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궈위 (문단 편집) === 초기 정치 활동 === 1990년 타이베이현 지방의회 의원(도의회 의원격)으로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했다. 이후 1993년에 타이베이현, 지금의 [[신베이]]시에서 입법위원(=국회의원)에 당선된 후 같은 지역구에서 3선으로 활동했다. 1993년 5월 5일, [[입법원]] 국방위원회에서 퇴직 연금 예산에 관해 심의하던 중 민진당 [[천수이볜]] 입법위원과 시비가 붙었는데, 그의 뺨을 후려갈긴 뒤 테이블을 뒤엎고 다시 머리를 가격하는 등 신체적 폭행을 가했다. [[천수이볜]]은 이로 인해 3일을 입원했으며, 이 사건의 가해자로 민진당으로부터 거센 비판과 함께 사과 요구를 받게 되었다. 결국 [[스밍더]]의 중재로 사과했다.[[https://www.youtube.com/watch?v=nPSxla273zc|#]] 1994년 입법위원 재임 당시 [[국민소환제]]에 따라 파면될 위기에 놓였으나, 과반수 투표, 과반수 찬성[* 본래 1/3 투표였으나, 당시 [[리덩후이]] 총통의 지휘하에 국민당이 날치기로 선거파면법을 개정해서 문턱이 지나치게 높아졌다. [[해바라기 운동]] 이후 지금의 1/4 투표가 되었다. 대만은 국민소환과 주민소환 모두 인정하고 있으며, 그 기준도 같다.]에 도달하지 못하고 21%의 투표율로 개표하지도 못하고 각하되었다.[[https://www.youtube.com/watch?v=DZ0JuR6Ydmw&t=0h0m0s|#]] 2002년 낙선하여 입법위원 생활을 마쳤으니, 무려 10년이 넘도록 정계를 떠나있었던 셈. 이후 이런저런 임명직을 거치다가, 2012년부터 5년 동안은 타이베이시 산하의 농산물 도매공사(臺北農產運銷股份有限公司)에서 총경리(대표이사격)로 재직했다. 그 전 대표이사가 대만 독립파 우인닝(吳音寧)이었는데 농산물 유통이 부진하다는 이유로 이사장 직에서 파면되었다. 이후 한궈위는 중국으로의 농산물 유통을 활발히 하여 賣菜郎[* 대만어로 '베차랑', 야채 장수라는 뜻이다.]이라는 이미지를 쌓게 되고 2018년 지방선거의 발판이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