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혐성국 (문단 편집) === 영국의 과오가 분명한 경우 === [include(틀:토론 합의, 토론주소= https://namu.wiki/thread/FadedMammothTherapeuticOven, 합의사항1= 아일랜드 대기근과 관련된 부연 설명을 기근의 책임 소재 관련 설명 대신 과거사 청산 노력 중심으로 설명한다.)] * [[영국 동인도 회사]](1600~1873) - 영국의 인도와 동아시아 깽판의 주역 중 하나였던 기업. 20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기업답게 수많은 행적이 있는데 대표적으로 벵골을 시작으로 인도를 식민지로 삼은게 있다. 이 과정에서 막대한 통치비용을 메꾸기위해 높은 토지세는 기본이고 식량을 재배할 경작지를 갈아엎고 쪽과 아편과 같은 상품작물 플랜테이션으로 전환했다.[* 사실 아편 농사에 인도인 지주들도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는데 쌀농사 내수시장 보다 환금작물로서 아편을 생산하여 수출하는게 훨씬 수익이 높았기 때문이다. 사실 중국에 대한 아편무역은 영국 뿐만 아니라 인도계 상인, 유대계 상인, 청나라 상인도 적극가담 했다.] 1770년 벵골 대기근엔 천연두와. 가뭄으로 약 100만~ 200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동인도회사의 세금정책도 이를 가중시켰다. 게다가 영국의 정치인들이 이 동인도 회사의 지분을 가지고 있어서 이들의 악행을 방관하고 뒤에서 지원했다. 그 중 하나가 하단의 아편전쟁이었다. 어느 정도 기간이 지난 후에는 동인도 회사가 소유했던 인도, 버마 지역은 영국 왕실령이 되었으나 그들은 여전히 고통받았다. * [[아편전쟁]](1840~1842, 1856~1860) - [[청나라]]의 무역 보호주의, 공행의 부정부패, 막대한 찻잎 수입 등으로 불어나는 무역 적자를 이유로 마약을 만들어 밀수출하고, 이 때문에 청나라에서 마약 중독과 국부 유출 문제가 심각해지자 국내에 아편 수입을 금지하는 조치를 취했을 뿐인데 이를 빌미로 1, 2차에 걸쳐 영국을 주도로 미국, 프랑스와 함께 청나라에 전쟁을 일으킨 사건이다.[* 종종 영국이 아편의 위험을 충분히 인지하여 자신들은 전혀 사용하고 있지 않음에도 마약청정국인 중국에 마약을 투입한 사건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러한 이해는 적절하지 않다. 실제로는 중국이 영국의 [[아편]] 판매 이전에도 국가 내부에서 약물 문제가 심각해지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17세기 말부터 중국을 휩쓸던 담배 열풍에 많은 이들이 담배를 피웠고, 곧 담배로도 만족하지 못한 사람들이 서서히 아편으로 기호품을 옮겨갔다. 이런 식으로 아편을 남용한 대표적인 사례로 명 만력제, 청 도광제 등이 존재한다. 게다가 아편의 오남용 문제는 서양에서도 심각했는데 전쟁 이후 몇십 년이 지난 시대에 나온 셜록 홈즈에서도 마약을 하는 홈즈가 묘사되거나 아편굴의 모습이 나오는 것이 대표적이다. 또한 아편을 비롯한 극약들이 주 원료인 윈슬로 부인의 진정 시럽이란 약이 19세기의 대표적인 가정상비약으로 구비되었고, 현대 의약품의 선구자 격인 페니실린이 1928년에서야 처음으로 등장했다. 결과적으로 아편 전쟁은 무역 적자를 타개하려는 영국 상류층들이 중국의 높아지는 아편 수요에 주목해 가장 확실한 외화벌이 수단으로서 아편을 판매하였고, 그 결과로서 중국 내에 퍼져있던 약물 오남용 문제가 확산된 것이다.] 즉, 영국은 청나라가 '''마약 파는 걸 막았다고 전쟁을 개시한 거다.''' 의도와는 별개로 아편 판매만 놓고 보면 이는 당대 영국 내부에서도 논쟁이 심한 문제였다. 전쟁 반대파들에게서는 "승리할 것은 자명하지만 그로 인한 위신의 실추가 더욱 더 두렵다"는 자조가 나올 정도로 명분 없는 전쟁이었다. 당시 영국의 하원의원이었던 글래드스턴의 연설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막대한 이익을 얻을 수는 있어도 후에 영국의 위신과 명예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손상될 것이라며 이 전쟁의 불합리성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영국 내에서도 있었으나 단 9표의 차이로 전쟁이 승인되었으며, 예상대로 영국엔 '인류 역사상 가장 추악한 전쟁을 일으킨 나라'라는 꼬리표가 영원히 남게 되었다. 아편전쟁 이전에도 중국내 아편중독자는 400~1,200만 명이 존재했던 걸로 추정하는데, 이는 [[난징 조약]] 이후 약 2배 가까이 늘었난 것으로 보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아편 전쟁 이후 중독자의 수는 1,350만[* The Covert Netherworld as Invisible Incubator for Illicit Commerce, Alfred W. McCoy.]~4,000만 명[* The Peasant Production of Opium in Nineteenth-Century India, Rolf Bauer, 43-44p]까지 추정하고 있다. 반대로 다른 의견도 존재하는데 홍콩대 석좌교수인 프랑스 디콰터 (Frank Dikötter)는 모든 주류자가 알콜중독자는 아니듯이 중국내 심각한 아편중독자는 상당히 과장됐음을 지적한다. 예컨대 예수회 선교사이자 아편 반대론자인 ‘존 터너’ (John Turner) 역시 그의 중국기록에서 이 점을 언급하고 있는데, 19세기 말 아편 무역항인 광동에서 발견할 수 있는 매우 소수의 쇠약해진 사람들 중 평소 아편습관으로 인한 원인은 드물며, 대부분이 치료할 수 없는 질병에 대한 고통의 무게에서 벗어나기 위해 계속 아편만을 피울 뿐..이라는 점을 기록하고 있다. 또 인도인 역사가 ‘리처드 뉴먼’(Richard Newman) 역시 19세기 동안 상점에서 아편을 쉽게 구할 수 있었던 영국에서는 빈번하고 만성적인 아편 사용자가 아편으로 인한 해로운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며, 19세기 중국 역시 아편이 대부분의 흡연자의 건강을 해치거나 수명을 단축시키는 경우가 거의 없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사실 19세기 아편은 유럽, 미국, 중동, 아시아 등 세계적으로도 재배나 사용이 금지가 아니었고 전통적으로 아스피린 이전 진통제나 오락용으로 널리 사용됐었다. 예컨대 1830년대 영국에서는 한해 22,000 파운드의 아편이 인도와 터키에서 수입됐고 약국에서도 누구나 손쉽게 구입이 가능했으며 아편수입을 금지하는 법률도 없었다.[* 실제 중국에서도 [[건륭제]] 시기까진 아편이 오락용으로 사용되었고, 미국에서도 아편흡입이 금지된게 1909년이었다.(1909, Opium Exclusion Act)] 그렇다면 유독 왜 당시 중국에서 아편이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는가에 대해 의문점이 남는데, 중국인 사학자 ‘정양원’(Zheng, Yangwen) 교수에 따르면 명-청 시대를 거치면서 나타난 도시화, 소비주의, 상업주의의 발달 및 주로 부유층과 젊은층 사이에서 하나의 세련되며 교양있는 문화의 상징처럼 여겨진 아편의 서민층 확산 등의 사회적 변화를 원인으로 뽑고 있다.[* Zheng, Yangwen (2003). "The Social Life of Opium in China, 1483-1999"] 반대로 영국의 경우에는 청교도적 윤리관이 중산층 이상에 팽배했던 사회상으로 인해 아편중독자를 자기 관리 및 절제도 못하는 인생의 실패자로 여기는 풍조가 강했고, 자연스럽게 아편중독자의 비중이 하류층에 몰려 있었다. 또한 중국의 ‘천쑹취안’(Chen, Song-Chuan) 교수에 따르면 백련교도의 난, 태평천국의 난, 난징조약, 의화단사건, 청일전쟁, 국공내전 등을 거치면서 발생한 중국 내 대혼란과 불안도 중국인들을 더욱 아편에 의존하게 만들었으며, 실제로 1830년대 아편 무역이 금지됐음에도 불구하고 청나라의 상인, 갱단, 부패한 관리들은 동남아로부터 엄청난 규모의 아편을 밀수했고, 쓰촨성과 원난성 같은 내륙지방에선 아편이 현금 대체품으로 사용됐으며, 중앙정부의 노력에 불구하고 지방에선 아편이 농민들의 수입원이자 지방정부의 주요 세수원으로서 이용되는 일이 빈번했던 점을 지적한다.[* Chen, Song-Chuan (1 January 2017). Merchants of War and Peace: British Knowledge of China in the Making of the Opium War|#] 이렇듯 시간이 지나면서 중국 내 아편의 자체생산-소비는 영국의 아편 무역 규모를 압도하는데, 이로 인해 19세기 후반에 이르면 아편무역은 수익성 상실로 결국 무역이 종식되는 결과를 낳았고, [[https://www.krm.or.kr/krmts/search/detailView.html?dbGubun=SD&category=Report&m201_id=10026991&local_id=10034500|#]] 20세기에 청나라가 멸망한 뒤에도 중국내 ‘지방군벌, 국민당, 공산당 정권’에 의해 주 수입원으로 활용되거나, 중국밖의 경우 패전한 국민당 잔당에 의해 현재까지도 악명높은 동남아의 [[골든 트라이앵글(마약)|골든트라이앵글]]을 형성해가며 그 규모를 더욱 키워나갔다. 이러한 중국 내 아편 문제는 1950년대 마오아래 완전히 뿌리 뽑혀 현재까지도 마약에 대해서는 응보주의적 접근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최근 미국 등 서양에서 큰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는 마약 [[펜타닐]] (Fentanyl)의 주요 원료 수출국이 과거 아편으로 곤욕을 치른 중국이다. 이로인해 서구와 중국 사이의 갈등이 점화되고 있다. 그러나 원료수출이라 법적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 [[북아일랜드 분쟁]](1960~1998), [[피의 일요일 사건(북아일랜드)|피의 일요일 사건]] - [[영국]]의 영국의 억압과 차별 정치에 의해 촉발된 갈등. 이후 50년 만에 영국 총리가 공식 사과를 하며 북아일랜드 벨파스트 사건에 대해 [[영국군]]의 시민 살해를 시인했다.[[https://www.yna.co.kr/view/AKR20210513032600009|#]] * [[아일랜드 대기근]](1847~1852) - 다만 오늘날 영국에서 과거사 문제를 인식하고[* 아일랜드 독립운동사의 비극을 다룬 영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이 영국에서 제작된 것이 대표적인 예시이다.] 과거 피식민국이었던 아일랜드의 경제가 성장했기 때문에, 현대 21세기 들어서는 영국과 아일랜드의 국민 감정이 상당히 개선되었다. * [[보어 전쟁]] 당시 [[보어인]] 수감(1899~1902) - 영국의 식민지 점령정책에 저항하며 게릴라전을 통해 영국군을 괴롭히는 보어군을 차단하기 위해 '''[[강제수용소]]'''(Concentration Camp)를 운영하였고 관리 부족, 전염병 등의 이유로 민간인들과 병사들을 사망하게 만들었다. 당시 보어인은 인구 50만 명, 병력 7만명이였는데 이를 섬멸하기 위해 영국은 45만 명의 군인을 파견했으며 21만 명의 민간인을 강제수용소에 감금했다. 그 과정에서 보어인 병사 27,000명이 숨졌고 집단수용소에서 민간인 28,000명이 비참하게 죽었다. 이에 대해 1999년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100년 전 보어전쟁 때의 일에 대해 [[남아프리카 공화국]] 국민에게 유감의 뜻을 표시한다.[[https://www.donga.com/news/Inter/article/all/19991110/7483865/1|#]] * [[애진코트|전함 강탈 사건]](1914) -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이후 [[윈스턴 처칠]]이 오스만 제국이 대영제국에 주문했었던 전함 2척을 강제로 압류한 사건이다. 전쟁 때문에 군함 한 척이 시급한 상황이라지만 멀쩡히 대금까지 다 양도하고 승무원도 다 승조한 전함을 강탈했다. 처칠은 오스만 측에 군함 대여비로 하루당 1천 파운드를 제공하겠다고 제시했는데, 해당 군함의 대금이 275만 파운드였음을 감안하면 2750일(7.5년)을 대여해 원금을 충당할 수 있었으며, 당시 상황상의 전력 공백을 감안하면 말도 안 되는 푼돈이었다.[* 심지어 동시대에 칠레의 함선을 강제로 압류했었을때는 최소한 대금만큼은 돌려줬었다. 이건 대놓고 엿먹어 봐라라는 행위였다.][* 사실 영국이 오스만 참전을 유도하기 위한 행위였다는 해석도 존재한다. 영국이 오스만을 가상 적국으로 인지하고 있었다는 말도 있고 최종적으로 오스만의 참전으로 이득을 본 유일한 나라라는 점 등. 자세한 건 [[애진코트]] 항목 참고.] 당연히 이런 푸대접을 받은 오스만 제국 측에서는 반영 여론이 듫끌었지만, 오스만의 대외적인 공식입장은 영국과 척을 질 생각이 없었고 끝까지 중립을 고수했다. 독일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스만이 계속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자 독일은 이 애진코트 사건을 빌미 삼아 오스만에 군함 2척(사실상 독일 지중해 함대의 명령을 받는 독일의 전함)을 제공했고 이들은 러시아 세바스토폴, 오데사, 노보로시스크 등의 항구를 선전포고 없이 무단 공격하며 오스만은 강제적으로 동맹국 편에 서게 되었다. 이는 향후 협상국에 큰 피해를 준 [[갈리폴리 전투]]로 이어졌다. * [[https://en.wikipedia.org/wiki/Great_Famine_of_1876%E2%80%931878|1876~1878년 인도 대기근]] - 사망자 수 560만에서 960만에 달하는 대기근. 엘니뇨로 인한 가뭄으로 상당수 지역에서 흉작이 이어졌는데 당시 [[영국령 인도 제국]]의 현지 지역 유지들은 오히려 식량이 부족한 지방에서 다른 지방으로 고의로 식량을 수출시켰다. 물론 기근은 한 차례로만 끝나지 않고 여러차례 진행되었다. 이상기후로 인한 가뭄으로 인도 외에 중국(간쑤성과 산시성), 남미(브라질 북부) 및 동아프리카(수단과 에티오피아) 지역에서도 1,900만에서 5,000만 명 정도가 사망했다. 당시 영국령 인도정부는 재정난으로 이전 기근때 보다 적은 금액이 투입되면서 피해를 가중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천만 루피가 투입되었고, 영국이 직접 통치하지 않던 토후국인 마이소르, 하이데라바드에도 720만 루피의 지원이 이뤄졌다. 그 외 영국본토와 해외령에서도 840만 루피의 기금이 이어졌다. * 인도 암리차르 학살 사건(1919) - 1919년 4월 13일 인도 북부 펀자브주 암리차르 중심가 잘리안왈라 바그 광장에서는 반영(反英) 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영장 없는 체포 등을 허용한 롤럿법에 의해 체포된 민족지도자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영국령 인도군은 이에 앞서 집회 금지령을 내렸지만, 시민 대다수는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추가로 이날은 시크교도들의 바이사키(Baisakhi) 축제가 열리는 날이었기에 광장에는 시위와 무관한 일반 시민들도 다수 모여 있었다. 사실 이 직전엔 당시 600명의 인도 어린이들을 돌보던 '마셀라 셔우드'라는 영국여성 선교사가 자전거를 타고 가던 중 인도 시위대에 둘려싸여 집단린치를 당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는 영국인들 분개하게 만들었고 그런 상황에서 인도의 시위대가 접근금지 선을 넘어 몰려들자 당시 흥분한 다이어 대령은 영국정부의 발포금지 명령에도 불구하고 총격을 명령했다. 결국 이 사건으로 379명이 숨진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에대해 당시 처칠은 이 사건을 영국 역사에 괴물같은 사건이며 비난했고, 인도 평의회의 일리엄 빈세트 경은 이에 대해 사과했다. 또 당시 피살자 유족들은 옥신각신 끝에 1인당 37파운드 10실링의 보상금이 지급됐다. * [[이란]] [[모하마드 모사데크]] 축출(1953) - [[석유]] 이익을 위해 영국에서 미국을 끌여들여 정보기관의 공작질로 이란 정부에 대한 쿠데타를 선동하여 정부를 전복시킨 사건. 사우디아라비아의 석유 이권을 독점하고 있던 미국 자본의 아라비안 아메리칸석유[* 아람코. 1980년 사우디 정부에 의해 국유화]가 1950년 말 사우디정부의 압박에 굴복, 수익을 사우디와 50대 50으로 반분키로 합의함에 따라 이란에서도 영국계의 앵글로-이란 석유 역시 같은 압박을 받았으나 영국은 거부하였고 이에 모사데크가 국유화를 선언하자 뿔난 영국은 미국 정보기관인 [[CIA]]와 함께 모사데크를 축출하고 친미정권인 팔레비정권을 내새워 석유이권을 나누어 먹는다.[* 당시 미국 국무부내에서도 석유 이익을 나누는 데 대한 영국의 비타협적 태도를 비난하면서 모사데크와 협력을 추구해야 한다는 입장이 있었을 정도[[https://www.yna.co.kr/view/AKR20170621138600009|#]]로 영국의 이란 석유 이익에 대한 집착은 악랄하기 그지 없었다.] * [[노예무역]] - 16세기 초 포르투갈이 처음 서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사들여 유럽 대륙으로 수송한 이후 영국 역시 대서양 노예무역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수송선의 국적별로 규모로 보자면 포르투갈 480만 명, 영국 230만 명, 스페인 130만 명, 프랑스 110만 명, 네덜란드 44만 명, 미국 40만 명으로 추정된다.[[https://en.wikipedia.org/wiki/Atlantic_slave_trade|#]] 영국 스코틀랜드의 최대 도시인 글래스고는 시 위원회 조사 결과 역대 시장 79명 중 무려 40명 이상이 대서양 노예무역과 관련된 인물이었으며, 글래스고 주요 건물 중 11개 이상이 노예상과 관련된 것이였다. 또 도시 곳곳에 노예상 8명의 기념비, 추모비가 있었고, 시내 대로 62개 중 대부분이 노예상의 이름을 따라 지은 것이다. [[증기기관차]]를 발전시킨 산업혁명의 아버지 [[제임스 와트]] 또한 흑인 어린이를 사고파는 데 관여했었다.[[https://www.mk.co.kr/news/world/view/2022/04/295884/|#]] 게다가 '''영국의 최고영웅 이라는 [[넬슨 제독]]''' 역시 노예제를 옹호하고 다녔다.[* 폴란드계 미국인 작가가 쓴 [[테메레르 시리즈]]가 해당 위선을 아주 통렬하게 비판한다] 다만, 당시 이러한 노동력 착취는 전세계적으로 보편적인 시대상이었다 라는 것을 어느정도 고려할 필요는 있다. 단적으로 [[조선]]만 하더라도 19세기 말까지 500년이 넘는 기간동안 자국민을 대상으로 노비제를 대량으로 운영하였으며, '''성리학자인 [[이황]]'''만 보더라도 부리던 노비만 370명이 넘었다. 결국 아이러니 하게도 이런 노예무역의 폐지를 세계에서 제일 먼저 주도한 나라도 영국이였는데, 부족한 노동력을 식민지인과 자국민 저소득층을 차출해 부려먹으면서 근본적인 해결은 하지 못하였다. * [[제2차 중동전쟁]] - [[영국]]이 [[프랑스]], [[이스라엘]]과 함께 일으킨 전쟁. 수에즈운하 건설 자체가 당시 제국주의 패권 국가인 영국·프랑스가 식민지와의 거리를 줄이고 경제적·국제정치적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전략의 하나였으며 무엇보다도 자신들의 불만을 해결한답시고 이들이 [[전쟁]]을 택한 것은 이들의 명백한 잘못이였다. 결국 이들은 예상치 못한 국제사회 비난에 시달렸으며 영국과 프랑스의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여론이 거세졌다.[[https://www.hankyung.com/international/article/2014050548061|#]]] [[UN]]에서는 프랑스, 이스라엘 '''"[[영국]]"'''의 철수를 결의했으며[[https://www.sedaily.com/NewsView/1VQOZRR22H|#]] 미국은 영국과 프랑스의 수에즈 운하에 대한 영향력 행사 우려와 당시 고조 중이던 소련과의 핵전쟁 위험. 그리고 이를 빌미로 중동을 비롯한 제3세계의 급격한 공산화 노선을 우려하고 있었는데, 당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은 전쟁이 발발하자 영국 총리 관저에 전화를 걸어 비난했으며, 그럼에도 영국이 고집을 피우며 전쟁을 포기하지 않자 '''"[[미국]]에서 [[영국]]을 제재하였다."''' 미국은 전쟁을 포기하지 않는 [[영국]]을 비난하며 미국이 보유하던 영국의 파운드화를 매각하여 영국의 화폐와 경제를 궁지로 몰았으며 미국산 원유의 영국 판매도 중단하는 제재를 취한다. [[https://www.segye.com/newsView/20091225001491|#]] 결국 전쟁은 이집트의 승리로 끝났으며,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은 시나이 반도에서 즉시 철수하고 나세르는 수에즈 운하 국유화에 성공한다. 결국 영국 제국주의를 무너트린 것은 [[미국]]이였으며 이번 전쟁으로 지정학적 요충지를 선점하고 군사력과 경제력을 내세우며 패권을 추구하면서 약소국의 주권을 누르는 제국주의 시대는 노을 속으로 사라졌다.[[https://www.joongang.co.kr/article/24023892#home|#]] * [[포턴 다운]] - 인도 식민지 시절 수백명의 영국군 산하 인도인을 상대로 [[겨자 가스]] 독성 평가를 위한 [[인체실험]]을 실행했다.[[https://www.theguardian.com/uk/2007/sep/01/india.military|#]] 이 사건에 대해 Rawalpindi experiments로 불리기도 한다. * 에티오피아 알레마예후 왕자의 유해 일방적인 반환 거부 - 영국에 포로로 끌려가서 영국에서 죽은 에티오피아 왕자의 유해를 왕자의 후손이 돌려달라고 요청하자 영국에서는 유해 발굴 시 다른 묘지들도 손상된다고 주장하며 거절했다.[[https://www.yna.co.kr/view/AKR20230524120400009|#]] * [[이라크 전쟁]] - 미국과 함께 이라크에 대량 살상무기가 있다는 거짓명분을 내세워 이라크를 침공했다. 이 사건은 영국인들에게도 [[토니 블레어]]가 미국에 의존하게 만든 게 아니냐는 비판이 있다. * [[영국의 티베트 침공]] - 영국령 시킴 왕국과 티베트 사이의 국경 문제와 러시아에 대한 완충국 설정문제로 티베트를 침공한 사건. 당시 영국은 청나라 [[강희제]]의 티베트 정복이후 중국인으로 구성된 내정간섭 기관인 암반(Amban)이 존재하자 청나라와 협상 하였지만 티베트가 이를 거부하였고, 이에 탐험대 원정을 통해 다시 티베트와 독자적인 협상을 추진하였지만 몇달 간의 기다림에도 끝내 협상은 거부당했다. 러시아의 티벳개입에 대한 영국의 의혹은 특히 [[달라이 라마 13세]]와 그의 영적 스승인 러시아계 궁정인 ‘도르지예프’(Agvan Dorzhiev)라는 승려를 중심으로 커져 갔는데, 실제 14대 달라이 라마의 증언에 의하면 13대 달라이 라마는 러시아와 관계를 수립하려는 간절한 열망이 있었고 영국을 배격했는데 그 중심엔 도르지예프가 있었다고 증언했다.[* Laird, Thomas (2006). The Story of Tibet: Conversations with the Dalai Lama, p. 221. Grove Press][* 그 밖에 나가르제 요새 (Nagartse Dzong)에서 러시아제 [[베르단]]과 후장총포가 발견된 것도 의혹을 증폭시켰다.] 또한 달라이 라마는 1900년 러시아에게 티베트의 공식적인 보호를 요청하고 1년 뒤엔 차르의 궁전에도 방문해 환대를 받는데, 이런 상황에서 이 문제를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았던 커즌 경[* [[커즌 라인]]과 [[파시스트]][[오스왈드 모슬리]]의 장인인 그사람 맞다.]은 달라이 라마에 편지 세 통을 보냈지만 그 편지는 뜯지도 않은 채 그대로 반송됐다. 이에 커즌 경은 협상을 체결하기 위해 티베트에 사절단을 빙자한 침략군 파견을 압박했다.[* Bell, Tibet Past and Present (1924) , p. 66. 참고] 결국 원정 과정에서 양측간 충돌이 있었고 구식 화승총으로 무장한 티베트군은 [[맥심 기관총]]으로 무장한 영국군에 학살당했는데, 이는 에드워드 시대에 이르러 부상한 반전 여론과 맞물려 영국내에서도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다만 당시 러시아는 1904년 [[러일전쟁]]으로 티베트에 영향력을 행사할 여력이 거의 없었고, 제공된 소총 역시 30정이 전부인 수준으로 밝혀졌다. 결국 이 결과로 체결된 1904 라싸 협정으로 중국으로부터 배상금과 함께 시킴 왕국과 티벳의 국경이 설정되었으며, 1906년에는 청나라 영토로서 재확정된다. * [[호주 원주민]]에 대한 [[학살]] - 뉴캐슬 대학의 역사가 [[https://en.m.wikipedia.org/wiki/Lyndall_Ryan|린달 라이언]]이 이끄는 호주 연구 위원회에 따르자면 영국 식민지 정착민이 호주에 정착한 1788년부터 독립이후 1930년까지 유럽 정착민들과 호주 원주민들의 충돌로 의해 약 304건의 크고 작은 원주민 학살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2022년 최신 기록에 따르면 토레스 해협에서 학살된 원주민 수는 412명으로 증가했다. [[https://en.m.wikipedia.org/wiki/List_of_massacres_of_Indigenous_Australians|#]] * [[프레스 갱]] - 1797년부터 1815년 까지 무려 22년간 지속된 [[나폴레옹 전쟁]]의 영향으로 절반에 가까운 영국 해군 수병 숫자의 급감과 미국으로의 탈영병 급증으로 외국인인 미국 사람들까지 강제징집해서 [[미영전쟁]]의 한 원인이 되었다.[* 당시 영국군 탈영병 상당수는 신분세탁을 통해 미국선박에서 일했는데, 미국은 이들 모두를 귀화한 미국인으로 보았으나 영국은 미대륙에서 태어난 사람만 미국인으로 인정하여 갈등의 원인이 됐다.] 당시 프레스갱은 영국의 사례가 유명하긴 하지만 18세기부터 19세기까지 있었던 서양문화권 해군의 부조리로서 미해군도 [[미국 독립전쟁]] 당시 강제징집을 이용했었다. 국가 행정력이 미약했기 때문에 이런식으로라도 전쟁에서 강제징집을 했지만[* 참고로 당시 조선도 남자는 60세까지 군역이 부과되었다.] 그 중에서도 영국은 도를 넘어서 외국 선박을 나포하여 외국인을 징집하는 추태까지 저질렀다. 결국 이러한 관행은 1815년 나폴레옹 전쟁 이후 공식적으로 종료됐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