협정 -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이 프랑스와 함께 [[오스만 제국]]이 지배하고 있던 중동 아랍권 지역을 영국령과 프랑스령으로 나눠먹자는 골자의 조약을 맺고, 제1차 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자 영국과 프랑스는 이들 지역들을 보호령, 위임통치령이라는 명분 하에 사실상 식민지화 하였다. 이 과정에서 자국 군인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를 통수친것은 덤이다. 이것으로 현지 종교, 민족, 역사를 고려하지 않아 현재 중동의 분쟁의 원인이 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 사이크스 조약은 그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단지 레반트의 남북을 A, B지역으로 나눠 영국과 프랑스가 일정기간 통치하기로한 밀약에 불과했고, 현재 중동의 세부적인 국경은 오스만 제국때의 행정구역과 현지 지도자의 협상과 전쟁등을 통해 결정됐다. 또 매우 복잡한 현재 중동의 분쟁과 정세를 모두 100년 전 사이크스 피크로 귀인하는 것은 상당한 비약으로서, 고대때 부터 분쟁이 끊이질 않았던 중동의 역사적 배경, 19세기 중후반 부터 '유럽의 환자'라 불리며 각종 외세의 외침과 내부반란으로 대혼란을 겪고 있던 당시 오스만의 정세를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 당대 중동은 부족주의가 더 강했다. 민족 개념이 뿌리박은 것은 이 이후이다. * [[맥마흔 선언]] - 영국이 제1차 세계 대전 승리를 위해 유대-아랍측과 이중계약을 했다고 알려진 서한이다. 이에 대해선 매우 복잡하게 들어가야 하는데, 당시 아랍의 지도자 후세인과 맥마흔이 교환한 서신 원문[[https://namu.wiki/w/%ED%8C%8C%EC%9D%BC:%EB%A7%A5%EB%A7%88%ED%9D%94-%ED%9B%84%EC%84%B8%EC%9D%B8%20%EC%84%9C%ED%95%9C.jpg|#]]을 보면 레반트의 특정 서부지역은 옛부터 여러 종교와 민족이 함께 살던 지역이므로 '''순수한 아랍의 땅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랍의 영토에서 제외하기로 합의'''를 했다.[* 비슷한 예로 코소보가 있다. 팔레스타인이 순수한 아랍의 땅이 아닌 것처럼 코소보도 순수한 알바니아인의 땅이 아니다.] 맥마흔은 이 지역을 유대인에게 주기로 한 것이었는데, 이후 해석의 모호성으로 인해 이 지역이 팔레스타인이냐 아니냐를 두고 문제가 되었다. 또 20세기 초만 해도 과거 팔레스타인은 현재의 요르단을 포함한 지금보다 훨씬 더 큰 땅이었는데[[https://www.jewishvirtuallibrary.org/images/mandate1.gif/|#]] 1차대전 이후 레반트 관할은 UN의 전신인 국제연맹(The League of Nations)에 이관이 되었고,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따라 ‘시리아, 이라크, 요르단’에 대한 아랍의 자결권이 인정받았듯이 ① 마찬가지로 팔레스타인내 ‘아랍, 비아랍계’ 인구비를 고려해 70%에 해당하는 동쪽 팔레스타인(현재의 요르단)은 아랍측의 영토로.. ② 나머지 30%에 해당하는 서쪽 팔레스타인은 유대인의 국가를 설립할 수 있는 합법적인 국제법상 권리가 국제연맹 51개국 회원국 만장일치로 인정받고 있던 실정이었다.[[https://www.loc.gov/item/2021666887/|#]] 이러한 결정에도 불구하고 이후 아랍측은 나머지 30%에 해당하는 서쪽 팔레스타인에 대한 영유권 마저 주장하며 충돌이 일어났는데, 당시 위임령 팔레스타인에 대한 신탁관리자의 지위에 있던 영국은 이를 중재하기 위해 1937년 아랍측에 훨씬 유리한 조건을 제시했으나 아랍측은 이를 거부했다. 이후 충돌이 심해지자 2차대전 이후 상황이 어려웠던 영국은 결국 이 문제를 다시 UN에 회부하였고, 1947년 UN 중재안이 나왔으나 아랍측은 이를 또다시 거부하였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언하자 바로 주변 아랍국들은 연합을 맺고 이스라엘에 전쟁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중동전쟁]]이다. 맥마흔-후세인 서신에서 쟁점이 되는 것은 1915년 10월24일에 양측간 합의한 다음 문장이다. >Portions of Syria lying to the west of the districts of Damascus, Hama, Homs and Aleppo cannot be said to be purely Arab, and should be excluded from the proposed limits and boundaries. (다마스커스, 하마, 홈스 그리고 알레포 구역의 서쪽에 위치한 시리아의 일부는 순수한 아랍지역이라고 할 수 없으며, 요구한 경계에서 제외되어야 한다.) 여기서 국내 일부는 1915년의 시점의 오스만의 지도만을 보고 추측을 통해 당시 레반트 지역의 빌라예트 (vilayet)는 ‘알레포와 다마스쿠스, 베이루트, 데이르에조르’ 4개밖에 존재하지 않았고, 따라서 ‘홈스와 하마’는 그보다 하위의 행정구역인 '''산자크'''(sanjak) 밖에 없었으므로, Districts는 모두 산작크에 해당하며 따라서 팔레스타인은 제외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1915년 10월24일 이후에도 계속 이어지는 맥마흔과 후세인의 교신내용에 대한 객관적인 1차자료를 고려하지 않은 것으로서, 이에 대한 명확한 해답은 '''1915년 11월15일''' 후세인이 맥마흔에게 자신이 진정으로 구상하는 아랍 왕국의 영토가 어디까지인지를 보낸 서신 원문에서 드러난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오스만지도.png|width=100%]]}}}|| >{{{#!wiki style="text-align:center" (1914년 오스만 제국의 베이루트 빌라예트와 예루살렘 산자크의 범위)}}} >---- >1. Vilayets of Mersina and Adana: we renounce our insistence on the inclusion > ('''메시나와 아다나 빌라예트'''에 대해: 우리는 이 영토에 대한 주장을 포기합니다) > > 2. Two Vilayets of Aleppo and Beirut and their seacoasts: refusing the exclusion since they are purely Arab Vilayets, and there is no difference between a Moslem and a Christian Arab > ('''알레포와 베이루트 빌라예트 및 그들의 해안가'''에 대해: 이곳은 순수한 아랍의 빌라예트이며, 무슬림과 기독교계 아랍인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기 때문에 배제를 거부합니다.) >---- >― 1915년 11월15일 후세인이 맥마흔에 보낸 편지 원문을 보면 후세인은 자신이 구상하는 아랍왕국이 기본적으로 빌라예트를 기초로 계획 했음을 알 수 있는데[* 심지어 그 조차 ‘아다나 빌라예트’의 산자크에 불과한 ‘메시나’를 빌라예트로 표현하는 등 엄격한 구분을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는 1) ‘알레포와 베이루트 빌라예트 및 그들의 해안가 지역’은 아랍의 땅이라며 배제를 완강히 거부한 반면, 2) 팔레스타인(현재 이스라엘)에 해당하는 오스만의 독립적인 특별구역인 ‘'''예루살렘 산자크''''(Mutasarrifate of Jerusalem)에 대해선 일말의 요구가 없었는데, 이를통해 그는 자신이 구상하는 아랍왕국의 최남단 끝이 베이루트 빌라예트까지 이며 팔레스타인에 대해선 아랍의 영유권을 처음부터 주장하지 않았음이 비로서 명확해진다.[* 예루살렘 산자크가 오스만제국 시절에도 다른지역과 달리 독립적인 행정구역으로서 특별취급 받은 것도 결국 오래 전부터 여러 민족과 종교인들이 함께 살던 이 지역의 역사적 특수성 때문이었다.][* 만약 혹자의 추측대로 ‘다마스커스, 홈스, 하마, 알레포’를 작은 도시단위인 산자크 (sanjak)로 가정해 이곳을 기준점으로 잡는다면, 그럼 여기서 맥마흔-후세인이 애초에 아랍의 영토에서 제외하기로 서로 합의한 ‘서쪽지역’(West of the districts)은 그럼 어디인지가 물음이 남는데, 이렇게 되면 이 서쪽지역은 “현재 레바논과 시리아 해안가 전역”이 해당되게 된다. [[https://www.researchgate.net/profile/Ekaterini-Malea/publication/311487162/figure/fig3/AS:667646743805953@1536190796149/Location-of-Hama-in-the-map-of-Syria.jpg/|#]] 따라서 이 주장에 따라 이스라엘을 팔레스타인에서 빼더라도 결국 현재 이스라엘은 레바논과 시리아 해안가에 위치해야야 하며, 시리아 역시 바다가 없는 내륙국 상태가 되어야 한다. 1) 또 이 주장은 후세인이 레바논과 시리아 해안가가 속한 ‘베이루트 빌라예트’ (Vlayet of Beirut)를 순수 아랍인들의 영토라며 완강히 제외를 거부한 11월15일자 편지내용에 완전히 자기모순적이 되며, 2) 시리아에 대해선 후세인은 처음부터 바다가 없는 내륙국가를 구상 했다는 건데 상식적으로도 이해하기 힘들며, 3) 그렇다면 아랍측은 반드시 팔레스타인이 아니더라도 어디든 간에 합의본 바에 따라 ‘레반트의 서쪽지역’을 포기해 그 땅을 유대인에게 햘양 했어야 했는데, 그런것도 없이 국제연맹 마저 인정한 서부 팔레스타인 30% 마저도 모두 자신들의 땅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결국 어떻게 보든 약속을 지키지 않은 쪽은 아랍측이라는 소리밖에 되질 않는다.] 더더욱 확실한 증거는 아랍의 국경을 논의하기 위해 하심가의 아들이 아랍 대표로서 참가한 20세 초 파리평화회담 기록에서도 나타나는데, 국제연맹의 회의록 기록에 따르면 여기서도 하심가는 팔레스타인에 관해 “팔레스타인이 가진 만국적인 성격으로 인해 다양한 이해당사자들을 고려할 때, 이지역은 특별히 제외하고 아랍의 영토를 요구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David Hunter Miller: My Diary of the Peace Conference] 결국 파리 평화회담 및 후세인의 11월15일자 편지기록 이라는 객관적이고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1차 자료가 존재함에도, 이런 역사적 사실을 배제하고 20세기 오스만 지도만을 보고 개인의 단순한 추측을 통해 해당지역을 산자크 (sanjak)라고 말하는 것은 터무니 없는 해석이다. 근래 이스라엘과 주변국의 관계는 수니파의 수장국인 사우디가 이스라엘이 유대인의 영토임을 인정하고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80404019014|#]] , '이집트, 요르단, UAE, 바레인' 등과도 평화협정 체결 및 합동 군사훈련을 하는 등 관계는 과거에 비해 크게 개선된 편이다. 그러나 팔레스타인과의 관계는 아직도 요원한 상태이다. * [[비르 타윌]] - 영국이 그은 경계선으로 인해 갈등이 초래됐다.[[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811061601025801|(출처: 한국일보)]] * [[폰티악]] [[전쟁]]과 [[세균전]] 시도 - 프랑스와의 [[7년전쟁]]을 통한 재정고갈로 당시 영군군 장군 [[제프리 애머스트]]는 그동안 인디언에게 제공하던 선물제공과 사냥을 위해 필요한 탄약과 화약의 판매량을 줄였다. 이를 계기로 평소 애머스트의 강압적인 태도에 불만을 품던 인디언들은 1763년 5월 다수의 영국인 정착지와 요새를 공격해 정착민을 살해하기 시작했다. 이로인해 피트 (Pitt) 요새 역시 500명의 피난민들이 생존을 위해 몰려들었고 인디언들에게 포위되어 점점 고립되어 갔는데, 이런 절박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수비대는 인디언 협상 대표에게 600개의 식량과 함께 [[천연두]]에 감염된 담요 2개를 제공했다.[* 단 이것은 제프리 에머스트의 명령이 아니었고, 이를 처음 고안해서 독단적으로 실행한 것은 미국인 민병대 용병인 모피상인 윌리엄 트렌트였다. Ranlet 2000, Knollenberg 1954, Mann 2009] 그러나 이 작전이 성공했는지는 미지수인데, 천연두는 이미 현지에서 10년주기로 이전부터 유행하고 있었으며, 오히려 반대로 인디언들에 의해서 수비대가 천연두에 감염됐다는 기록이 다수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후대 연구결과에 의하면 이러한 방식에 의한 전파는 과학적으로 효과가 거의 없음이 밝혀졌다. 다만 애머스트의 편지와 어록에 비추어 보면 당시 그가 인디언들을 적대하며 극도로 증오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 해충들은 인간의 권리에 관한 모든 것을 박탈당했다."(1763년 6월 25일, 부켓 대령에게) >"나는 어떠한 야만족이라도 죽일 수 있는 자유를 주고 싶다."(1763년 6월 25일, 부켓 대령에게) >"인디언 부락 전체를 근절하기 위한 모든 조치를 취할 것입니다."(1763년 7월 9일 북미 인디언 관리부장 [[윌리엄 존슨]] 경에게) >"그들을 근절하는 것은 속죄의 대상이 아닙니다."(1763년 8월 7일 인디언 문제 담당부 대리인 조지 크로한에게) >"'''그들의 존재'''[* 애머스트 본인이 편지 원문에 강조 표현을 삽입했다.]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중단이 될 것입니다."(1763년 8월 27일, [[윌리엄 존슨]] 경에게) 결국 폰티악 전쟁으로 약400명의 영국군 병사가 전사했고, 50명은 체포된 후 고문으로 죽었다. 이 밖에 2,000명의 민간인 정착민들이 여성, 어린이를 할 것 없이 인디언에 의해 무차별적으로 살해되었다. 인디언의 경우 약200여명이 전투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 [[윈스턴 처칠]] 치하의 [[벵골 대기근]]에 대한 비판 - [[벵골 대기근]]에 대한 대처가 형편없었던 것은 영국의 실책이 맞긴 하지만 애초에 인도의 내정은 1935년 인도정부법에 의해 영국령 캐나다, 호주와 같이 인도 현지 자치정부에게 이미 이양된 상태였으며, 2차 대전으로 인해 당시 영국 역시 보급제 시행에 미국에게 식량을 의존받던 상태란 걸 감안해야 한다. 또 기근을 처칠이 의도적으로 일으켰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는 음모론이다.[* 버마 대공세로 인도가 공격받고 있으며, 이미 일본의 동맹군으로 투신하여 영국령 인도를 공격하는 인도 국민군이 있는 상황에서 의도적으로 학살을 저질러서 영국에 대한 반감을 키울 필요가 없었다.], 국내외 웹에서 떠도는 벵골 대기근 당시 [[https://winstonchurchill.hillsdale.edu/gandhi-wavell/|"처칠이 간디는 왜 안 죽었냐"라고 한 건 많이 와전된 말이다.]] [* 원래는 투옥 되었을 때 건강이 악화되어 풀려났을 당시 건강이 너무 안 좋아 다시는 정치활동을 못할 것이라고 진찰을 받았다. 그런데 이후에도 정치활동을 이어나가자 여기에 대해 대충 "건강이 안 좋아서 정치활동 못할 거라고 풀어줬는데 어떻게 된 거냐?"라고 총독 Archibald Wavell [[아치볼드 웨이벌]]에게 전보를 보낸 거 가지고 나중에 총독이 "처칠은 내가 인도 식량 상황에 대해 어쩌냐고 물은 전보에 대해 대답도 않고 간디 왜 안 죽었냐고 물었다!"라고 왜곡한 것이 많이 와전된 것. "Winston sent me a peevish telegram to ask why Gandhi hadn’t died yet! He has never answered my telegram about food." 처칠이 실제로 보낸 전보는 이렇다: "Surely Mr. Gandhi has made a most remarkable recovery, as he is already able to take an active part in politics. How does this square with the medical reports upon which his release on grounds of ill-health was agreed to by us? In one of these we were told that he would not be able to take any part in politics again."] * [[윈스턴 처칠]] 치하의 [[쿠르드족]] 학살 연루 관련 비판 - 물론 [[쿠르드족]]은 무장봉기를 일으켰을 때 인명 살상을 줄이기 위해 [[최루가스]]를 쓰는 것이 어떻느냐고 제안한 것이 [[독가스]]를 쓰자고 주장했다며 루머로 와전된 것이다. 자세한 사항은 해당 문서로. * 메르 엘 케비르 해군기지 전투 - 제2차 세계 대전 도중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게 점령당하고 독일이 세운 꼭두각시 괴뢰정권인 [[비시 프랑스]] 정권이 들어서자, 당시 세계 4위의 해군력을 자랑하던 프랑스 해군이 독일의 수중으로 들어갈 것을 우려한 [[영국 해군]]은 북아프리카에 있는 프랑스의 메르 엘 케비르 해군기지에 찾아가 프랑스 함대를 영국의 구금하에 두거나 독일의 손이 닿지 않는 프랑스령 [[서인도 제도]]로 옮길 것을 요구했다. 그러자 당시 프랑스 해군의 총사령관이자 향후 비시 프랑스 정권의 부통령까지 올랐다 암살당한 [[프랑수아 다를랑]]은 이를 계속 거부했는데, 결국 영국 전함의 공격으로 프랑스 해군 [[군함]] 4척이 격침당하고 프랑스군 1,500명이 전사했다. 이에 대해 프랑스 입장에선 분노할 수 있으나, 당시 프랑스 해군은 여전히 비시 프랑스의 명령 하에 있었다. 특히 실제 리슐리외급 2번함 장 바르는 비시 프랑스 편에 서서 [[횃불 작전]]때 미 해군과 포격전도 벌였다는 점, 당시 독일은 프랑스의 막강한 육군, 공군 전력을 노획하며 프랑스의 항구까지 마음대로 사용하고 있었다는 점, 촉각을 다투는 상황에서 프랑스 해군은 연합국에 붙을지 아님 비시 프랑스에 붙어 한자리를 할까하는 계산만 하고 앉았으니, 당시 영국으로서는 최악의 변수부터 제거할 수 밖에 없었던 사정 등을 모두 고려해야 한다. '''일설''' [[https://arca.live/b/singbung/64546624?mode=best&p=1|#]]에는 영국 해군이 오기전에 미리 [[미국]]으로 도주하기 위해 항해중이던 [[리슐리외급 전함]]도 격침시키기 위해 [[영국]] 함대가 추격을 실시했다고 말하고 있으나, '''애시당초 그런 사실이 전혀 없다.''' 1942년 연합국이 북아프리카를 점령한 후, 미 해군이 현대화를 위해 노획한 리슐리외급 전함을 미국으로 가져가 개장해 쓴 게 전부일 뿐이다. [[https://en.wikipedia.org/wiki/French_battleship_Richelieu|#]] 이는 한때 정설처럼 퍼진 처칠의 [[벵골 대기근]] 루머 때처럼, 지엽적인 세계사에 대해 아무런 교차검증 없이 온갖 찌라시가 난무하는 국내 커뮤니티에 역사를 의존할때 나타나는 오류로서, 애초에 국내 커뮤니티에서만 퍼진 신뢰성이 없는 주장일뿐이다. * [[카렌족]] - '앵글로-[[미얀마|버마]] 전쟁'에서 [[버마족]]에 적대적이었던 카렌족은 영국군을 도와 승리에 기여했는데, 영국은 버마 통치 기간 동안 카렌족을 우대하는 정책을 펼쳤다. 카렌족의 [[기독교]] 개종 활동은 1813년 미국인 선교사를 통해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버마족이 점령한 지역에서 카렌족은 미국 침례교가 설립한 학교에서 교육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고 고문과 살해를 당하는 등의 차별 대우가 심각했는데, 이 때문에 복수심을 가진 카렌족들은 영국과 동맹을 맺고 1886년 버마를 완전히 장악하도록 도왔다. 카렌족의 약 20%는 기독교인이고 75%는 불교도인데, 영국은 이 중에서도 특히 자신들 입맛을 잘 맞춰 주는 기독교계 카렌족을 우대하는 정책을 펼쳤다. 이 때문에 2차 세계대전 때나 미얀마의 독립 이후로도 미얀마군과 대립하던 같은 카렌족 중에서도 불교도와 기독교도들이 서로를 견제하거나, 혹은 불교도가 미얀마 정부를 지지하여 기독교를 믿는 동족들을 공격하는 등의 혼란한 상황도 일어났다. 다만 카렌족이라는 분류는 19세기 영국과 미국인에 의해서 붙여진 개념으로서, 본질적으로 서로 같은 부류의 그룹이 아니었고 따라서 카렌의 다른 그룹들은 버마족이나 영국의 식민지 이전에는 같은 역사를 공유하지 않았다.[* 이전 타이와 버마족 명칭에 따르면 산과 숲에 사는 사람들을 총칭하는 포괄적인 용어로서 사용됐다.] 독립 직후만 해도 정부와 군에는 상당수의 카렌족 출신이 있었는데, [[네 윈]]이 쿠데타로 버마족의 군 수뇌부로 등장하면서 노골적으로 카렌족을 제거하기 시작했고, 이는 1949년 카렌민족연합(KNU: Karen National Union)의 주도 아래 일으킨 무장 봉기의 계기가 되었다. * [[로힝야]] - [[미얀마]]를 식민지배하면서 [[벵골인]]들을 데려와 친영파 중간계층으로 써먹었다. 1942년 2차 세계대전 당시에 로힝야족은 하라는 대일본전쟁은 안하고 아라칸인 학살을 저질렀고, 아라칸족 역시 일본군의 힘을 빌려 보복으로 학살을 저지르며 감정의 골이 더욱 악화되었다. 이들은 미얀마 독립 후 세계에서 가장 박해받는 민족집단이 되어 끝없는 갈등을 이어가고 있다. 다만 먼저 영국령 인도를 침공하여 민간인 학살과 약탈을 하여 시비를 건 쪽은 영국이 아닌 다름아닌 버마족이었고 수십년 간의 전쟁을 통해 영국 동인도 회사를 괴롭힌 장본인도 버마족이었다. 당시 버마 왕국은 팽창주의로서 영토를 확장하며 주변국을 침공하고 다녔는데, 엄밀히 말하자면 미얀마의 인도계, 중국계 인구 탄압 정책은 [[캄보디아]]의 폴 포트의 중국인과 베트남인 학살과 대동소이한 정책으로 옹호할 여지가 없는 짓이다. 그리고 독립 후 로힝야족을 같은 시민으로 인정하겠다는 조약을 군부가 쿠데타로 들어선 후 일방적으로 파기한 것 역시 감안해야 한다. 군부세력은 수십년간 독재를 하며 미얀마 경제를 타락으로 빠뜨렸는데 이것을 정당화 하기 위해 버마족 민족주의를 노골적으로 내세우며 로힝야족이나 타 민족을 탄압하는 성격이 있다. 최근 미얀마 사태에선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같은 버마족 시위대마저도 잔인하게 탄압했다. * [[카슈미르]] 분쟁 - 포스트모더니즘 사관에서 카슈미르 분쟁의 원인을 [[영국령 인도 제국]]에서 찾기는 하는데, 굳이 영국이 개입 안했더라도 카슈미르가 힌두교도의 성지인 이유로 싸움이 날 수 밖에 없었다. 인도가 독립한 시점에서 기존 토후국들은 인도 연방에 속할지 떠날지 결정해야 했는데 전통적으로 카슈미르의 인구 중 1/3은 힌두교도이고 2/3는 무슬림이었는데 전체 인구 1/3에 해당하는 힌두교도들의 입지가 훨씬 강했다. 이 때문에 힌두교도인 카슈미르의 번왕은 아예 카슈미르의 독립을 선언했는데, 이에 파키스탄이 카슈미르로 민병대를 파견하고 번왕이 인도에 지원을 요청하며 분쟁이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카슈미르인]] 문서로. * [[듀랜드 라인]] - 현재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국경이 결정된 사건. 당시 아프간은 두라니 왕조때 부터 내부 확장정책과 외침으로 시시각각 국경이 변하고 있었는데, 당시 영국은 아프가니스탄의 군주이던 "압둘 라흐만 칸"과 명확하지 않는 영국령 인도와 아프가니스탄의 사이의 국경을 확정하기 위해 2년동안 국경 근처에서 합동조사단을 꾸려 협상을 통해 1,287㎞ 길이의 국경을 설정했다. 이로 인해 당시 넓게 분포했던 파슈툰족이 두 쪽으로 갈라져 다수가 영국령 인도로 귀속되었다. 후일 이 지역이 파키스탄이 되었는데 '북서 국경 주'(North-West Frontier Province - 현재 [[카이베르파크툰크와]] 주)를 위주로 파슈툰 분리주의가 자리잡게 되었다. 이로인해 아프간은 스와트, 치트랄 등의 영토를 잃었으나 반대로 역사적으로 통치한 적이 없는 누리스탄, 와칸, 이스마르 영토를 얻었다. 1970~1980년대엔 아프가니스탄에 친소정권이 들어서며 미국이 이를 견제하기 위해 사우디와 함께 탈레반을 양성했고 아프간 탈레반 유입의 주요통로가 되었다. * [[베를린 회담]]에서 아프리카의 문화적, 자연적 국경을 완전히 무시한, 자기들 편한 기준대로 직선 쭉쭉 긋는 식의 국경 지정으로 아프리카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종족 간 내전과 분쟁 등 정정불안의 단초를 제공했다. 이것도 영국이 적극 가담한 것은 맞긴 한데, 책임 소재를 자세히 따져 보면 영국만 잘못한 것은 아니고 오히려 이 회담을 주도한 주범은 회담의 명칭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당시 독일의 수상이었던 [[오토 폰 비스마르크]]였다. 이외에도 프랑스, 벨기에 등의 열강들 또한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 [[빅토리아 호]] - 외래종인 [[나일농어]]를 빅토리아 호에 풀어놓아 호수 토종어류 감소를 조장하였다. 다만 영국이 처음 나일농어를 풀었다는 통설과는 다르게 누가 처음 나일농어를 풀었는지는 불분명한데, 1950년대에 우간다를 통해 처음 유입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미 나일농어가 호수에서 잡히며 존재했기 때문에 이후 별다른 반대없이 1960년대 식민당국을 통해 추가도입이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당시 빅토리아 호수는 급증하는 현지인구와 무분별한 어장 포획으로 인해 이미 심각한 문제가 있었으며, 나일농어 뿐만 아니라 남획과 개간을 위한 농수 확보로 인한 호수 면적 저하, 환경오염 등 복합적인 요소가 작용하였다. 또한 나일농어는 환경적인 측면에서는 분명 부정적이었으나 반대로 수백만명의 직간접적인 일자리와 빅토리아 호수 주변 3개국의 수출경제에 효자노릇을 하였다. * [[토끼#s-8.1|토끼전쟁]] - 1859년 영국에서 영국령 호주로 이주한 토마스 오스틴(Thomas Austin, 1815~1871)이라는 사업가이자 농업인인 그가 사냥용으로 푼 토끼 24마리가 원래 정착해 있던 토끼들과 결합해 경이로운 번식률로 생태계를 뒤흔들기 시작했다. 오스틴은 사냥용으로 쓰기 위해 발빠른 야생 토끼들을 주문했는데, 조카가 충분한 숫자를 조달 못해 번식이 굉장히 빠르고 튼튼한 '''집토끼'''를 섞어서 보냈다. 토끼는 일반 대륙과 달리 천적이 적은 호주에서 어마어마하게 번식하였고[* 그 수가 구대륙의 전체 토끼수에 필적할 만큼이다.], 지나간 자리를 초토화시켜버리는 바람에 호주에서만 서식하는 토착종의 개체수가 눈에 띄게 감소했다. 호주정부는 소탕전, 세균전 등 별의 별 조치를 다 취했지만 그때만 반짝 줄어들고 곧이어 무서울 정도의 번식력으로 개채수를 회복했다. 다만 제2차 세계 대전 때는 식량난 해소에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호주 대륙은 지리적인 고립으로 인해 역사적으로 외래종에 취약했는데 토끼 뿐만 아니라 들개(딩고), 야생 고양이, 앵무새, 물소, 들쥐, 잡초 등과도 홍역을 치르고 있다.--사실 [[에뮤|토착종]]에게도 털린다.-- 또 외래종에 의한 생태계 교란은 현대에도 빈번한 편으로서 최근 북미의 가물치와 칡, 우리나라의 베스, 뉴트리아, 황소개구리 등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반대로 호주의 왈라비가 영국의 생태계를 교란한 바 있다.] * [[산업혁명]] - 초기 산업혁명 과정에서 주로 농업에 종사하던 국민들은 돈을 벌기 위해 최악의 근로 환경에 노출되었고 특히 아이들의 경우는 더욱 처참했다. 결국 국민들은 해외 식민지로 도피하거나 남은 이들은 [[러다이트]] 운동을 벌였다. 사실 시간이 달랐을 뿐 산업화에 성공한 전세계의 대부분의 국가들은 비슷한 과정을 겪었다. 이는 초기 자본주의 병폐로서 아담 스미스 이후 정부의 시장개입을 최소화 하던 것이 미덕인 것이 당시 세계의 시대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영국은 아시아, 아프리카 같은 제3세계는 말할것도 없고 가장 잘 살던 서유럽에서도 네덜란드와 함께 가장 높은 소득을 자랑했는데, 각종 사회 개혁을 통해 꾸준히 사회를 안정시켰기 때문이다. * [[아이슬란드]]와의 [[대구 전쟁]] - 영국은 과거 때부터 아이슬란드 근처 바다에서 대구 조업을 했는데 1944년 덴마크로 부터 독립한 아이슬란드가 기존 1901년 '앵글로-덴마크 영해 협정'에서 인정한 상호간 3해리 영해를 인정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12해리를 주장하며 외국어선을 배제하자 영국은 군함을 파견시켜 자국어선 호위를 하였고 조업을 이어갔다.[* 지금이야 영해가 기준선에서 12해리(22.2km)까지라는게 상식이지만 이는 1982년 유엔해양법회의에서 결정된 조항이고, 그전까지는 국제법상 영해에 대한 국제적인 합의가 없었다.당시 아이슬란드가 일방적으로 12해리를 주장하자 NATO의 모든 회원국 역시 이를 비난하였다.] 이에 아이슬란드가 항의차원에서 군함과 실탄위협 사격을 통해 대응 및 영국과 단교하거나 나토에서 탈퇴한다고 경고했고 심지어 [[소련]]에서 군함 사와서 한판 시원하게 붙어보자는 조치를 취했다. 결국 영국 역시 실익이 크지 않다고 판단하여 물러섰고 [[아이슬란드]]의 승리로 끝났다. 다만 2차 대구전쟁은 아이슬란드가 1차 대구전쟁 이후 영국과 맺은 12해리와 국제사법소에 의한 분쟁해결 해결합의 조약을 일방적으로 무시하고 50해리를 주장한 것과, 당시엔 영해나 베타적 경제수역에 기준이 현재보다 훨씬 협소하고 모호했던 것을 감안해야 한다.[* 그리고 여론이 영국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건 단순하게 이 때까지 아이슬란드의 주산업은 어업이었기 때문이다. 즉, 영국은 어업이 아니더라도 먹고 살 길이 있던 반면 아이슬란드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저렇게까지 나온 것이다. 그러니 타국 입장에서는 아이슬란드 편을 들어줄 수 밖에 없다.] * [[케냐]] 식민지 독립 탄압 - 1950년대 영국령이었던 케냐의 독립 투쟁 단체 마우마우에서 1963년 독립을 이루기까지 무장독립투쟁을 펼치면서 각종 [[고문]], 무장 진압 등 영국의 탄압을 받았다. 이때 영국이 저지른 만행들은 수십년간 외교부가 비밀리에 보관해오던 과거 마우마우 가담자 탄압 기록물의 영국 법원의 명령에 공개되면서 이뤄졌는데 비밀문건에 따르면 식민 통치에서 마우마우 조직원을 대상으로 한 영국 정부의 폭행, 구금, 학살 등의 범죄행위를 당시 영국 총리도 인지하고 있었다. 다만, 당시 마우마우라는 급진적인 무장단체는 정작 케냐 국민으로 부터 지지를 받지 못했는데, 유럽인 농장주 학살이나 충성서약을 거부하는 현지인들을 여성과, 아이를 가리지 않고 학살과 고문을 자행했기 때문이었다.[* 대표적인 사건이 '라리학살'이다. 때문에 당시 대다수의 식민지를 협상을 통해 독립시켰던 영국은 케냐의 경우엔 무장개입을 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마우마우의 공격으로 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현지인으로 구성된 경비대가 조직되었고 이후 영국군에 편입이 되어, 마우마우 군인들을 색출하고 심문하는 임무를 맡겼는데 이 과정에서 가학행위가 발생한 것이었다. 이에대해 2013년 영국정부는 공식적인 사과를 하고 피해자들에 대한 법적인 배상판결이 이루어졌다.[[https://www.yna.co.kr/view/AKR20130507022800009|#]] [[https://www.news1.kr/articles/?1122153|#]] * [[안다만 제도]] 원주민과의 충돌. * [[말라야 비상사태]] - 영국군 해병대가 말라야 공산당 게릴라의 목을 잘라 들고 사진찍고 다니는 등, 도를 넘는 진압이 있었다. * 나이지리아의 [[비아프라 전쟁]]의 원인을 영국 식민 지배로부터 찾는 경우도 있는데, 원래 비아프라 지역에서 살던 [[이그보족]]은 영국 식민지 시기에 영국이 친영파로 육성하여 나이지리아 국민 다수의 하우사족, 요루바족 같은 다수 민족들을 억압해온 것도 사실이지만 영국 지배 이전 이웃 부족들에게 일방적으로 침략과 노예 사냥을 당하던 피해자의 입장이었다. 비아프라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은 나이지리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요루바]], [[하우사족]]들이 부족주의 정치로 이그보족을 따돌리면서 정작 이그보족 거주지의 유전 개발 이익은 빼돌린데 있다. 자세한 내용은 [[영국-나이지리아 관계]] 문서로. * 중화민국의 유엔 상임이사국 자격 박탈과 유엔 탈퇴([[유엔 총회 결의 제2758호]]) - 영국 혼자서 벌인 일은 아니지만, 캐나다, 프랑스, 네덜란드, 이탈리아, 인도 등 전세계 76개 국가들과 함께 안건 가결에 표를 던져 자유주의 진영인 중화민국의 상임이사국 지위 박탈에 찬성하여 2차 세계대전 당시 동맹이었던 중화민국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이 당시 미국은 중화민국의 상임이사국 지위박탈엔 마찬가지로 동의하나, 대신 유엔 회원국 자격을 유지하는 '이중 대표 결의안'을 유엔에 제출했다.] 그 결과 상임이사국 자리의 주인이 중화민국에서 중화인민공화국(중국)으로 바뀌면서 21세기에 들어서도 중국, 러시아가 각종 안보이사회를 부결시키는 원인이 되었고, 중화민국 입장에서도 미국-대만 상호방위조약이 파기되고 외교적으로 상당한 악영향을 끼쳤다. 다만 당시 중소관계가 경색되어 중국이 독자 노선을 타면서 미중관계가 급호전된 분위기였으며, 장제스 체제의 중화민국이 부패와 독재 외에도 ‘본토 수복’을 위한 무력 도발 등으로 동북아 안정을 위협하고 있었던 때라서 이를 고려할 필요는 있다. * [[세포이 항쟁]] 당시 인도인 학살과 처형 동인도 회사의 경비절감을 위한 세포이들의 퇴직 연금 지급을 중단·축소에 대한 반발과 앤필드 소총 탄약에 종교적으로 민감한 소와 돼지기름이 문혀 있다는 루머를 기점으로 발생한 사건. 이로 인해 영국군은 군법에 따라 반역을 일으킨 세포이들을 교수형·총살형 등으로 처형했는데 그 중 수십명을 대포를 이용하여 잔인하게 처형시켰다.[[https://en.m.wikipedia.org/wiki/Blowing_from_a_gun|#]][* 제도권 언론인 [[연합뉴스]]는 이를 두고 마치 '''[[김정은]]의 [[장성택|고사포 처형]]'''과 똑같다고 비꼬았다.[[https://www.google.com/amp/s/m.yna.co.kr/amp/view/AKR20170405116500797|#]] 다양한 사진자로가 남아있으며 가장 유명한건 반제국주의자이자 종군화가인[[https://ko.wikipedia.org/wiki/%EB%B0%94%EC%8B%A4%EB%A6%AC_%EB%B2%A0%EB%A0%88%EC%83%A4%EA%B8%B4|바실리 베레샤긴]]이 남긴 기록화가 유명하다.] 다만, 대포를 통한 반역자 처벌방식은 영국이 인도에 처음 도입한 것은 아니고, 16세기 [[포르투갈 제국]] 식민지와 [[무굴제국]]을 거치며 수백년간 인도에서 집행되던 전통적인 처벌방식을 유지한 것에 가까웠다. 마찬가지로 소와 돼지기름 루머 역시도 단순 루머에 가까웠는데, 이에 따라 1857년 1월 27일 영국군 리처드 버치 (Richard Birch) 대령은 이러한 소란을 잠재우기 위해 세포이가 원하대로 혼합물을 사용하여 스스로 기름칠할 수 있도록 명령했고 카트리지 역시도 입이 아닌 손으로 찢일 수 있도록 장전 드릴을 수정했지만, 세포이들 사이에서 루머는 끊이지 않고 계속 재생산되어 확산되어 갔다.[* 참고로 인도에서 대포에 의한 처형방식은 인도인만 해당된 것은 아니었는데 예를 들자면 1798년 마드라스 보병 제1대대 소속 영국군 병사들 사이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한 병사가 대포에 의해 처형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세포이 항쟁 당시 몇몇 영국측 기록에 의하면 영국 민간인들 역시도 인도 [[우타르프라데시]] ( Uttar Pradesh)주에서 반란군에 의해 대포로 살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https://trove.nla.gov.au/newspaper/article/66008933|#]]] * [[차고스 제도]] 원주민 강제 이주(1967~1973) - 1968년 미군기지 건설을 위한 미국의 요청으로 차고스 군도의 원주민을 강주이주 시켰다. 이에 1972년 영국정부는 [[모리셔스]]로 이주한 426명에게 보상금으로 65만 파운드를 제공했다. 이 돈은 원주민들에게 직접 지불하기로 합의되어 모리셔스 정부에 전달되었지만, 모리셔스 정부는 1978년까지 지급을 보류했다. 이에 영국은 섬 주민들의 소송에 대응하여 400만 파운드를 추가로 기부하였고[[http://www.uniset.ca/naty/2003EWHC2222.htm|#]] 이 돈은 다시 모리셔스 정부에 인계되어 1982년과 1987년 사이 일련의 지출로 분배되었다. * [[식민지]] 출신 [[유색인종]] 영국군 전사자들에 대한 [[인종차별]][[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1042210120001851|#]] - 아프리카 및 중동ㆍ아시아 출신 전사자들이 불평등한 대접을 받은 [[인종차별]]. 영국 언론 가디언은 "전사한 모든 군인은 무덤 위에 비석을 설치하거나 실종자 추모비에 이름을 남겨야 하지만 백인과 달리 유색인종 전사자들은 공식적으로 기념되지 않았다"고 전했다. 최소 11만 6,000만명, 많게는 35만 명이 이런 차별대우를 받은 것으로 조사됐으며 또 유럽 전선 전사자에겐 개별 묘지 혜택이 주어진 반면 유색인종 전사자들은 기념관 서류에 등재되는 게 고작이었다. CGWC의 전신인 제국전쟁묘지위원회(IWGC)는 식민지 출신 전사자들을 매장할 묘역을 조성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최근 영국 국방장관 [[벤 월러스(정치인)]]은 공식사과와 함께 디지털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이름 부족을 설명하는 명판을 기념비에 추가하기 시작했다. [[https://www.dailymail.co.uk/news/article-9497893/British-officials-apologise-claims-black-Asian-troops-denied-gravestones.html|#]] * [[뮌헨 협정]] - 일명 서구의 배신(Western Betrayal)이라고도 부른다. 프랑스는 [[로카르노 조약]]에 의해 체코의 군사 동맹국으로서 체코가 독일에게 공격받을 시 참전할 의무가 있었지만, 영국은 그런 의무가 없었는데 프랑스는 독일에 대항하기 위해 당시 영국의 개입이 절실히 필요했다. 결국 어떻게든 전쟁만은 막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는 뮌헨협정을 통해 체코 주데텐랜드를 일방적으로 독일에 넘겼다.[* 주데텐란트가 독일에 넘어가면서 300만에 달하던 인구와 함께 오헝제국 시절부터 제국의 경제를 지탱하던 유수의 산업시설들과 독일을 막기위해 건설된 강력한 요새선까지 전부 독일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된다. 독일의 체코 침공 이후 독일의 유명한 전차인 [[38t]]와 [[헷처]]는 체코 조병창에서 만들어졌고, 또한 오스트리아, 폴란드와 뿐만 아니라 체코에서도 독일은 금과 시민들의 사유재산 및 노동력을 약탈하여 만기가 도래한 [[메포어음]]을 지불하게 된다. 결국 해당 조약 이후에도 결국 독일은 체코를 집어삼키고 그들의 독립을 파괴하면서 속칭 [[체임벌린|우리 시대의 평화]]는 두고두고 조롱거리가 된다.] 다만, 당시 [[체코슬로바키아]]는 생겨난지 불과 20년밖에 안되는 신생국가로서 주데텐란트는 350만 주민 절대다수가 독일계에 역사적, 언어적, 문화적으로 원래 독일에 가까웠다는 점, 오히려 주민들 의사대로 독립을 허용하는게 [[베르사유 조약]] 체계 이후 정립된 민족자결주의에 부합했다는 점[* 정작 베르사유 조약 당시에는 허락해주었는데 이는 체코가 주데텐란트가 없다면 스스로 자립할수 없다고 봤으며 같은 이유로 폴란드인이 다수인 테센도 체코의 영토가 된다.], 당시 주데텐랜드는 주민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는 ‘수데텐 독일당’ (SdP)까지 창설되어 히틀러의 지시를 받으며 합병에 찬성했다는 점, 독일과 합병을 위해 실제 주데텐 주민들의 무장봉기까지 일어나 이때 히틀러는 이미 체코의 침공을 지시했다는 점, 당시 연합국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대규모 군축 등을 통해 전쟁준비가 안되어 있었다는 점, 당시엔 미국마저 외교적 고립노선을 고수하며 참전여부가 불분명 했다는 점, 당시는 대공황 시기로서 불과 20년 전만 해도 제1차 세계대전으로 젊은 한세대가 아예 갈려나가 국내 반전여론이 절대다수 였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결과적으로 뮌헨협정은 체코 뿐만 아니라, 현대에도 대표적인 외교실수로 기억된다. 다만 [[히틀러]]는 아이러니하게도 패전 당시 자신의 최대 패착을 바로 뮌헨협정을 체결한 것이라고 고백한 바가 있다. >영국과 프랑스는 불명예와 [[녹색 작전|전쟁]] 사이에서 선택해야 했다. 그들은 불명예를 선택했다. 그리고 그들은 [[제2차 세계 대전|전쟁]]을 겪을 것이다. >---- >[[윈스턴 처칠]], 1938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