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러일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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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러일 관련 틀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파일:러시아 국기.svg 파일:일본 국기.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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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국가별 명칭
3. 역사적 관계
3.1. 조선
3.2. 대한제국
3.3. 일제강점기
3.4. 광복 이후
3.5. 21세기
4. 문화 교류
5. 교통 교류
6. 대사관
7.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동아시아대한민국일본, 유라시아러시아 세 나라의 삼각관계이다. 대한민국과 일본의 경제교류는 상당히 큰 수준이다. 한 편 한국은 제2세계 진영에 속한 러시아와도 나름 우호적인 관계이기도 하다. 한국이 제1세계 국가 중에서 러시아 무비자 방문이 가능한 몇 안되는 국가였던 것도 이러한 연유라고 볼 수 있다.


2. 국가별 명칭[편집]


나라마다 국가명을 나열하는 순서가 다르다. 이것은 삼각관계도 일정한 것이 아니라 우선순위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나열 순서를 통해 삼국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일반적으로 대중매체나 언론에서, 그리고 정치권에서 삼국에 관련해서 나올 때는 나 먼저 원리에 의해 기본적으로 -- 순으로 나열한다. 우선 한국에서 부르는 명칭이기 때문에 제일 앞은 한국이 우선이고, 일본과는 역사적/외교적으로 마찰이 있기 때문에 러시아가 두 번째, 일본이 세 번째에 오는 순서가 되었을 수 있다. 아니면 그냥 러시아가 일본보다 더 강대국이기 때문에 먼저 나열했을 수도 있다. 발음상으로 한일러보다는 한러일이 더 괜찮기도 하고.


3. 역사적 관계[편집]



3.1. 조선[편집]


삼국 간의 외교 관계가 본격적으로 엮이기 이전 외교사 관련해서는 기유약조,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 강화도 조약, 조러수호통상조약 문서 참조

을미사변 이후 일본과 친일파들이 조정을 장악하는 상황에 위협을 느낀 조선의 고종이 1896년 아라사공사관으로 피신하는데 이를 아관파천이라 한다. 일본의 공사 고무라 주타로는 아관파천을 주도했던 러시아의 공사 카를 베베르와 회동하여 베베르-고무라 각서를 체결하였고, 일본은 조선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을 인정해야 했다. 또한 같은 해에는 서로가 조선의 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고 각자가 군사적으로 준비되기까지 조선을 완충지대로 남겨둘 것을 골자로 하는 로바노프-야마가타 협정을 체결하였다.


3.2. 대한제국[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러일전쟁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주한 러시아 공사가 베베르에서 알렉세이 스페에르로 교체된 뒤, 조선에 영국인 고문 브라운을 러시아인 고문 키릴 알렉세예프로 교체하도록 압박하자 영국이 이를 항의한다. 이런 상황에서 결국 일본의 니시 도쿠지로와 러시아의 로만 로젠이 회동하여 니시-로젠 협정을 체결한다. 조선을 둘러싼 러시아 제국과 일본 제국 간의 갈등은 결국 1905년에 러일전쟁으로 이어졌다. 러시아와 일본은 미국의 중재로 포츠머스 조약을 맺었으며, 이후 일본은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였다. 을사조약 체결 이후 헤이그 특사로 파견되었던 러시아어 통역관 이위종은 이후 연해주 일대에서 한인들을 모아 항일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한편 1909년 청나라 내 러시아 조계지였던 하얼빈시에서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는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가 있었다.

3.3. 일제강점기[편집]


한반도는 1910년 한일합방으로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한민족은 청나라베이징 조약의 결과 연해주를 러시아 제국 측에 할양한 이래 1860년부로 국경을 접하게 되었는데, 한반도가 일본의 식민지가 되면서 일본과 러시아는 직접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 수많은 한국인들이 연해주로 이주하면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과정에서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과거 러시아 제국[1]과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오스만 제국의 여러 식민지들이 독립하자, 한국인들 역시 여기에 자극받으면서 1919년에 3.1운동이 일어났다.

3.3.1. 일본의 시베리아 개입[편집]


일본은 적백내전 당시 시베리아 출병이라 하여 상당수의 일본군을 파견하였는데, 일본 군인들이 시베리아와 연해주 일대에서 현지인들을 강간하다가 성병에 걸려서 7개 사단 중 1개 사단에 해당하는 병력이 전투불능 상태에 빠지는 사례가 발생하였다.[2] 이는 후일 일본 제국이 태평양 전쟁 당시 종군 위안부를 운영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일제에 맞서 활동하던 연해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한국인 독립군들은 연해주 4월 참변이라 하여 일제가 연해주 내 한국인 민간인들을 조직적으로 학살하면서 심각한 타격을 입었으며, 1921년 당시 연해주에서 독립군들이 소련군과 충돌하는 자유시 참변을 겪으며 와해되기도 하였다.

상술한 적백내전 당시 소련을 탈출한 백군 난민들이 당시 일본이 식민지였던 한반도의 원산서울(당시에는 경성으로 불렸다.) 그리고 일본 본토에 망명하는 경우도 적지는 않았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러시아인들에 대한 차별이 극심하였고, 일본 열도에 체류하던 러시아인들은 기회가 닫는데로 미국이나 호주 등으로 재이민하게 되었다. 1918년 당시 7,251명에 달했던 백군 난민 인구는 1920년 이미 절반 가까이가 떠나면서 3,150명 정도가 남았으며, 1930년 당시에는 1,666명 정도만 잔류하였다.

서울이나 원산에 체류했던 러시아인들의 상황은 일본 본토에 체류하던 사람들보다는 상황이 훨씬 더 나았고, 한반도에 정착한 러시아인들 중 다시 미국이나 호주 등으로 망명한 러시아인들은 드물었다. 일제시대 당시 식민지 조선에서 체류하던 러시아인들 중에서는 부두에서 짐꾼으로 일하는 사람들 외에도 부유한 사업가로 성공했었던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원산에 거주하던 러시아인들은 8월의 폭풍작전 당시 소련으로 압송당했다.[3]

3.3.2. 소련-일본 국경분쟁[편집]


1930년대에는 스탈린대숙청 시절 연해주에 거주하던 한국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당했다. 이 과정에서 상당수의 독립운동가 및 그 후손들이 숙청에 희생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일제치하 조선에서는 박헌영을 비롯한 독립운동가 상당수가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에 경도되었다.

1930년대에는 일본 제국만주를 침략해 만주국이란 괴뢰국을 세웠다. 만주를 점령하면서 일본은 소련과 더 넓은 국경선을 두고 대치하게 되었고, 양국 사이의 국경 분쟁이 무력 충돌로 이어질 때도 있었다. 소련과 일본은 두만강 유역에서 하산 호 전투를 치루었던 바 있다. 일본은 내몽골 지역에는 몽강국이라는 괴뢰국을 건설하고, 소련과 국경 분쟁을 벌여 할힌골 전투에서 패전하였다. 여기서 일본 측은 소련 측의 승리를 축소시켜 보이도록 하기 위해 노몬한 사건이라고 부르는 편이다. 할힌골 전투의 규모는 하산 호 전투보다 더 큰 편이었다.

발해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를 최초로 주도한 사람들이 바로 러시아계 백군 난민들이었다.

1931년 9월 10일. 일본 관동군이 랴오닝(遼寧)성 선양(瀋陽) 근처에서 9·18 사변을 일으켜 만주 침략을 본격적으로 벌이기 일주일 전. 하얼빈발 기차에 몸을 싣고 발해 유적 조사를 떠나는 러시아 학자들이 있었다. 중국 정부로부터 제대로 지원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들은 후원금을 모아 어렵게 조사단을 꾸렸다. 그들은 소련이 여권 발급을 거부한 ‘백군파(볼셰비키혁명 때 반혁명 입장에 섰던 부르주아 온건파)’였다. 당시 발해 수도 상경성(上京城) 일대는 비적들이 횡행하는 곳이라서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만주의 역사를 밝히겠다는 일념으로 위험을 감수하며 장정을 감행했다.

이 발굴을 이끈 대표자가 러시아 고고학자 포노소프(V. V. Ponosov)였다. 그는 1899년 우파시에서 태어나 1922년 하얼빈으로 건너온 뒤 40여 년간 그곳을 중심으로 헤이룽장(黑龍江) 지역의 고고학을 연구했다. 당시 하얼빈에는 유럽의 학문 체계를 이어받은 당대 최첨단의 고고학자와 생물학자, 지질학자가 많았다. 시민혁명의 여파로 제정러시아의 인텔리겐치아들이 대거 유입됐기 때문이다. 그들은 50년 넘게 하얼빈에 거주하며 고고학연구회를 조직해 체계적으로 만주의 역사를 발굴하고 조사했다.

그러나 포노소프를 비롯한 러시아 학자들의 연구 성과는 망명자들의 불행한 삶처럼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일본과 중국에 의해 이용되고 폄하됐기 때문이다. 러시아인들의 발굴 성과는 6개월 뒤인 1932년 3월 만주국이 성립되면서 일본이 만주 침략을 합리화하는 도구로 전락하고 만다. ‘동아고고학회’의 등장이 그 단초다. 일본은 한반도에 대한 지배가 공고히 되자 곧바로 만주 쪽으로 눈을 돌렸다. 1925년에는 그들의 침략을 역사적으로 합리화하는 동아고고학회를 발족했다. 그 비용은 중국이 지불한 ‘의화단 사건 보상금’으로 운영되었다. 일본의 대륙 침략에 앞장선 동아고고학회는 러시아인의 발굴 자료에 기반, 발해 발굴을 시작한다.

“만몽(滿蒙)은 한민족의 영토가 아니라 오히려 일본과 관계가 밀접하다.”

그렇게 주장하기 시작한 그들은 러시아인들의 발굴 성과를 의도적으로 축소하고 무시했다. 동아고고학회는 설립 초기부터 발해 상경성을 발굴하고 싶어 했다. 사정이 여의치 못해 지켜보고만 있다가 만주국이 성립되자마자 곧바로 발굴단을 조직했다. 이때부터 발해고고학은 만주를 일본의 역사에 연결시키려는 만선사관(滿鮮史觀)의 도구로 전락한다. 그리고 오늘날 일본 역사학계는 물론 한국 역사학계조차 발해 발굴의 효시가 하얼빈의 러시아 발굴단이 아니라 동아고고학회로 믿고 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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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일본이 하얼빈731 부대를 설치해서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하는 와중에 많은 중국인, 러시아인, 한국인, 몽골인들이 희생당했다. 오늘날에도 일본은 책임 소재를 발뺌하거나 조롱하고 있고 한중러가 공조하여 이를 규탄하는 상황이다.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일제는 한국인 상당수를 납치 등의 방법으로 사할린에서 강제노동을 시켰다. 2차대전 전후 일본이 패망하고 소련이 남사할린을 점령한 것을 계기로 사할린 섬 내 한인들은 소련인이 되었는데, 이들과 그 후손들을 사할린 한인이라고 부른다.


3.4. 광복 이후[편집]


1945년 소련군은 만주 전략 공세 작전을 통해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서 일본군을 무장해제시켰다. 일본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 공격을 받은 후에 1945년 8월 15일부로 항복하였다. 해방 이후 한반도의 남부와 북부에는 각각 미군정소군정이 들어섰다. 1948년 이후, 한반도는 남한과 북한으로 나뉘어졌다. 1950년 ~ 1953년까지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소련은 북한 측에 제한적인 참전을 했다. 일본은 한국 측에 지원했고 제한적인 참전도 했다. 1953년에 휴전협정이 체결되어 한반도는 분단됐다. 1950년대에 일본과 소련은 외교관계를 맺었지만, 한국은 반공정책을 실시하면서 소련과는 외교관계를 맺지 않았다. 쿠릴 열도에 대해 소련측은 시코탄섬과 하보마이 군도를 돌려주기 위해 협정을 체결할려고 했지만, 일본이 미국과 군사협정을 체결하면서 소련과 갈등이 일어났다.

1970년대에 한국은 소련과 관계개선을 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지만, 80년대초에 여객기 격추 사건이 일어나자 양국간 갈등이 일어났다. 소련에서 고르바초프 정권이 들어서며 페레스트로이카, 글라스노스트 정책을 추진하면서 한소간에 관계개선이 일어났다. 88올림픽 당시에는 소련팀이 참가했다. 90년에 한국과 소련은 수교했고 91년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가 출범하면서 양국은 외교관계를 유지했다.

3.5. 21세기[편집]


파일:attachment/아베 신조/731.jpg
아베 신조가 731번 훈련기에 오른 모습

한국과 일본은 러시아와 교류를 자주 하고 있다. 2000년대 이후로 러시아와 한국, 일본간의 교류가 많아지고 있다. 그리고 한국 기업들이 러시아에 많이 진출했다. 90년대에 러시아가 경제난을 겪을 당시에 한국 기업들은 러시아에 철수하지 않았지만, 일본은 경제난으로 러시아에서 철수하고 2000년대 이후에 재진출했다.

2010년대부터 신냉전이 시작되면서 미국과 EU는 러시아와 갈등이 심해지고 유로마이단, 크림 반도 합병, 돈바스 전쟁 등으로 인해 러시아를 제재했다. 이에 러시아도 미국, EU를 제재했다. 일본측은 쿠릴 열도의 4개섬에 대해 러시아측과 갈등이 존재한다. 그리고 노보로시야를 제재했다.

한국과는 일부 갈등이 생겨났지만, 전반적으로는 교류가 많은 편이다. 그리고 박근혜 정부 시절 2013년 11월부로 러시아와 한국은 무비자협정을 체결했다. 이에 한국인 관광객들이 러시아에 많이 늘어났다. 다만 러시아에서 한국으로 오는 관광객 수는 2014년 크림 위기로 인한 경제제재와 2014년 말 유가 폭락으로 러시아 경제가 흔들리는 바람에 생각보다는 늘지 않았다.

한국과 러시아는 일본과의 영토분쟁(독도, 쿠릴 열도 등)이 존재한다. 이에 러시아측은 일본을 견제하고 있고 한국도 독도 문제로 일본과 갈등이 생기자 러시아와도 일부 협력하고 있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한국과 일본은 대러 경제제재에 동참하게 되었다. 4월 8일 기시다 총리는 러시아산 석탄 수입을 중단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일본 정부는 러시아 외교관을 추방한다고 밝혔다.# 4월 14일 일본 법무성이 러시아군의 부차 학살 의혹을 수사중인 ICC에 검사 3명을 파견하기로 했다.#

7월 5일 일본 정부는 대러 추가 제재를 실시했다.#

8월 16일, 소련이 제2차 세계대전 종결 때 홋카이도와 함께 부산, 제주의 점령을 검토하는 문서가 공개됐다.#

11월 30일, 중러 군용기가 카디즈(KADIZ), 자디즈(JADIZ) 상공을 지나간 것이 알려졌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이후 한러일관계 변화는 윤석열 정부/평가/외교 문서 참조

4. 문화 교류[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대한민국/문화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러시아/문화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일본/문화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국간의 문화교류가 활발한 편이다. 2000년대 이후에 한국에서 러시아어를 배우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러시아어는 한국과 일본에서 주요 외국어로 지정되어 있다. 한국어는 일본에서 한류의 영향으로 배우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러시아에서도 한국어를 배우는 경우가 늘어났다. 일본어는 한국에서 주요 외국어로 지정되어 있고 일본 문화의 영향으로 일본 애니를 좋아하는 팬들이 많은 편이다. 러시아에서도 일본 애니의 인기가 많은 편이고 러시아인 코스어도 자주 활동하고 있다.

일본보다는 한국이 러시아어 사용 인구가 훨씬 더 많은 편이다. 러시아계 한국인 규모부터 러시아계 일본인 인구보다 몇 배는 더 클 뿐더러 대한민국에 고려인과 사할린 한인 인구가 재정착한 것 + 재한 우즈베키스탄인재한 카자흐스탄인 등 구소련권 출신 이주민 중 상당수가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이유로, 한국 내 러시아어 사용 인구가 결코 적은 편은 아니기 때문이다.

5. 교통 교류[편집]


3국을 잇는 항공노선, 항로 등이 존재한다. 한국과 러시아는 2012년에 무비자정책을 도입하면서 한국인은 러시아로 무비자 입국이 가능하다. 반면, 일본은 러시아와 영토 갈등이 존재하고 있어서 블라디보스토크를 일부 기간 동안 무비자로 가는 것을 제외하면 비자가 요구되고 있다.


6. 대사관[편집]


모스크바에 주 러시아 한국 대사관, 주 일본 한국 대사관, 서울시에 주한러시아대사관, 주한일본대사관, 도쿄도에 주 일본 한국 대사관, 주 일본 러시아 대사관이 존재한다. 그리고 3국은 일부 도시에 영사관을 두고 있다.


7. 관련 문서[편집]



[1] 1차대전 와중에 러시아 혁명으로 멸망한다.[2] 콘딜로마 같은 성병의 경우 사람마다 내성이 다른데, 러시아인들에게는 대체적으로 면역이 있어 큰 문제가 안되던 성병 상당수가 일본 군인에게는 면역이 없는 경우가 많아 문제가 된 것이다. 성행위로 감염되는 질병 종류가 한두가지가 아닌데 굳이 매독 같은 심각한 성병이 아니더라도 감염으로 인한 요도염 같은 것만 걸려도 전투력이 저하되는 것은 당연지사다... 당시에도 항생제는 있었지만 민감한 부위에 문제가 생겼을 때 수술하는 방법이 지금만큼 발달하지는 못했을테고[3] 여담으로 해방 이후 서울에 체류하던 러시아인들 역시 6.25 전쟁 당시 서울이 북한군에게 점령당한 이후 모조리 소련으로 압송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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