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안군/행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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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함안군행정(칠원읍승격반영).png

1. 읍
1.2. 칠원읍
2. 면
2.2. 대산면
2.3. 법수면
2.4. 산인면
2.5. 여항면
2.6. 칠북면
2.7. 칠서면
2.8. 함안면



1. 읍[편집]



1.1. 가야읍[편집]


가야읍




읍소재지는 말산리, 함안군청도 말산리에 있다. 관할 법정리는 11개이다.[1] 인구는 17,594명.[A]

함안군의 중심지. 초등학교 이름에서 보듯 옛 안라국(아라가야)[2]의 중심지로서 역사적으로 가야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지역이다. 말이산 고분군 등 유적지가 몇 군데 있다. 특히 군청 뒷편에 고분군이 여럿 있어서 관광하러 외국인 관광버스가 군청 주차장에 들어오곤 한다고... 여기서 포대 깔고 미끄럼타다가 관리인한테 혼난 초딩들이 부지기수다 최근의 발굴결과에 의하면 옛 안라국의 중심지는 고분이 있는 현 가야읍내가 아닌 함안공설운동장 너머 구릉지 쪽이라고 한다.[3] 이 외 함안소방서, 함안우체국 등이 있다. 학교는 가야초, 아라초, 중앙초, 함안중, 함안여중, 명덕고, 함안고가 있다.

원래 남강이 범람하던 지역이라 영 사람 살 곳이 못 되던 가야면은 경전선 철로의 개통과 지속적인 개간으로 농토가 늘어나며 인구가 모여들었다.[4] 이후 철도를 끼고 계속 발전하다가 1954년 6.25로 쑥대밭이 된 함안면에서 함안군청이 이전하여 1979년에 가야읍으로 승격된다. 현재도 함안군의 중심지로써 거의 모든 공공시설은 가야읍에 소재하고 있다. 함안군 내에서 분교가 아닌 독립된 초등학교이면서 10학급 이상인 학교가 두 곳 이상 있는 유일한 지역(가야초등학교, 아라초등학교).[5]

남해고속도로 함안 나들목이 있다. 과거 경전선(경남선) 개통 당시 함안면의 중심지였던 봉성리에 역을 놓지 못해 함안역이 가야에 부설되었고, 이후 시가지가 급격히 커졌다. 현재 함안역은 2012년 경전선 복전화 및 선로 이설, 선형 개량으로 인해 바로 아래에 나올 함안면 괴산리로 이전했다. 제 자리로 찾아간 셈?

상기한 대로 함안군 내 교통의 집결지이다. 함안역은 함안면 괴산리로 옮겨갔지만 여전히 남해고속도로가 지나며 79번 국도도 통과한다. 북으로는 법수면을 거쳐 의령군 정곡면으로, 남으로는 함안면을 거쳐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북면-진동면으로, 서로는 군북면을 거쳐 의령군과 진주시로, 동으로는 함마대로를 거쳐 창원시 마산회원구 내서읍으로 연결된다.

백자 멜론이 특산물이다.


1.2. 칠원읍[편집]


파일:external/c4e448cd0801b093a4f36ca67a890e67a5f8486d8fa5d195e4a389f4fa122ab9.gif

면적
50.59㎢
행정구역
10개리(34개 마을)[6]
기구
5개 담당, 19명
인구
18,476명[A]
기업체
632개 업체(일반 630, 농공단지 2개소)
의료시설
보건지소 1, 병(한)의원 15, 약국 6
교육시설
5개소(초등 4, 중등 1)
보육시설
29개소
노인복지시설
경로당 43
링크
칠원읍사무소

읍소재지는 구성리이며 과거 칠원군의 중심지였다. 창원시 마산회원구 내서읍과 매우 인접하여, 내서읍 아파트 단지가 칠원읍 지역까지 확장하면서 함안군 내에서 가장 급격히 인구가 증가하였다. 현재는 군청소재지인 가야읍보다도 인구가 많으며, 읍 승격 요건인 인구 2만 명을 돌파하여 2015년 1월 1일 부로 칠원읍으로 승격되었다.읍 승격 확정. 그러나 다시 인구가 감소해 2만명 아래로 다시 떨어져서 반등을 못하고 있는 상황..

칠원향교, 함안 용산리 함안층 새발자국 화석 산지가 있다. 남해고속도로중부내륙고속도로가 교차하는 칠원분기점중부내륙고속도로 요금소인 칠원TG가 있다. 이어 칠원교회 및 산돌손양원기념관이 있다.

역사적으로 칠원은 삼한시대에 변진(弁辰) 12개국의 하나인 접도국(接途國) 이었으며, 가야시대에 와서는 칠포국(漆浦國)이었다. 신라 때에는 칠토현(漆吐縣)이라 하였으나 신라경덕왕16년(757년)에 칠제현(漆堤縣)으로 개칭되었다. 고려 태조23년(940)에 칠원으로 칭하였으며, 현종9년(1018)에 금주(김해)의 속현이 되었다.

1906년 함안군과 합병되면서 그 이름을 그대로 이어받아 칠원면이라 칭하였으며, 1983년 2월 15일 칠북면 운서리 및 운곡리의 4개 마을이 편입되었고, 2000년 9월 29일 무기리 무기마을을 무기1리, 무기2리 마을로 분동하였다.(10개리 26개 마을)

연개장터 의거 후 23일에 칠원교회 교인들과 애국지사들은 칠원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총 4번 실시했는데, 그 중 4월에 세 번(3일, 8일, 13일)이나 만세를 외쳤다. 다음은 산돌손양원기념관에서 인용한 글이다.

굴복하지 않는 나라사랑을 펼치다: 칠원만세운동

칠원만세운동은 칠북면의 이령교회를 통하여 정보를 입수한 칠원면의 칠원교회 교인들과 애국지사들은 철저한 준비과정을 거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특히 사랑의 원자탄으로 불리는 손양원 목사의 아버지인 손종일(孫宗一) 장로와 엄주신, 박순익, 윤형규, 신영경 등이 주도적으로 만세운동의 준비부터 거사까지 이끌게 된다. 특히 만세운동의 거사를 네 번이나 전개하면서 많은 이들이 구타, 고문, 징역 등의 고초를 겪게 되지만 이에 굴복하지 않고 민족의 독립을 향한 열망을 칠원만세운동을 통해서 나타내게 된다. 손종일, 엄주신, 박순익, 윤형규, 신영경 등이 주도적으로 칠원만세운동의 준비부터 거사까지 이끌게 된다.


이 지역은 내서읍 아파트 단지의 영향으로 브랜드가 있는 GS건설의 자이벽산건설의 블루밍 1,2차가 함께 들어오며 급격하게 팽창한 케이스다. 또한 입지가 좋은 것도 포인트. 그 후 대단위 아파트의 형성 등으로 주민편의를 고려, 2008년 11월 19일 구성리 이현마을을 동성, 이현 마을로 분동, 오곡리 호곡마을을 호곡, 자이1, 자이2, 자이3마을로 분동, 무기리 무기1마을을, 무기1, 갈티마을로 분동, 2009년 7월 호곡마을의 벽산블루밍 아파트의 분동, 2013년 9월 남구마을과 신정마을의 분동, 2014년 12월 벽산1마을과 벽산2마을의 분동으로 현재 10개리 34개 마을(원구성, 남구, 신정, 이현, 동성, 덕산, 용산, 서상, 유상, 유하, 달전, 장암, 동암, 오곡, 부곡, 호곡, 자이1, 자이2, 자이3, 벽산, 야촌, 곡촌, 석전, 양정, 무기, 갈티, 다숲대동, 돈담, 산정, 운서, 학동, 운동, 덕암 등)을 관할하고 있다. 학교는 예곡초, 유원초, 칠원초, 호암초, 호암중이 있다.


2. 면[편집]



2.1. 군북면[편집]


파일:external/www.haman.go.kr/01_02_p01.gif

면적
80.6㎢(군의 19.3%)
행정구역
17개리(37개 마을 120개반 92개 자연마을)[7]
인구
5,817명[A]
교육시설
4개교 381명 (초등 2, 중학 1, 고등 1)
의료시설
10개소(보건지소 1, 보건진료소 1, 의원 3, 약국 3, 치과 1)
급수시설
광역상수도 20개동 1,867전, 간이상수도 39개동 954호, 기타 14호
주민자치센터 현황
10반 150명(회원)
지역특산물
방울토마토, 수박
링크
군북면사무소

면소재지는 덕대리이다. 남해고속도로 군북 나들목, 장지 나들목, 경전선 군북역이 있다. 의령군, 합천군, 거창군 등지에서 부산, 마산으로 가는 인구와 물동의 집산지면서 남강 범람의 영향을 안 받는 넓은 농토가 있었기에 인구가 꽤 많은 지역이었다. 원래는 사설철도이던 경남선의 종착점 또한 군북역이었다. 이후 이 철도를 조선총독부가 매수하여 진주역까지 연장시켰다.

경전선 철도 부설로 인해 군북면이 성장했다고 생각하는 면민들이 많은데, 실은 조선시대부터 주요한 교통의 요지였다. 상기한 것처럼 서부경남의 물동량이 부산이나 마산으로 오기 위해서는 의령을 거쳐야 하는데 정비사업 이전의 남강은 범람으로 악명높아 곳곳에 늪지대를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길이 여기밖에 없었다는 말. 곽재우 장군은 이런 지형적 특성을 역이용하여 함안쪽에서 넘어오는 왜군들을 죄다 물고기밥으로 만들어버렸다. 이른바 정암진 전투. 역설적으로 이런 늪지대의 민물수자원들은 군북장을 풍성하게 해 주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바닷가 시장도 아닌데 붕어 파는 어판장이 있었을 정도.

당시의 인구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로 과거 국민학교가 있던 시절에는 면 중심지인 군북국민학교 외에도 사촌국민학교, 명관국민학교, 수곡국민학교, 하림국민학교, 유현국민학교, 월촌국민학교까지 총 7개의 학교가 있었을 정도. 분교가 아니다! 이 정도면 웬만한 현재의 신도시 단지 수준의 인구분포와 맞먹는다. 그러나 현재는 군북초등학교와 면 중심지에서 꽤 떨어진 월촌초등학교만이 폐교를 면하고 남아 있으며, 사촌초등학교 등 나머지는 군북초등 분교로 격하되었다가 1994년부터 1999년까지 모두 폐교, 통합되었다. 중고등학교는 군북중, 군북고가 있다.

군북초등학교는 1921년 4월 보통학교로 개교했으며 효성그룹 창업주인 조홍제 회장이 살아있을 당시 이 학교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줬다. 비록 본인은 인근의 지수초등학교를 나왔으나[8] 조홍제가 창업한 효성그룹의 모태가 되는 '군북산업'의 이름이 바로 군북에서 따온 것을 보면 고향에 대한 애착은 확실히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하 조홍제의 집안인 함안 조씨 문중이 현 군북역 바로 앞동네인 군북면 신창리에 터 잡고 있고, 현재도 군북역에서 멀지 않은 곳(명관리로 넘어가는 산어귀)에 재실이 있으며 경전선 철로가 재실 뒷산을 깎고 지나간다.

참고로 군북은 함안 조씨 외에도 천석꾼 집안이 여럿 배출된 동네다. 이러한 교육환경과 경제적 배경으로 인해 중부경남 지방 중에서는 3.1 운동이 가장 거세게 일었던 곳이기도 하다. 이 동네를 통과하는 도로명이 의산삼일로인 이유이기도 하며 군북초등 뒷산에 3.1운동 위령비가 서 있다.

그러나 경상남도는 1960년대~1990년대경부선경부고속도로가 있는 경남 동부가 크게 발전된 반면, 남해고속도로 군북 나들목 건설 이후부터 경남 서부의 인구는 급속도로 감소했으며 경전선을 통하는 철도 교통의 쇠퇴로 인해 물동량이 군북역을 거치지 않게 되었다. 장지IC 접속도로가 개량되면서 군북면은 경남 서부의 쇠락과 함께 인구 유출이 폭발적으로 증가했으며, 그 결과 현재는 면 자체가 시골로 전락했다. 39사단창원시에서 함안군으로 이전해 온다고 했을 때 면민들이 발벗고 나서서 유치 운동을 벌였을 정도다.

의령군, 진주시, 창원시 마산합포구와 접한다. 의령군에는 고속도로가 없기 때문에, 의령군 주민들이 고속도로를 통해 외지로 나갈 때 필수적으로 거치는 곳이다. 남강을 건너가면 의령군 의령읍과 바로 연결된다. 남강을 건너는 정암교는 트러스트 강구조 형식의 경간을 지니며 1955년 개통했으나[9] 현재는 노후화로 통행이 금지되어 있고 그 옆에 철근 콘크리트로 뚫은 신 정암교를 놓았다. 이 구간은 원래 1004번 지방도였으나 이후 67번 지방도로 격상되고, 현재는 79번 국도로 격상되어 있다.

중생대 백악기 말에는 호수였고 신생대 이후로도 남강의 범람원이었던 지형이기 때문에 면내 구릉지가 대부분 황토산이며 가끔 산중턱의 바위를 뒤져보면 연흔화석도 발견된다. 과거에는 군북초등학교 뒷산이나 구 원북역 쪽에 고령토를 캐는 공장이 있었지만 현재는 생산이 중단되었다. 남강의 범람원과 감입곡류로 인해 면 북쪽에 유전늪 등 대형 습지가 많았지만 현재는 모두 매립되어 농토로 변했다. 몇몇 농토와 구릉지는 1989년 면소재지 옆 지두리에 조성된 군북농공단지와 2010년 군북IC옆에 조성된 공장부지로 탈바꿈했다. 그리고 사도리는 마을 전체가 사라졌다(....)

이 외에도 제39보병사단의 이전으로 소포리, 동촌리 일부도 사라졌다.[10] 주요 관광지로는 동네 앞산 취급하는 백이산과 서산서원, 원북역, 방어산 마애불, 의상대[11], 오봉산 성전암 등이 있다. 다만 자동차가 없으면 연계 대중교통은 불편한 편.

군북IC에서 의령 쪽으로 가다 보면 나오는 광활한 들판 월촌리는 수박 산지로 유명한데, 지리적 표시제/대한민국에 "함안 수박"으로 등록되어 있기도 하다. 강호동 시절 1박 2일에 나온다고 해서 온 면민들이 테레비 앞에 앉아서 본방사수를 했는데 생각보다 크게 조명되지는 않았다(...) 수박이 유명한 동네라 그런지 군북 사람들은 수박 겉껍질을 잘 말려서 박나물을 무쳐 먹기도 하고[12] 심지어 옛날에는 말리지도 않은 생 수박껍질을 된장찌개에 넣어먹기도 했다. 요즘은 동네 마트만 가도 두부애호박 같은 다른 부산물들이 잔뜩 쌓여있으니 옛 이야기가 된 듯.

장지리, 월촌리, 원북리 등 북부와 서부 지역은 원래 죽남면이었으나, 1933년 군북면에 편입됐다.


2.2. 대산면[편집]


대산면





면소재지는 구혜리, 관할 법정리는 8개이다.[13] 인구는 3,260명.[A]

수박 재배로 유명하다. 함안군에서 미는 특산물 중 가장 대표적일 듯. 다른 함안군 내 수박보다도 더 당도가 높고 유명하다. 참고로 호남 지방에서 수박으로 알아주는 곳은 전라북도 고창군인데, 고창군의 수박 주산지도 대산면이다. 학교는 대산초, 대산중, 경남로봇고[14]가 있다.

남강을 건너면 의령군 지정면과 연결된다. 그러나 함안군 내에서는 꽤 외따로 떨어져 있는 곳이라 교통이 불편하다. 칠원 쪽으로 넘어가려 해도 산이 가로막고 있고, 가야읍으로 넘어가려 해도 산이 가로막는다. 그리고 면의 서쪽과 북쪽은 남강이 가로막고 있는데다 면소재지 구혜리는 아예 섬이다(...) 정확히는 옛 남강 지류가 우각호처럼 떨어져나와 읍내를 동그랗게 감싸고 있는 형태. 이런 교통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칠원을 거쳐 창원(마산회원구)으로 접속하는 4차선 도로가 2010년대 초에 착공되었는데, 도에서 예산순위가 밀린 탓인지 한군데 공사하고 쉬고 또 공사하고를 반복하다가 근 10여년에 걸쳐서 완공되었다.


2.3. 법수면[편집]


법수면




면소재지는 우거리, 관할 법정리는 9개이다.[15] 인구는 2,763명.[A]

1029번 지방도의 시종착점이 있다. 남강을 건너면 의령군 정곡면과 연결된다. 과거에는 숫제 늪지대였는데 현재의 우포늪처럼 생태계의 보고였다. 뉴턴 한국판의 창간준비호가 이 곳을 특집으로 다뤘을 정도. 그러나 한창 산업화의 정점에 치닫던 1980년대에 죄다 매립되어 버렸다. 지금은 창원시의 배후지역으로서 골짜기마다 각종 중소규모 공장들이 많이 들어서 있다. 이 때문에 화물차도 많이 다니고, 특히 남강을 건너 의령군 정곡면으로 이어지는 길이 뚫리면서 새로운 교통로로 주목받고 있다.[16] 학교는 법수초가 있다.

함안군이 남강의 범람을 막기 위해 조성한 악양둑방(3.38km)의 일부 구간에 계절에 따라 양귀비, 코스모스 등을 심어 꽃단지로 만드는 관광 사업을 펼치고 있는데 입소문을 타고 인기를 끌면서 새로운 관광지가 되고 있다. 특히 강주리(강주마을)의 해바라기 단지는 늦여름에 절정을 이루며 인근 창원, 진주뿐만 아니라 대구나 울산에서 오는 관광객도 있어서 지역뉴스 인터뷰에 나올 정도다.

창원으로 가는 농어촌버스가 들어오지않는 유일한 지역이기도 하다

2.4. 산인면[편집]


산인면




면소재지는 송정리, 관할 법정리는 7개이다.[17] 면적은 36.86㎢, 인구는 2,668명.[A]

북쪽으로 칠원읍, 대산면, 동쪽으로 창원시 마산회원구 내서읍, 남쪽으로 여항면, 서쪽으로 함안면, 가야읍과 접한다. 남해고속도로남해고속도로제1지선이 지나며 경전선이 동서로 가로질러 가야읍 및 인접한 각 군과 연결된다. 남해고속도로 산인 분기점이 있어 남해고속도로 본선과 제1지선이 갈라진다. 제1지선의 경우 갈라지자마자 바로 요금소를 지나서 무료 구간으로 들어간다. 과거 경전선 산인역이 있었으나 폐역 크리.

면 자체가 조그만하기 때문에 동네 사람들끼리 친하게 지낸다 카더라. 고려 말 낙향한 선비 집안이 대대로 살아온 고려동 유적지가 있다. 두문동은 전설이지만 고려동은 실재한다

군 내에서 흔히 산인면이라 부르는 곳은 현재 남해고속도로가 지나는 분지 지형만 일컫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위 행정구역 지도나 위성으로 보면 아래쪽에 길쭉하게 하나가 더 붙어있는데 '입곡'이라는 동네다. 골짜기는 크지만 골짜기 앞이 저수지(입곡군립공원)로 막혀 있고 함안면으로도, 가야읍으로도, 산인면 본동네로도 나오려면 죄다 고개를 넘어야 하는 괴상한 지형이라 아예 '입곡'이라고 따로 부르며 산인 생활권으로 분류하지는 않는다. 풍광이 좋아서 군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과거 산인역의 주요 밥줄 중 하나.

학교는 문암초, 산인초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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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여항면[편집]


여항면




면소재지는 외암리, 관할 법정리는 4개이다.[18] 인구는 890명[A]으로 함안군 읍면 중 인구가 가장 적다.

여항산, 여항저수지가 있다. 학교는 외암초가 있다. 79번 국도를 통해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북면과 연결된다. 1021번 지방도도 본래 진북면과 연결되어야 하지만 도로개설 계획이 없어 감재고개를 넘지 못하고 있다. 최근에는 창원지역에서 살림 좀 핀 사람들의 주말농장 내지 별장지로 각광받으며 미묘하게 땅값이 올랐다(...)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의 북쪽 골짜기 지역인 여양리, 고사리, 평암리, 금암리의 4개 리는 원래 여항면 관할이었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때만 해도 이 곳에서는 삼진 쪽으로 가는 것보다 도보로 고개 하나 넘어 여항으로 오는 게 편했기 때문. 일제 말기인 1944년에 이 지역을 관할하는 산서출장소가 설치되었다. 이후 자동차교통이 발달하면서 생활권이 진전으로 편입되었으며, 결국 1989년 산서출장소를 폐지하고 의창군(현 창원시)에 이 지역을 넘겨주었다.


2.6. 칠북면[편집]


칠북면




면소재지는 검단리, 관할 법정리는 7개이다.[19] 인구는 1,848명.[A]

특산물이 복숭아라고 하지만 그렇게 많지는 않다. 학교는 칠서초 이령분교 하나 뿐이다. 60번 지방도를 통해 창원시 의창구 북면과 연결된다.

1919년 3월 9일에 연개장터 의거로써 3.1 운동의 불씨를 지핀 지역이다. 이령교회의 김세민 장로가 매우 체계적인 방법으로 연개장터 의거를 추진했다. 다음은 산돌손양원기념관에서 인용한 글이다.

경남지역 최초의 만세운동을 전개하다: 연개장터 의거

1919년 3월 9일에 거사하여 경남 전역에 3.1운동의 불씨를 지핀 '연개장터 의거'는 당시 함안 칠북면 이령교회의 장로를 맡고 있었던 김세민 장로의 주도로 매우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추진되었다. 김세민 장로는 자신의 사위이자 항일 독립 운동가였던 배동석 선생으로부터 3.1운동을 준비 중인 서울 상황에 대해 듣고 연개장터 의거를 준비하였다. 이령교회를 중심으로 한 연개장터 의거 이후 3월 12일과 17일에는 대산교회가 주축이 된 평림의거기 일어났고, 특히 칠원에서는 3월 23일과 4월 3일, 8일, 13일 등 일경의 감시와 제재가 극에 달한 시기였음에도 4차례에 걸쳐 조직적으로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2.7. 칠서면[편집]


칠서면





면소재지는 청계리, 관할 법정리는 9개이다.[20] 인구는 5,076명.[A]

중부내륙고속도로 칠서 나들목 및 칠서공단이 있다. 창원시 마산회원구 내서읍 아파트 단지는 이 공단의 배후 주거지 역할도 한다. 남지대교창녕낙동강교를 통해 창녕군과 연결된다. 부울경 지역 우유부산우유 공장이 이곳에 있다. 학교는 칠서초(이룡분교), 칠성중, 칠원중, 칠원고등이 있다.

기업과 공장이 많다보니 면사무소가 크고 아름답다. 칠원읍사무소의 3배 정도 되는 규모. 그런데 면소재지는 허접한 반면 소규모 시가지가 여기저기 있다. 남지 건너편인 용성리, 칠서산단 옆에 있는 대치리, 그리고 칠원읍내 들어가기 직전의 무릉리 등..


2.8. 함안면[편집]


함안면




면소재지는 북촌리, 관할 법정리는 6개이다.[21] 인구는 2,368명.[A]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함안군의 조선시대 중심지(군청 소재지)였다.[22] 그러나 경전선 철도가 가야면(현 가야읍)을 거치게 부설되면서 가야면이 커졌고, 결정타로 한국전쟁으로 인해 함안면 시가지가 쑥대밭이 돼버리는 바람에 결국 1954년 군청이 가야면으로 이전해 버렸다. 그러나 2012년 경전선 복선화 및 선로 이설로 인해 함안역을 드디어 가야읍으로부터 가져와서 괴산리로 옮겼다. 그러나 현실은......

함안향교가 있으며, 봉성리 북쪽 가야읍과의 경계에 이수정이라는 곳이 있다. 조선시대에 호수에 인공섬과 정자를 만들어놓고 다리로 연결해놓은 곳인데 근처 수양버들과 어우러져 멋진 경치를 보여준다. 학교는 함안초, 함성중이 있다.

79번 국도로 여항면을 거쳐 창원시 마산합포구로 연결되며, 최근에는 파수리-신음리를 지나 39사단이 주둔하는 군북면으로 바로 넘어가는 도로가 뚫렸다. 원래부터 있던 길이었고 특히 한국전쟁 당시에는 열차가 끊긴 서부경남 피난민들이 도보로 탈출해오던 주요 루트였다. 이후 우회로로서 1004번 지방도(현 79번 국도의 구간)가 필동리 쪽으로 넘어가면서 2차선 포장이 되며 신음리를 지나는 이 길은 우마차도로 정도로 잊혀졌다가 늘어나는 교통량으로 인해 길을 확장하게 된 것. 이 길을 통해 39사단 장병들은 군북역 외에도 함안역을 이용할 수 있다. 단, 기존에 있던 춘곡-군북간 도로는 39사단으로 인해 폐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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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야리·검암리·광정리·도항리·말산리·묘사리·사내리·산서리·신음리·춘곡리·혈곡리[A] A B C D E F G H I J 2023년 6월 주민등록인구통계[2] ○○가야라는 표기는 고려시대 이후 정착되었다.[3] 사실 당연한 것이, 현 가야읍 시가지는 일제강점기 때까지만 해도 늪지대 앞에 툭 튀어나와 있는 구릉지였다.[4] 범람 자체는 남강댐 완공 이후 완전히 잡혔으나, 지금도 물이 불면 하검암리까지 강물이 역류해 올라온다.[5] 단순히 두 곳으로 치자면 군북면 내에 군북초등학교와 월촌초등학교의 경우도 있다.[6] 구성리·무기리·예곡리·오곡리·용산리·용정리·운곡리·운서리·유원리·장암리[7] 덕대리·동촌리·명관리·모로리·박곡리·사도리·사촌리·소포리·수곡리·영운리·오곡리·원북리·월촌리·유현리·장지리·중암리·하림리[8] 이 당시 근방의 초등교육기관이 지수초등 뿐이었다. 참고로 LG, GS, 효성의 창업주 세 사람이 모두 지수초등학교 동기다.[9] 고령교보다 2년 이전이다. 상기 이유대로 서부경남 물동량에 매우 중요한 루트이다.[10] 구 지명으로 붕듸미, 태실이라고 부르던 골짜기다.[11] 의상대사가 세웠다는 암자이다.[12] 군북 동네에 여름에서 초가을에 보면 지붕이나 아스팔트 위에 고추 말리듯 박나물을 널어놓은 광경을 볼 수 있다.[13] 구혜리·대사리·부목리·서촌리·옥렬리·장암리·평림리·하기리[14] 옛 대산고, 여자축구부는 여민지를 배출하였다.[15] 강주리·대송리·백산리·사정리·우거리·윤내리·윤외리·주물리·황사리[16] 서부경남과 창원을 이어주는 루트는 크게 1)의령-정암-군북IC, 2)합천-초계-우포늪-창녕을 잇는 루트밖에 없었다. 아니면 아예 고령까지 올라갔다 중부내륙을 타고 내려오든가...[17] 내인리·모곡리·부봉리·송정리·신산리·운곡리·입곡리[18] 내곡리·외암리·주동리·주서리[19] 가연리·검단리·덕남리·봉촌리·영동리·이령리·화천리[20] 계내리·구포리·대치리·무릉리·용성리·이룡리·청계리·태곡리·회산리[21] 강명리·괴산리·대산리·봉성리·북촌리·파수리[22] 조선시대 이전 가야, 신라 시절에는 가야읍이 중심지였기 때문에 함안의 '원래 중심지'라고 하기엔 애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