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장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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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장로회
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Republic Of Korea

파일:기장로고.png
영문명칭
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Republic Of Korea
한문명칭
韓國基督敎長老會
약칭
기장
설립연도
1953년
소속국가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총회장
김은경 목사
총무
김창주 목사
표어
어두움 후에 빛이 오며 - 생명·치유·회복 (요한복음 10:10b, 로마서 8:18, 미가 7:8)
교인 수
219,086 명(뉴스앤조이, 2019년#)
위치
서울특별시 종로구 김상옥로 30, 4층 (연지동)




파일:홈페이지 아이콘.png /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교육원

1. 개요
2. 교단의 성격: 넓은 신학 스펙트럼
3. 역사
4. 비판과 반론
4.1. 친일
4.1.1. 반론
4.2. 군사독재 시절의 행보
4.2.1. 반론
4.3. 친북 행보
4.3.1. 반론
5. 기타
6. 나무위키에 등록된 인물
7.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한국기독교장로회(韓國基督教長老會)는 한국의 개신교장로회의 한 분파에 속한다. 약자로 기장(基長)이라고 부른다.[1]

한국에서 대한성공회와 함께 가장 대표적인 진보 교단들 중 하나로, 신정통주의포스트모던 신학을 받아들인 교단으로 알려졌다. 일부에서는 대한성공회정의구현사제단보다도 극단적인 성향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2] 다만 하술하듯, 이는 교단을 대표하는 경동교회와 향린교회의 이미지 때문이다. 사실 한국기독교장로회와 같이 이른바 진보 교단이라는 대한성공회도 보수적인 신자와 목회자들이 많지만, 자유주의 부류의 사람들이 이들보다 목소리가 더 크기 때문에, 대외에 진보 교단으로 알려졌을 뿐이다. 한국기독교장로회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2010년대 기준으로는 타 교파 못지않게 '보수적인' 개체교회들도 늘어나는 추세이다. 이 교회들은 현재 '성풍회'라는 별도의 하부 조직을 형성했다.

진보적인 성향을 띠는 교단인 만큼 교회일치운동에도 적극적이며,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 속해있는 교단이다.

신학교는 한신대학교가 있다.


2. 교단의 성격: 넓은 신학 스펙트럼[편집]


한국 교회사나 신학에 관심이 많은 교인들이 아니라면 "기장"이나 "예장"이라는 단어를 생소해하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장로회, 감리회, 침례회 정도의 큰 교단 단위만 인지하고 있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심지어는 예장 교회에 속한 사람들 가운데 기장이라 하면 이단 교파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이는 기장에 속한 교회 및 교인들의 숫자가 예장에 비해 적어서 많이 접하지 못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2015년 기준으로 예장에서 가장 큰 교단인 통합과 합동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 수가 각각 279만, 270만으로 도합 약 550만에 육박하는 반면, 기장 교단의 교인 수는 약 26만 명 정도이다.출처

비록 규모는 작지만, 이 교단은 개교회주의를 존중하며 내부에 엄연히 보수파가 존재한다.[3] 그래서 분명 간판은 기장인데 목사의 성향이나 설교 내용, 교회 인테리어 등에서 보수적인 느낌이 나는 경우도 꽤 많다. 그 예로 발음교회, 한신교회, 분당한신교회, 안디옥교회, 영신교회, 행복한교회[4], 동수원장로교회 등이 있다.

사실상 민주화이후의 한국기독교장로회는 해방신학, 민중신학, 사회운동으로 이름이 알려진 향린교회(강남향린, 들꽃향린, 섬돌향린 포함)나 경동교회 등 몇몇 유명한 교회들 빼고는 왠만해선 신학노선이 기존 한국교회와 크게 다를 것 없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일례로, 교단의 의사결정 단위인 총회에서도 반동성애 진영의 목소리가 나오고, 표결 결과 동성애에 대한 판단을 유예할 정도로[5] 보수주의의 면모를 보인다.

하지만 신학교인 한신대학교의 경우는 장로교계열의 다른 신학교인 총신대학교장신대학교에 비해 학생회가 진보적 색채를 띄고, 교육과정에서 또한 기독교 교리에 대한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스탠스를 취한다.

정리하자면, 한국기독교장로회는, 타 교단과 비교했을 때 중앙값이 조금 좌파로 치우쳐 있는 상황에서, 중도우파로부터 극좌까지 아우르는 넓은 스펙트럼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예장합동의 극단적 보수주의와 대비하였을 때, 기장은 우파나 좌파나 한 목소리가 교단 전체를 대변하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그 이유는 강한 개교회주의와 건설적인 토론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러한 넓은 신학적 스펙트럼은 본 나무위키 문서, 더 나아가 한국기독교장로회 자체를 이해하는 데 반드시 유념해두어야 할 부분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 교단은 한쪽으론 독재에 협력하고 한쪽으론 민주화를 지지했다'라는 오해를 할 수도 있다. 독재에 협력(예컨대 조찬기도회 참여)한 목사도, 민주화운동에 투신한 목사도 모두 한국기독교장로회의 스펙트럼에 포함되고, 각각에 대한 평가는 교단 차원이 아닌 개교회 혹은 개별 목사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타당하다.


3. 역사[편집]


조선신학교에서 모더니즘신정통주의(좀 더 정확히는 성서비평학)을 받아들이는 문제로 장로회 내부의 갈등이 벌어진 끝에 결국 김재준 목사가 면직 처분되었고, 결국 대한예수교장로회와 갈라서게 된다. 오늘날 예장(통합) 계열 신학교에서는 카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를 본격적으로 받아들인 상황이라는 점에서, 50년대의 기장-예장 분열은 안타까운 지점이 많다.[6][7][8]

본래 조선신학교가 분단 이후 대한민국의 유일한 개신교 신학교였던 만큼 조선신학교를 기반으로 둔 기장은 초창기에는 그 교세가 예장과 큰 차이가 없었는데, 예장 교단이 기장과의 분리 이후 복음주의적 입장에서 복음 전파나 한국 복음화에 초점을 두고 사역하며 교세가 크게 증가한 반면, 기장 교단은 군사 독재 시절 반독재 민주화 투쟁이나 사회적 약자 보호 등 사회 구원에 주력하면서 교세 증가 면에서 예장 교단에 미치지 못했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또한 급진적인 포스트모던 신학과 친북 논란 등 자충수가 여럿 두어진 것도 한몫 했다. [9]

1990년대 이후로는 기장 교단에서도 사회 구원과 함께 복음화와 복음 전파에 대해 더욱 초점을 두고 주력하고 있는 추세이다. 현재 기장 교단 소속의 교회들은 수도권보다는 상대적으로 전라도충청도 등 농촌 지역에 더 많이 위치하고 있다.[10][11]출처

2016년 10월, 예장(통합)[12] 측에서 총회장을 비롯한 임원진이 기장 총회를 방문하여 고 김재준 목사의 면직 결의를 철회하는 공문을 전달했다.[13] #


4. 비판과 반론[편집]


노골적이고 급진적인 포스트모더니즘 신학과 정치적 좌편향 탓인지, NCCK 소속 교단들 중 이례적일 정도로 가장 많이 비판받는 교단이기도 한다.[14] 보수 교단들로부터 '가짜 기독교'라 조롱받는 건 물론이며, 중립 입장에서도 보수 교단들과는 반대쪽 방향으로 편향성을 나타내고 있다는 비판 역시 존재한다.


4.1. 친일[편집]


일제 시대 다수의 교회들과 같이 기장 역시 친일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다. 기장-예장의 분리는 1950년대 이후의 일로, 일제 시대에 친일했다는 비판은 기장 뿐만이 아닌 조선신학교 계열 장로교 전체, 즉 예장과 기장 모두에 가해질 수 있다. 당시 장로교 신학교는 조선신학교과 평양신학교 두 군데였는데, 그 중 조선신학교는 일제에 순응한 장로회 교인들의 구심점이었던 반면 평양신학교는 신사참배에 강력하게 저항한 학교였다. 예장과 기장 전 계열을 떠나서 당시 신사참배와 친일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곳은, 주기철 목사 등 신사참배 거부로 투옥된 목사들이 광복 이후 조직한 예장(고신) 뿐이다.[15]. 일단 기장 분립 이전 형식적으로나마 참회는 없이 취소 결의는 있었다. 1946년 단일 총회에서 신사참배취소 결의가 있었고, 1948년 반복 확인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기장이 친일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왜냐하면 1940년대에 친일했던 목사들에 대해 광복 이후 기장 교단에서 적절한 처벌을 하지 않았고 심지어 친일 사실 자체를 묵과하듯 그들에게 높은 지위를 주었기 때문이다. 우선 조선신학교의 설립자이자 신사참배내선일체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았던[16] 김재준은 후에 기독교 장로회 교단 성립에서 큰 역할을 한다. 김재준과 같은 신정통주의자였던 카를 바르트는 같은 제국주의 치하에서도 디트리히 본회퍼와 함께 바르멘 신학 선언을 작성하며 반나치 활동을 벌였다는 점에서, 김재준의 친일(내지는 묵인)은 비판받을 소지가 있다. 또한 1941년 일제를 찬양하는 기념사를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발표한(#) 조승제 목사를, 기장 총회장으로 선출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기장-예장 분립 후의 기장 교단의 움직임은 예장측 지도부와 대조된다. 분립 후 예장에서 1954년 총회장에 선임된 한경직 목사가 신사참배 가담을 이유로 사임함으로써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를 재확인한 것이다. 한경직목사는 다시 한 번 일제시대 당시의 친일에 대해 공개적으로 사죄했다.[17]

4.1.1. 반론[편집]


1930년대 일제의 압력에 맞서 신사참배 및 내선일체에 끝까지 저항한 역사를 지닌 장로회 교단은 그나마 교리에 엄격한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만 끝까지 저항했을 뿐이다. 현재 한국 개신교의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역시 친일 행위를 행한 전례가 있다. 즉 한국기독교장로회만 문제가 아니라 한국 기독교 전체의 문제라는 이야기. 현재 우리나라에서 신사참배의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교단은, 끝까지 일제에 저항했던 고신과 침례교회, 그리고 광복 이후에 국내에 들어왔던 루터교회, 오순절교회 정도밖에 없다.[18]

광복 이후 예장과 기장을 떠나 여러 목사들이 개별적인 수준에서 친일 행위에 대해 사과하였다. 마찬가지로 기장의 대표적인 목사인 조헌정 목사 역시 본인의 목사 가문이 저질렀던 친일에 대해 사죄했다.# 그러나 이러한 개별적 수준의 사과는 교단 차원의 사과가 아니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4.2. 군사독재 시절의 행보[편집]


목사와 유명 교인 상당수가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었으나, 무려 박정희, 전두환 군사독재 시절 국가조찬기도회에 참여한 교단이기도 하다. 교단의 창립자라고 할 수 있는 김재준 목사가 1968년 박정희 군사독재 시절 제1회 국가조찬기도회에 참여한 바가 있으며, 총회장을 역임하고 당시 한신대학교 총장이던 조향록 목사가 1980년 8월 국보위 국가조찬기도회에 참여한 바가 있다.[19] 외려 예수교장로회 고신측이 교단 차원에서 그 기도회에 불참했다.[20] 심지어 조향록 목사의 경우 무려 '국가보위입법회의'[21]에도 종교계 대표로서 참여한 바가 있으며, 이후로도 박정희 전두환 정권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을 고수했다.[22]
심지어, 기장의 강원용 목사의 경우 전두환 신군부 정권에 적극 협조했다는 점에서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광주민주화운동이후 전두환 정권 집권과정에서 강원용은 국정자문위원으로 활동했으며, 이후에도 친정부적이었다.


4.2.1. 반론[편집]


전두환 시기, 인지도가 어느정도 있는 교파들 가운데 국가조찬기도회에 참여하지 않은 교단은 소수 교단인 예장 고신과 대한성공회 정도였다. 이 역시 신사참배 문제와 마찬가지로, 기장만의 문제라기보다는 한국 기독교계의 전체적인 문제였다는 것.[23][24]

민주화운동의 과정 중에 많은 기독교 교단들이 침묵하는 와중에 한국기독교장로회가 대한성공회천주교와 더불어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것은 사실이며, 이는 6.10 항쟁에서 향린교회서울주교좌성당명동성당과 함께 보여준 기여와 희생에서도 잘 드러난다.[25]

4.3. 친북 행보[편집]


민주화 운동 주도 목사들의 자체적 통일 운동에서 벌어진 사건 사고들도 비판의 대상이다. 군사독재 시절이라면 모를까[26] 여전히 민주 정부가 들어선 뒤에도 정부와 맞서면서 북한 정부와 연계를 했다는 비판을 받으며, 교계 주요 인사들 중 하나인 문익환 목사는 '무단 방북' 후 직접 김일성과 합의문까지 만들었던 전적이 있다. 또한 교단 소속의 한상렬 목사의 경우 천안함 피격사건으로 남북관계가 경직되고 일체의 북한 방문이 금지된 상황에서, 개인 판단으로 무단으로 방북하여 김정일과 만나려다 북한에 의해 거절을 당하고 돌아오는 등 이해하기 어려운 행태를 보이기도 했다. 게다가 교단은 해당 목사에 제명과 같은 조치를 전혀 취하지 않고 오히려 옹호하고 들었다. 이것이 개신교 내에서 같은 진보적인 스탠스를 취하는 교파들[27]과 달리 기장이 정치적인 측면으로도 비판을 받는 이유이다.


4.3.1. 반론[편집]


문익환 목사는 김일성을 만나서 합의문을 만든 것은 맞지만 결코 북한 체제를 옹호하거나 북한의 연방제 통일 방침에 전적으로 동의한 바 없다. 물론 문익환 목사가 무단으로 방북한 것은 비판을 피할 수 없는 불법행위였다.[28] 그러나 문익환 목사가 남한으로 돌아와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 수감되었을 때 쓴 글들을 보면 북한의 현 체제에도 문제가 있는 만큼 남한과 북한이 서로의 체제가 가진 문제들을 갖다가 모두 해결을 하고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고 분명히 밝혔으며, 말년에는 본인이 세운 범민련이 북한에 끌려다니며 여러 문제점이 있다고 판단, 범민련을 해체하고 새로운 통일운동 기구를 만들고자 시도를 하기도 했다.[29]) 더불어, 기장 교단의 공식적인 입장은 남북 대립과 갈등을 끝내고 남북 화해와 자주적 평화통일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일부 목회자들의 친북적인 언사를 갖고 기장 교단 전체를 향해 화살을 돌리는 것은 부당하다고 할 수 있다.[30]


5. 기타[편집]


  • 대한민국 현대사에 있어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 교단으로, 6월 항쟁이 태동한 곳들 중 하나인 향린교회가 바로 기장 소속의 교회. 보통 민주화운동을 생각하면 가장 많이 떠올리는 곳이 명동성당이지만, 향린교회 역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향린교회에서 강남향린교회, 들꽃향린교회, 섬돌향린교회가 분립되어 개척되었으며, 이 중 섬돌향린교회(임보라 목사)는 한국에 몇 안되는 성소수자 친화적교회이다.[31]

  • 최근 섬돌향린교회에서 성소수자를 위한 예배를 드리고있는 임보라 목사에 대해 예수교장로회 합동을 비롯한 보수 교단들이 이단 판정을 하겠다고 나섰다. 이는 기독교장로회측에 공식적인 통보도 없이 타교단(그것도 같은 장로회 교단)의 목사에 대해 이단 여부를 판정하겠다고 하는 것이여서, 문제가 되고 있다. 앞으로 기장측의 대응과 합동측의 판정 결과에 기독교계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32]

  • 서울 장충동에 위치한 경동교회는 기장 교단을 대표하는 교회로, 기장 교단을 대표하는 김재준, 강원용 목사 등의 목회자들이 사역했던 교회이다. 한신교회나 강남교회, 전주 안디옥교회 등 같은 교단 내에 있는 다른 중대형교회에 비해 신자 수는 적지만, 역사적 대표성 등으로 인해 교단 내에서 대표적인 교회로 꼽힌다. 경동교회는 특히 에큐메니컬 운동에 상당히 적극적인 교회인데 매년 6월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과 교환예배를 17년째 진행해오고 있다. 또 대한성공회 서울교구 최초의 여성 사제인 김기리 미리암 신부가 성공회로 옮기기 전에 다녔던 교회이기도 하다.

  • 경동교회의 또 다른 특징 중의 하나는 바로 주일예배 형식인데, 일반적인 우리나라의 개신교 특히 장로교회와는 달리 교회력과 성서일과에 따라 성서본문(구약, 서신서, 복음서)이 낭독되고 기도문과 시편송, 성만찬 기도 등이 정해져 있는 상당히 전례적인 예배를 드리기로도 유명하다. 이는 경동교회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전통을 따르기 때문이다.[33] 예배와 성례전, 교회음악은 상당히 교회의 전통을 따르지만 아이러니하게 1970년에 있었던 통기타 예배사건 등 한국 복음성가와 CCM 운동의 근원지이기도 하다. 사실 기독교장로회 소속 교회들이라고 해서 모두 경동교회나 향린교회처럼 가는 건 아니며, 그외 다른 교회들로 가면(특히 지방쪽) 예수교장로회 소속 교회들과 별 차이 없는 경우도 많다.

  • 토착화에 신경을 쓰는 교단답게 전주고백교회 등 일부 교회에서는 예배 시작때 서양식 탁자종이 아닌 동양식 종이나 좌종(坐鐘)[34]을 치기도 한다. 또 유독 한복 두루마기 처럼 된 예배용 스톨이나 강단보를 사용하는 교회들이 많이 있는 것 같다.

  • 경동교회는 건축 면에서도 눈여겨 볼 만하다. 한국 건축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김수근과 승효상 등의 건축가가 참여하여, 수려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외부에서 보았을 때는 기도하기 위해 맞댄 손 모양과 유사한 디자인이 특징. 다만 한국의 기후 사정을 고려 안하고 설계해서인지 아니면 단순히 건물이 오래되어서인지는 몰라도 장마철만 되면 빗물이 새는 문제점이 있다. 그리고 원래는 일제시대에 천리교 교회가 있던 자리였다고 한다.

  • 크리스찬 아카데미로 유명한 강원용 목사와 반독재 투쟁으로 잘 알려진 문익환 목사 등이 널리 알려진 해당 교단 주요 소속 목회자들이다.

  • 한국의 개신교 교파 중에선 대한성공회와 함께 , 담배, 제사 문제에 비교적 관대하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 역시 진보적인 개교회 한정이며 성풍회에 소속된 보수 성향 교회들은 예장처럼 술, 담배를 금지한다.

  • 진보적인 교단으로 유명하지만 소속교회 혹은 성도들이 모두 진보적인 것은 아니다. 기장 내에도 보수적인 교회들을 주축으로 한국기독교성풍회가 조직되어 있다. 성풍회 교회[35]들의 분위기는 다른 예장 교단들과 크게 다르지 않고, 예장교단 소속교회들과의 교류도 많다.[36] 이들 성풍회 교회들은 다른 예장 교회들처럼 전도에도 열심이라 기장교단 내 지분을 착실히 늘려가는 중이다. 또한 개개인들 중에서도 보수적인 신자들도 많다. 대표적으로 제7대 고양시의원이었던 자유한국당 이규열 전 의원으로 기장측 능곡교회 장로이다.


6. 나무위키에 등록된 인물[편집]



7.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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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와 대비되는 의미로 대한예수교장로회는 예장이라고 부르는데, 보통 길거리에 보이는 대부분의 장로회 교회가 예장에 속한다.[2] 2차대전 이전의 자유주의는 모더니즘 사조와 연관이 깊고, 반대로 2차대전 이후의 자유주의는 신정통주의와 함께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았다고 평가된다.[3] 진보 성향 교단들 중에 이런 사례는 적지 않게 발견된다. 일례로 미국의 회중연합교회(UCC)도 내부에 정통주의 신학을 따르는 "Confessing Jesus" 그룹이 있다.[4] 구 독산동교회로 현재 광명시 소하동에 위치한다. 창조과학을 가르치며 보수의 끝을 달린다.[5] 다만 교단 총회 입장에서, 지금으로서는 동성애에 관한 판단을 유예하지 않을 수 없다. 비록 현대 사회와 교계에서 동성애자를 차별하고 정죄하는 것이 잘못된 일이라는 인식이 확산하고 있기는 하지만 성경에서는 동성애를 호의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지 않는 까닭이다.[6] 지역적으로는 함경도 출신의 목회자들이 기장 측을 많이 선택했고 평안도황해도 출신(서북 지역) 목회자들이 예장을 많이 선택했는데, 이는 함경도 지역이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캐나다 선교사들과 일본의 신학의 영향을 많이 받은 반면, 서북 지역 목회자들은 보수 신학이 강한 미국의 북장로회 선교사들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이 이러한 결과의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분석이 있다.[7] 이외에 서북 세력이 주류를 이루던 예장 교단에 대항하여 경기도충청도 등 기호지역의 상당수 목회자들 역시 기장 교단에 가담하였다. 현재는 수도권이나 충청도 장로교회들도 예장 교단 소속이 대다수이다.[8]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들이 선교를 맡았던 전라도 출신 목회자들은 예장과 기장 양측에 모두 많았고, 호주 선교사들(주로 부울경)과 미국 북장로회의 선교 지역이었던 경상도 지역 목회자들은 주로 예장 교단에 참여하였다.[9] 가령 보수 개신교계 최대 교단 중 하나인 예장 합동의 경우 기장 목사에 대해 동성애 허용여부 관련 이단 검증에 나서는 등 갈등이 빈번히 빚어지고 있다. #[10] 경상도 지역 농촌에 많이 분포하는 교단은 고신, 합동, 통합 등 예장 교단이 대다수이다.[11] 물론 타 지역의 기장 교단 교세와 비교했을 때 그러하다는 것이다. 전라도, 특히 전라북도 지역에서는 기장 교회가 전국에서 가장 많고 비율이 가장 높은 편에 속함에도 전라도 지역의 전체 개신교 교회 및 교인 수를 놓고 보면 통합, 합동 등 예장 교단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충청도 지역 역시 통합, 합동, 백석 등 예장 교단과 감리회가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지역이다. 대전의 경우 다른 충청지역에 비해 기장의 교세가 약한 편이다.[12] 현재 한국의 개신교 교단들 중 최대 교단으로, 그 다음으로 대규모 교단인 예장(합동)과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가입 문제로 갈라졌다.[13] 2016년 9월 이루어진 예장(통합) 101회 총회 결정 사안.[14] 같은 NCCK 회원 교단이라도 감리회와 예장통합은 보수적이거나 복음주의적인 경향도 상당한데다 기본적으로 북한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루터교는 규모가 워낙 작은 데다 정치 참여보다는 루터교 교리 홍보나 비정치적인 자원봉사 활동에 집중하는 경향이라 교리적인 차원의 비판이면 모를까, 기장만큼 정치적인 부분에서 문제가 불거지는 경우는 없다. 대한성공회 정도가 기장과 비슷한 논란 및 비판을 받는 편.[15] 예장(고신)의 경우 1938년 이루어진 신사참배 요구와 그로 인한 평양신학교의 폐교, 이어진 조선예수교장로회(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들이 중심이 되어 설립)의 신사참배 결의에 항거하여 빠져나온 목사들을 중심으로 설립된 교단이다.[16] 신학적으로 신사참배에 반대하기 보다는 가벼이 받아들였다는 지적이 있으며, 이는 신사참배가 한국 개신교계에 드리운 영향과 분열을 생각할 때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되는 사안이었다고 볼 수 있다. 나치에 적극적으로 저항한 독일 신학자들과 크게 비교가 되는 부분. #[17] 1992년에 템플턴상을 수상하며 공식 석상에서 회개를 한 바 있다.[18] 다만 이는 피장파장의 오류로, 기장의 친일행위를 없었던 일로 하지는 않는다. 실제로 대다수의 교회들에서 주장한 핑계도 "남들도 다 했다."는 것인데, 이는 끝까지 저항하며 탄압받았던 예장 고신 소속 목사들 등을 생각해 볼 때 적절한 사유가 되지 못한다. 이는 신정통주의의 거두로 탄압받으면서도 나치에 끝까지 항거했던 카를 바르트나 본회퍼와도 비교되는 행보였다.[19] 1980년 당시 참여했던 다른 유력 개신교계 인사로 위에도 언급된 한경직목사 등이 있다.[20] 그러나 이 때를 제외하면 예장고신은 대부분의 국가조찬기도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21] 널리 알려진 국보위의 후신이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항목 참조.[22] 이에 대해 박정희 정권 말~전두환 정권 초 한신대학교가 종합대학으로 인준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는데, 그렇게 본다면 본인에게 이익을 준 상대방이기에 다른 과를 무시하고 우호적으로 보았다는 설명이 되므로 더욱 부정적인 면모가 된다.[23] 그러나 이 역시 친일행위 비판에서도 보여지는 피장파장의 오류로, 군사독재가 끝난 지금도 이에 대한 교단차원의 사과와 회개가 없다는 점에 있어서 어찌보면 더 안 좋은 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24] 조찬기도회에 참석한 것도, 앞서 기술된 신사참배와 더불어 다시는 되풀이해서는 안되는 기장의 흑역사였다는 데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지만, 위에 설명된대로 이는 기장만의 문제라기 보다는 그 당시 한국 기독교 전체의 문제였다. 피장파장의 오류라는 말은 맞지만, 기장을 비난할 논쟁거리로 내세우는 제일 큰 주제들이 한국기독교 교파들 거의 모두에게 걸려있는 문제라는 것을 다른 시각으로 본다면 그만큼 기장에만 너무 가혹한 잣대를 들이대고 있음을 알 수있는 대목이다. 좀더 거칠게 말하면, 한국의 보수 기독교 교파들 중에 고신 외에 기장을 편하게 비난할 수 있는 교파는 찾기 힘들다.[25] 6월항쟁을 그린 영화 1987에 나오는 향림교회가 향린교회를 모티브로 한 교회이다.[26] 물론 군사독재에 대한 항거가 독재에 대한 항거라면, 그보다 악질이면 악질이지 나을 것은 없는 북한 정부에 우호적일 수는 없다는 점에 있어 자기 모순인 부분이 있다.[27] 기독교대한복음교회나 대한성공회[28] 본인의 의도가 어떠했건 그러한 행위가 북한의 선전활동에 어떻게 쓰이는 지 등을 생각해 볼 때 더욱 그러하다.[29] 실제 사망 직전에 그러한 입장으로 인해 "안기부의 프락치"라는 비판을 받으며 관련 인사와 논쟁을 벌이다가 쓰러진 뒤, 곧바로 다음날 사망하였다는 증언도 있다.(#[30] 그러나 교단은 저러한 목회자들이 모여서 만들어지는 하나의 단체라는 측면에서, "단지 일부일 뿐이다"라는 핑계로 비판에서 자유로워지기는 어렵다.[31] 성소수자만 있지 않기 때문에 성소수자 교회라는 표현은 애초에 잘못된 표현이다. 성소수자 목회를 중심으로 하는 대한민국의 교회로는 예장통합 출신 박진영 목사가 시무하는 로뎀나무그늘교회가 유일하다.[32] 보수 교단측에서 임보라 목사가 이단으로 의심된다는 근거로 드는 것이 퀴어 신학이라는 성소수자에게 포용적인 신학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동성애에 대한 찬반을 뒤고 하고라도, 이 문제를 가지고 신학적으로 이단이라 규정하는 게 맞는 지에 대한 논의가 있어야 할 것 같다. 기독교의 이단 판정은 그 교회의 신자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느냐 없는냐의 문제와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성소수자에게 포용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이단으로 지목하게 된다면, 이는 국내 기독교계에서도 판정 결과를 놓고 내홍이 있을 것이고, 미국이나 유럽의 많은 기독교 교단들과도 적지 않은 마찰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33] 엄밀히 말하면 19세기~20세기에 걸쳐 일어난 예전 회복 운동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오히려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보수 성향 장로교회에서 드려지는 예배 형태가 오리지널에 더 가깝다는 주장도 있다.[34] 원래는 불교에서 사용하는 법구로,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북한 지역의 사찰에서 많이 사용했다고 한다. 남한 사찰들이 상대적으로 덜 사용하는 편이지만, 불교용품 판매점이나 사이트에서 꾸준히 판매할 정도 수요는 나온다. 일본 애니메이션 등에서 '띵' 소리 나는 게 바로 이것이다. 같은 진보 계열인 성공회에서는 감사성찬례 때 종 대신 사용하며, 한국 천주교 역시 미사 때 좌종을 사용하는 경우가 꽤 있다. 인도네팔, 티베트 등지에도 좌종이 있지만 우리나라 좌종과는 모양과 소리가 약간 다르다. 좌종을 영어로는 싱잉 볼(singing bowl)이라고 부른다.[35] 대표적으로 서울 구로구의 ㄱ교회, 강서구의 ㅂ교회, 전북 전주시의 ㅇ교회 등.[36] 특히 기장과 포지션이 가장 가까운 예장통합과의 교류가 압도적으로 많으며, 예장백석, 예장합동 등과의 교류도 부분적으로 있는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