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양대학교/서울캠퍼스 (문단 편집) === 학생운동과 대학문화 === 과거 한양대는 전국조직에서 [[네임드]][* 전대협 한총련 의장]들을 많이 배출했는데, 5기 한총련 이적단체 판결 이후 [[한총련]]이 쇠락을 길을 걷기 전까지[* 한총련 4기 이전이다.] 10명의 의장중 3명이 한양대 출신이다.[* 고려대 3명 전남대 3명, 나머지는 서울대 한 명] 구체적으로 전대협 3기의장 임종석(무기재료 86), 5기의장 김종식(사회 87), 한총련 1기의장 김재용(정외 88) 등,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정도로 학생운동의 파급력이 대단했던 8-90년대 사회 상황을 가정해본다면 의장을 배출한 학교가 주목 받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얘기다. 덕분에 8-90년대 학번 일반 학생들이 전의경에 들어가서 학교가 한양대라고 하면 그 이유만으로 엄청난 비난과 구타를 당했다고 한다. 이는 이 학번대 한양대를 나온 자교 출신 교수들의 공통된 증언이다.[* 단, 이 서술은 1980년대 중후반에서 1990년대의 이야기이다. 1980년대 초중반까지는 공대가 중심인 학교 답게 이른바 문과 중심인 타 대학에 비해 학생운동의 세가 약했다. 당시 학생운동가에서 말한 이른바 "메이저 캠"은 서연고서성 5개 대학이고 한양대는 80년대 후반이나 되어야 메이저 캠으로 대접받았다. 여담으로 한양대는 1992년 마지막 전대협 발대식을 자교 캠퍼스에서 개최했다. (이듬해 최초 한총련 발대식은 고려대학교)] [youtube(4tIpp4ND4XA)] 특히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은 워낙 경찰에 안잡혀 별명이 임길동이었는데, 인문대 올라가는 계단에 비밀 공간을 파고 일주일간 숨어있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덤으로 워낙 수려한 외모로 당시 여고생 인기투표에서 연예인을 제치고 1위를 할 정도였다. 당시 잡혔을때 인터뷰가 MBC 뉴스데스크 메인뉴스가 될 정도다.] [[파일:external/pds20.egloos.com/a0106196_4e0d7107864c0.jpg]] (1989년 6월 [[북한/경제/역사/1980년대의 대규모 정책 실패|평양 세계학생축전]] 남한측 집회 참가 행렬.[* 역사상 가장 유명한 택이 있었던 이 집회는 불법 집회로 간주하여 원천봉쇄 했으나 위 사진과 아래 서술처럼 학생들은 들어왔다. 물론 이후 경찰이 학내로 진입, 대거 검거작전을 수행했으며 당시 임종석 전대협 의장은 인문대 배수로를 이용, 학교를 빠져나갔다.]) 뭐 당연한 이야기 겠지만, 네임드들이 많아서 전국적 행사 무슨 무슨 출범식, 무슨 무슨 대회가 계획대로 잘 안된다 싶으면 한양대를 배경으로이었다. 참고로 한양대 사수대 이름은 '''행당불패'''[* 전남대는 오월대, 조선대는 녹두대]였다. 학생운동 역사상 가장 유명한 tac도 한양대를 배경으로 시위 학생들을 가득실은 전철이 학생들이 한양대역에 내릴 것을 우려해서 정차하지 않고 바로 뚝섬역으로 직행하자 뚝섬역에서 학생들이 모두 내린다음 지하철 철로를 뛰어내려 한양대역으로, 그다음 한양대에서 미리 만들어둔 사다리를 내려주자 그걸 타고 한양대 입성했다. 당시 성동경찰서 정보과에서 오늘은 우리가 졌다. 고 총학생회에 전화가 걸려왔다는 이야기 때문에 당시 군대 자대에서 한양대 출신이라고 하면 중대장의 의심어린 눈초리와 함께 면담을 한번 더 해야했다는 웃지못할 선배들의 얘기도 전해진다. 대학문화의 쇠퇴와 더불어 지금은 [[FM]]이라고 불리는 각 단위 꾸밈말[* 90년대 선배들 왈 '사실 한양대에서는 FM이라는 국적 불명의 말 쓰지도 않았다. 고대애들이나 되도않게 FM 이라 불렀지, 우린 언제나 아지라 그랬다.' 참고로, 아지는 agitation의 준말][* 아직 인문대는 다 아지라고 한다.]을 통한 자기 소개는 봄만 되면 캠퍼스 곳곳과 왕십리 술집과 한양부페에서 흔히 볼 수 있었는데, 심지어 자기 이름 앞에다도 붙였다. 90년대에는 학생들이 주옥같은 한양대의 지리적 특징들을 이용해서 시위진압 중인 경찰들에게 어느새 고지점령전을 선물해주는 상황이 자주 벌어지게 되어 캠퍼스 자체가 한양요새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고지대도 고지대지만 학교 건물들이 구름다리 등으로 곳곳이 연결되어 있는 것 등은 외부인들이 알긴 알아도 쉽게 익숙해 질 수 없다. 당연 배수로 같은 시설물은 말할 것도 없다.][* 게다가 웃긴 것 중 하나가, 1989년 당시 학생회관 건물은 5층 건물로 불렸는데 이게 서점 있는 곳이 1층, 로비와 식당 두개 층이 모두 2층(그래서 2층 로비, 2층 식당으로 부름), 이후부터 3층 강당 4층 학생회 5층 식당이였다. 초행자는 헷갈릴 수 밖에 없다. 심지어 5층에서 잘 모르는 계단을 올라가면 옥상이 있는데 이곳에도 몇개 동아리방 가건물이 존재했다. 은닉하기에 최적일 수 밖에.]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예비역 복학생들이 길에 마음먹고 바리케이트를 쌓은 후 군대에서 배운 각종 전술들을 사용하기 시작하면 [[백골단]]도 쉽게 손대지 못했다고 한다. 실제로 96년도 연대사태 시절 한양대 고지[* 사회교육원 앞 주차장. 한양대역 지붕과 그 옆의 왕십리로를 내려다보는 곳이라서 말 그대로 요새처럼 느껴진다.]를 점령한 학생 시위대가 화단 등의 벽돌을 떼어내 투척하는 바람에 학교 내 벽돌들이 흉물스러운 몰골이 되었던 일도 있었다. 사족으로 예나 지금이나 한양대의 '''건축공학과'''와 '''토목공학과'''는 국내에서 톱의 위치를 달리고 있다. 그런 사람들이 학교 지도 한장 펴들고 전략요지에 바리케이트를 쌓았다면? 심지어 인문대 옥상에는 투석기가 있었다는 80년대 90년대 학번의 증언도 심심찮게 들을 수 있으며 사거리는 대략 한마당까지였던 걸로 기억되고 있다. 1997년도에는 한양대에서 개최된 한총련 행사에서 경찰 프락치 오인 사건이 발생했다. 구체적 내용은 [[이석 치사 사건]] 문서 참조. 과거 한양대는 운동권 이미지가 강했으나 2002년에 소리 없는 명예혁명(약칭 소명) 학생회가 등장하여 무려 5년간 이어간다. 그렇게 2002년~2006년 비운동권 학생회가 집권했으나, 이후 비운동권과 운동권이 번갈아 총학생회를 집권해오고 있다. 2008년에는 체인지 포유(Change4U) 총학생회 한총련 사건, [[이정희]] 한양대 강연 취소 사건[[http://www.mt.co.kr/view/mtview.php?type=1&no=2013031216165180983&outlink=1|기사]], 나꼼수의 김용민 한양대 강연은 파리를 날리기도 하는 등 [[http://news.unn.net/news/articleView.html?idxno=110323|기사]] 시간이 지나면서 운동권의 색채를 많이 벗어내고 있다.[* 그러나 [[김용민(1974)|김용민]] 강연은 총학생회가 아니라 한대련 계열이었던 당시 공대 학생회에서, [[이정희]] 강연은 같은 계열의 동아리에서 독단적으로 진행했던 일이다.] 하지만 [[19대 대선]] 때는 대선 후보 초청을 한양대 총학생회가 총대를 매는 등, 여전히 사회정치적 참여는 활발한 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