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러일관계 (문단 편집) ==== [[일본의 시베리아 개입]] ==== 일본은 [[적백내전]] 당시 [[시베리아 출병]]이라 하여 상당수의 일본군을 파견하였는데, 일본 군인들이 시베리아와 연해주 일대에서 현지인들을 강간하다가 성병에 걸려서 7개 사단 중 1개 사단에 해당하는 병력이 전투불능 상태에 빠지는 사례가 발생하였다.[* [[콘딜로마]] 같은 성병의 경우 사람마다 내성이 다른데, 러시아인들에게는 대체적으로 면역이 있어 큰 문제가 안되던 성병 상당수가 일본 군인에게는 면역이 없는 경우가 많아 문제가 된 것이다. 성행위로 감염되는 질병 종류가 한두가지가 아닌데 굳이 매독 같은 심각한 성병이 아니더라도 감염으로 인한 요도염 같은 것만 걸려도 전투력이 저하되는 것은 당연지사다... 당시에도 항생제는 있었지만 [[음경|민감한 부위]]에 문제가 생겼을 때 수술하는 방법이 지금만큼 발달하지는 못했을테고] 이는 후일 일본 제국이 [[태평양 전쟁]] 당시 [[종군 위안부]]를 운영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일제에 맞서 활동하던 연해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한국인 독립군들은 [[연해주 4월 참변]]이라 하여 일제가 연해주 내 한국인 민간인들을 조직적으로 학살하면서 심각한 타격을 입었으며, 1921년 당시 연해주에서 독립군들이 소련군과 충돌하는 [[자유시 참변]]을 겪으며 와해되기도 하였다. 상술한 적백내전 당시 소련을 탈출한 백군 난민들이 당시 일본이 식민지였던 한반도의 [[원산]] 및 [[서울]](당시에는 경성으로 불렸다.) 그리고 일본 본토에 망명하는 경우도 적지는 않았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러시아인들에 대한 차별이 극심하였고, 일본 열도에 체류하던 러시아인들은 기회가 닫는데로 미국이나 호주 등으로 재이민하게 되었다. 1918년 당시 7,251명에 달했던 백군 난민 인구는 1920년 이미 절반 가까이가 떠나면서 3,150명 정도가 남았으며, 1930년 당시에는 1,666명 정도만 잔류하였다. 서울이나 원산에 체류했던 러시아인들의 상황은 일본 본토에 체류하던 사람들보다는 상황이 훨씬 더 나았고, 한반도에 정착한 러시아인들 중 다시 미국이나 호주 등으로 망명한 러시아인들은 드물었다. 일제시대 당시 식민지 조선에서 체류하던 러시아인들 중에서는 부두에서 짐꾼으로 일하는 사람들 외에도 부유한 사업가로 성공했었던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742963|#]] 그러나 원산에 거주하던 러시아인들은 [[8월의 폭풍작전]] 당시 소련으로 압송당했다.[* 여담으로 해방 이후 서울에 체류하던 러시아인들 역시 6.25 전쟁 당시 서울이 북한군에게 점령당한 이후 모조리 소련으로 압송당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