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러일관계 (문단 편집) ==== [[소련-일본 국경분쟁]] ==== 1930년대에는 [[스탈린]]의 [[대숙청]] 시절 연해주에 거주하던 한국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당했다. 이 과정에서 상당수의 독립운동가 및 그 후손들이 숙청에 희생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일제치하 조선에서는 [[박헌영]]을 비롯한 독립운동가 상당수가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에 경도되었다. 1930년대에는 [[일본 제국]]이 [[만주]]를 침략해 [[만주국]]이란 괴뢰국을 세웠다. 만주를 점령하면서 일본은 소련과 더 넓은 국경선을 두고 대치하게 되었고, 양국 사이의 국경 분쟁이 무력 충돌로 이어질 때도 있었다. 소련과 일본은 [[두만강]] 유역에서 [[하산 호 전투]]를 치루었던 바 있다. 일본은 내몽골 지역에는 [[몽강국]]이라는 괴뢰국을 건설하고, 소련과 국경 분쟁을 벌여 [[할힌골 전투]]에서 패전하였다. 여기서 일본 측은 소련 측의 승리를 축소시켜 보이도록 하기 위해 [[노몬한 사건]]이라고 부르는 편이다. 할힌골 전투의 규모는 하산 호 전투보다 더 큰 편이었다. 발해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를 최초로 주도한 사람들이 바로 러시아계 백군 난민들이었다. > 1931년 9월 10일. 일본 관동군이 랴오닝(遼寧)성 선양(瀋陽) 근처에서 9·18 사변을 일으켜 만주 침략을 본격적으로 벌이기 일주일 전. 하얼빈발 기차에 몸을 싣고 발해 유적 조사를 떠나는 러시아 학자들이 있었다. 중국 정부로부터 제대로 지원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들은 후원금을 모아 어렵게 조사단을 꾸렸다. 그들은 소련이 여권 발급을 거부한 ‘백군파(볼셰비키혁명 때 반혁명 입장에 섰던 부르주아 온건파)’였다. 당시 발해 수도 상경성(上京城) 일대는 비적들이 횡행하는 곳이라서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만주의 역사를 밝히겠다는 일념으로 위험을 감수하며 장정을 감행했다. > > 이 발굴을 이끈 대표자가 러시아 고고학자 포노소프(V. V. Ponosov)였다. 그는 1899년 [[우파(러시아)|우파]]시에서 태어나 1922년 하얼빈으로 건너온 뒤 40여 년간 그곳을 중심으로 헤이룽장(黑龍江) 지역의 고고학을 연구했다. 당시 하얼빈에는 유럽의 학문 체계를 이어받은 당대 최첨단의 고고학자와 생물학자, 지질학자가 많았다. 시민혁명의 여파로 제정러시아의 인텔리겐치아들이 대거 유입됐기 때문이다. 그들은 50년 넘게 하얼빈에 거주하며 고고학연구회를 조직해 체계적으로 만주의 역사를 발굴하고 조사했다. > > 그러나 포노소프를 비롯한 러시아 학자들의 연구 성과는 망명자들의 불행한 삶처럼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일본과 중국에 의해 이용되고 폄하됐기 때문이다. 러시아인들의 발굴 성과는 6개월 뒤인 1932년 3월 [[만주국]]이 성립되면서 일본이 만주 침략을 합리화하는 도구로 전락하고 만다. ‘동아고고학회’의 등장이 그 단초다. 일본은 한반도에 대한 지배가 공고히 되자 곧바로 만주 쪽으로 눈을 돌렸다. 1925년에는 그들의 침략을 역사적으로 합리화하는 동아고고학회를 발족했다. 그 비용은 중국이 지불한 ‘의화단 사건 보상금’으로 운영되었다. 일본의 대륙 침략에 앞장선 동아고고학회는 러시아인의 발굴 자료에 기반, 발해 발굴을 시작한다. > > “만몽(滿蒙)은 한민족의 영토가 아니라 오히려 일본과 관계가 밀접하다.” > > 그렇게 주장하기 시작한 그들은 러시아인들의 발굴 성과를 의도적으로 축소하고 무시했다. 동아고고학회는 설립 초기부터 발해 상경성을 발굴하고 싶어 했다. 사정이 여의치 못해 지켜보고만 있다가 만주국이 성립되자마자 곧바로 발굴단을 조직했다. 이때부터 발해고고학은 만주를 일본의 역사에 연결시키려는 '''[[만선사관]]'''(滿鮮史觀)의 도구로 전락한다. 그리고 '''오늘날 일본 역사학계는 물론 한국 역사학계조차 발해 발굴의 효시가 하얼빈의 러시아 발굴단이 아니라 동아고고학회로 믿고 있는 실정이다.''' >---- > [[https://www.joongang.co.kr/article/13507768#home|#]] 한편 일본이 [[하얼빈]]에 [[731 부대]]를 설치해서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하는 와중에 많은 중국인, 러시아인, 한국인, 몽골인들이 희생당했다. 오늘날에도 일본은 책임 소재를 발뺌하거나 조롱하고 있고 한중러가 공조하여 이를 규탄하는 상황이다.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일제는 한국인 상당수를 납치 등의 방법으로 [[사할린]]에서 강제노동을 시켰다. 2차대전 전후 일본이 패망하고 소련이 남사할린을 점령한 것을 계기로 사할린 섬 내 한인들은 [[소련인]]이 되었는데, 이들과 그 후손들을 [[사할린 한인]]이라고 부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