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함안군/행정 (문단 편집) === [[군북면(함안)|군북면]] === [[파일:external/www.haman.go.kr/01_02_p01.gif]] ||'''면적'''||80.6㎢(군의 19.3%)|| ||'''행정구역'''||17개리(37개 마을 120개반 92개 자연마을)[* 덕대리·동촌리·명관리·모로리·박곡리·사도리·사촌리·소포리·수곡리·영운리·오곡리·원북리·월촌리·유현리·장지리·중암리·하림리]|| ||'''인구'''||5,817명[*A]|| ||'''교육시설'''||4개교 381명 (초등 2, 중학 1, 고등 1)|| ||'''의료시설'''||10개소(보건지소 1, 보건진료소 1, 의원 3, 약국 3, 치과 1)|| ||'''급수시설'''||광역상수도 20개동 1,867전, 간이상수도 39개동 954호, 기타 14호|| ||'''주민자치센터 현황'''||10반 150명(회원)|| ||'''지역특산물'''||방울토마토, 수박|| ||'''링크'''||[[http://www.haman.go.kr/town/Gunbuk/|군북면사무소]]|| 면소재지는 덕대리이다. [[남해고속도로]] [[군북IC|군북 나들목]], [[장지IC|장지 나들목]], [[경전선]] [[군북역]]이 있다. [[의령군]], [[합천군]], [[거창군]] 등지에서 [[부산광역시|부산]], [[마산시|마산]]으로 가는 인구와 물동의 집산지면서 남강 범람의 영향을 안 받는 넓은 농토가 있었기에 인구가 꽤 많은 지역이었다. 원래는 사설철도이던 경남선의 종착점 또한 [[군북역]]이었다. 이후 이 철도를 [[조선총독부]]가 매수하여 [[진주역]]까지 연장시켰다. 경전선 철도 부설로 인해 군북면이 성장했다고 생각하는 면민들이 많은데, 실은 조선시대부터 주요한 교통의 요지였다. 상기한 것처럼 서부경남의 물동량이 부산이나 마산으로 오기 위해서는 의령을 거쳐야 하는데 정비사업 이전의 남강은 범람으로 악명높아 곳곳에 늪지대를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길이 여기밖에 없었다는 말. [[곽재우]] 장군은 이런 지형적 특성을 역이용하여 함안쪽에서 넘어오는 왜군들을 죄다 물고기밥으로 만들어버렸다. 이른바 정암진 전투. 역설적으로 이런 늪지대의 민물수자원들은 군북장을 풍성하게 해 주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바닷가 시장도 아닌데 붕어 파는 어판장이 있었을 정도. 당시의 인구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로 과거 [[국민학교]]가 있던 시절에는 면 중심지인 군북국민학교 외에도 사촌국민학교, 명관국민학교, 수곡국민학교, 하림국민학교, 유현국민학교, 월촌국민학교까지 총 7개의 학교가 있었을 정도. 분교가 아니다! 이 정도면 웬만한 현재의 신도시 단지 수준의 인구분포와 맞먹는다. 그러나 현재는 군북초등학교와 면 중심지에서 꽤 떨어진 월촌초등학교만이 폐교를 면하고 남아 있으며, 사촌초등학교 등 나머지는 군북초등 분교로 격하되었다가 1994년부터 1999년까지 모두 폐교, 통합되었다. 중고등학교는 군북중, 군북고가 있다. 군북초등학교는 1921년 4월 보통학교로 개교했으며 [[효성그룹]] 창업주인 [[조홍제]] 회장이 살아있을 당시 이 학교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줬다. 비록 본인은 인근의 지수초등학교를 나왔으나[* 이 당시 근방의 초등교육기관이 지수초등 뿐이었다. 참고로 LG, GS, 효성의 창업주 세 사람이 모두 지수초등학교 동기다.] 조홍제가 창업한 효성그룹의 모태가 되는 '군북산업'의 이름이 바로 군북에서 따온 것을 보면 고향에 대한 애착은 확실히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하 조홍제의 집안인 [[함안 조씨]] 문중이 현 군북역 바로 앞동네인 군북면 신창리에 터 잡고 있고, 현재도 군북역에서 멀지 않은 곳(명관리로 넘어가는 산어귀)에 재실이 있으며 경전선 철로가 재실 뒷산을 깎고 지나간다. 참고로 군북은 함안 조씨 외에도 천석꾼 집안이 여럿 배출된 동네다. 이러한 교육환경과 경제적 배경으로 인해 중부경남 지방 중에서는 [[3.1 운동]]이 가장 거세게 일었던 곳이기도 하다. 이 동네를 통과하는 도로명이 [[의산삼일로]]인 이유이기도 하며 군북초등 뒷산에 3.1운동 위령비가 서 있다. 그러나 경상남도는 [[1960년대]]~[[1990년대]]에 [[경부선]]과 [[경부고속도로]]가 있는 경남 동부가 크게 발전된 반면, 남해고속도로 [[군북IC|군북 나들목]] 건설 이후부터 경남 서부의 인구는 급속도로 감소했으며 경전선을 통하는 철도 교통의 쇠퇴로 인해 물동량이 [[군북역]]을 거치지 않게 되었다. [[장지IC]] 접속도로가 개량되면서 군북면은 경남 서부의 쇠락과 함께 인구 유출이 폭발적으로 증가했으며, 그 결과 현재는 면 자체가 시골로 전락했다. [[제39보병사단|39사단]]이 [[창원시]]에서 [[함안군]]으로 이전해 온다고 했을 때 면민들이 발벗고 나서서 유치 운동을 벌였을 정도다. [[의령군]], [[진주시]], [[창원시]] [[마산합포구]]와 접한다. [[의령군]]에는 [[고속도로/대한민국|고속도로]]가 없기 때문에, [[의령군]] 주민들이 고속도로를 통해 외지로 나갈 때 필수적으로 거치는 곳이다. 남강을 건너가면 의령군 의령읍과 바로 연결된다. 남강을 건너는 정암교는 트러스트 강구조 형식의 경간을 지니며 1955년 개통했으나[* [[고령교]]보다 2년 이전이다. 상기 이유대로 서부경남 물동량에 매우 중요한 루트이다.] 현재는 노후화로 통행이 금지되어 있고 그 옆에 철근 콘크리트로 뚫은 신 정암교를 놓았다. 이 구간은 원래 [[1004번 지방도]]였으나 이후 [[67번 지방도]]로 격상되고, 현재는 [[79번 국도]]로 격상되어 있다. 중생대 [[백악기]] 말에는 호수였고 신생대 이후로도 [[남강]]의 범람원이었던 지형이기 때문에 면내 구릉지가 대부분 황토산이며 가끔 산중턱의 바위를 뒤져보면 [[연흔]]화석도 발견된다. 과거에는 군북초등학교 뒷산이나 구 원북역 쪽에 고령토를 캐는 공장이 있었지만 현재는 생산이 중단되었다. 남강의 범람원과 감입곡류로 인해 면 북쪽에 유전늪 등 대형 습지가 많았지만 현재는 모두 매립되어 농토로 변했다. 몇몇 농토와 구릉지는 1989년 면소재지 옆 지두리에 조성된 군북농공단지와 2010년 군북IC옆에 조성된 공장부지로 탈바꿈했다. 그리고 사도리는 마을 전체가 사라졌다(....) 이 외에도 [[제39보병사단]]의 이전으로 소포리, 동촌리 일부도 사라졌다.[* 구 지명으로 붕듸미, 태실이라고 부르던 골짜기다.] 주요 관광지로는 ~~동네 앞산 취급하는~~ 백이산과 서산서원, [[원북역]], 방어산 마애불, 의상대[* 의상대사가 세웠다는 암자이다.], 오봉산 성전암 등이 있다. 다만 자동차가 없으면 연계 대중교통은 불편한 편. 군북IC에서 의령 쪽으로 가다 보면 나오는 ~~광활한 들판~~ 월촌리는 [[수박]] 산지로 유명한데, [[지리적 표시제/대한민국]]에 "함안 수박"으로 등록되어 있기도 하다. [[강호동]] 시절 [[1박 2일]]에 나온다고 해서 온 면민들이 테레비 앞에 앉아서 본방사수를 했는데 생각보다 크게 조명되지는 않았다(...) 수박이 유명한 동네라 그런지 군북 사람들은 수박 겉껍질을 잘 말려서 박나물을 무쳐 먹기도 하고[* 군북 동네에 여름에서 초가을에 보면 지붕이나 아스팔트 위에 고추 말리듯 박나물을 널어놓은 광경을 볼 수 있다.] 심지어 옛날에는 말리지도 않은 생 수박껍질을 [[된장찌개]]에 넣어먹기도 했다. 요즘은 동네 마트만 가도 [[두부]]나 [[애호박]] 같은 다른 부산물들이 잔뜩 쌓여있으니 옛 이야기가 된 듯. 장지리, 월촌리, 원북리 등 북부와 서부 지역은 원래 죽남면이었으나, 1933년 군북면에 편입됐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