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국기독교장로회 (문단 편집) === 친일 === 일제 시대 다수의 교회들과 같이 기장 역시 친일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다. 기장-예장의 분리는 1950년대 이후의 일로, 일제 시대에 친일했다는 비판은 기장 뿐만이 아닌 조선신학교 계열 장로교 전체, 즉 예장과 기장 모두에 가해질 수 있다. 당시 장로교 신학교는 조선신학교과 평양신학교 두 군데였는데, 그 중 [[조선신학교]]는 일제에 순응한 장로회 교인들의 구심점이었던 반면 평양신학교는 신사참배에 강력하게 저항한 학교였다. 예장과 기장 전 계열을 떠나서 당시 신사참배와 친일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곳은, [[주기철]] 목사 등 신사참배 거부로 투옥된 목사들이 광복 이후 조직한 예장(고신) 뿐이다.[* 예장(고신)의 경우 1938년 이루어진 신사참배 요구와 그로 인한 평양신학교의 폐교, 이어진 조선예수교장로회(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들이 중심이 되어 설립)의 신사참배 결의에 항거하여 빠져나온 목사들을 중심으로 설립된 교단이다.]. 일단 기장 분립 이전 형식적으로나마 참회는 없이 취소 결의는 있었다. 1946년 단일 총회에서 신사참배취소 결의가 있었고, 1948년 반복 확인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기장이 친일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왜냐하면 1940년대에 친일했던 목사들에 대해 광복 이후 기장 교단에서 적절한 처벌을 하지 않았고 심지어 친일 사실 자체를 묵과하듯 그들에게 높은 지위를 주었기 때문이다. 우선 조선신학교의 설립자이자 [[신사참배]]와 [[내선일체]]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았던[* 신학적으로 신사참배에 반대하기 보다는 가벼이 받아들였다는 지적이 있으며, 이는 신사참배가 한국 개신교계에 드리운 영향과 분열을 생각할 때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되는 사안이었다고 볼 수 있다. 나치에 적극적으로 저항한 독일 신학자들과 크게 비교가 되는 부분. [[http://www.vop.co.kr/A00000022679.html|#]]] [[김재준]]은 후에 기독교 장로회 교단 성립에서 큰 역할을 한다. 김재준과 같은 신정통주의자였던 카를 바르트는 같은 제국주의 치하에서도 디트리히 본회퍼와 함께 바르멘 신학 선언을 작성하며 반나치 활동을 벌였다는 점에서, 김재준의 친일(내지는 묵인)은 비판받을 소지가 있다. 또한 1941년 일제를 찬양하는 기념사를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발표한([[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Print.html?idxno=4584|#]]) 조승제 목사를, 기장 총회장으로 선출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기장-예장 분립 후의 기장 교단의 움직임은 예장측 지도부와 대조된다. 분립 후 예장에서 1954년 총회장에 선임된 [[한경직]] 목사가 신사참배 가담을 이유로 사임함으로써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를 재확인한 것이다. [[한경직]]목사는 다시 한 번 일제시대 당시의 친일에 대해 공개적으로 사죄했다.[* 1992년에 템플턴상을 수상하며 공식 석상에서 회개를 한 바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