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하나회 (문단 편집) == 결성 과정 == >'''[[박정희|각하]], 군대 내부에도 각하를 추종하는 세력이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 >전두환(당시 [[대위]])이 군대에 남아있길 원해 박정희의 국회의원 출마 권유(사실상의 국회의원직 하사)를 거절하며 한 말.[* 이 인용문의 저 한 마디에 의해 만들어진 사조직이 하나회이다. 그러나 어느 나라든 군인이라면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에게 충성하는 게 당연한 이치임에도, 이 당연한 도리조차 돌아가질 못하던 당시 국군과 정계의 불안정성을 내포하는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일단 박정희 본인부터 쿠데타를 통해 대통령에게 대항하는 [[하극상]]으로 정권을 잡았으니 말이다. 또한 조직적인 대통령 직위를 향한 충성이 아닌 아닌 박정희 개인에게 충성하겠다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다.] 전두환, 노태우가 포함된 육군사관학교 11기는 1951년 [[6.25 전쟁|한국 전쟁]] 중 [[경상남도]] [[창원시|창원군]] [[진해시|진해읍]]에 육사가 개교하며 입학했다. 당시 가입교한 228명의 생도 중 [[경상남도]] 41명, [[경상북도]] 29명 등 육사 인근 쪽 사람들이 다수이고, 기타 지역은 [[전라북도]] 27명을 제외하곤 10명 미만으로 이전의 군사영어학교 ~ 육사 10기에선 이북 출신이 다수인 것과는 인적 구성부터 차이가 크다. 직업으로 보자면 전쟁상황이라 현역과 군속 113명, 학생 97명, 공무원 4명, 기타 14명이다. 이들은 1달간의 훈련을 마치고 200명이 1952년 1월 20일 정식으로 입학한다. 이들 11기는 가입교 시절부터 출신 지역별로 뭉쳤는데, 추워서 모포를 확보하기 위한 싸움을 하는 과정에서조차도 같은 지역끼리 보호해주었다고 한다. 처음에 같은 경북출신인 전두환, 노태우, 김복동, 박병하, 박갑용, 남중수 등이 몰려 다니고, 이후 손영길, 최성택 등 경남 쪽 생도까지 가세했다. 이 중에서 전두환, 노태우(전두환과 대구공립공업중학교 동기), 김복동(노태우의 경북고 1년 후배), 최성택, 박병하가 처음부터 의기투합한 '오인회'이다. 1년 후 [[백운택]] 생도가 가세하여 '식스 멤버'가 되었고, 최성택의 회고에 의하면 박병하가 유급하여 그를 제외하고 오성회(五星會)가 되었다고 한다. 당시 사관생도들은 군인의 꿈은 별이므로 '추성(雛星, 아기별)'이라고 불렀고 생도 문예활동을 정리하는 <추성>이라는 잡지를 매년 1~2회 발간했다. 이 때문에 졸업 후 총동창회 명칭도 '북극성'이 되었다. 최성택의 회고에 따르면 어느 날 이들 무리중 1명이 "모임의 이름을 붙이자"고 하였고, 누군가 '''오성(五星) 그룹'''이라고 하자고 하였다. 이어 별 성(星)자 돌림으로 이름을 짓자고 하여, '''용성(勇星) 전두환, 관성(冠星) 노태우, 여성(黎星) 김복동, 혜성(慧星) 최성택, 웅성(雄星) 백운택''' 으로 정해졌다.[* 12·12때 기준으로 전두환 소장은 보안사령관, 노태우 소장은 9사단장, 김복동 소장은 제3야전군 부사령관(경호실 작전차장보에서 10·26사건으로 인해 좌천됨), 최성택 소장은 육본 정보참모부 차장, 백운택 준장은 71방위사단장이된다.] 반면 노태우의 회고에 의하면 오성회는 오성회인데 인원은 '''휘성(輝星) 박병하'''를 포함하여 6명이라고 한다.[* 출처: 노태우 회고록, 1권 68페이지(2011년판). 이전 버전에는 "노태우 회고록 2장에 의하면 '웅성은 박병하"라고 작성되었는데 판본에 따라 다른 듯.] 최성택과 노태우 둘 다 오성회의 당사자이다 보니 양쪽 다 기재하지만, <제 5공화국>를 집필한 김철민씨는 여러 의견을 종합하여 최성택의 주장에 손을 들어주고 있다. 여기에 성(星) 앞에 붙는 호칭은 그들의 특징을 잘 살려 붙였는데 다음과 같았다. * 용성 [[전두환]]: 싸움을 엄청나게 잘해서 용맹하다 하여 용성. 실제로도 전두환은 타고난 파이터로 당시 싸움으로 '''대구 최강자'''였다. * 관성 [[노태우]]: 주어진 임무 수행을 칼같이 처리하여 관성. * 여성 [[김복동]]: 공부를 매우 잘해서 여성. 실제로 하나회 회원 중 임관성적이 가장 좋은 13등이었다. * 혜성 [[최성택]]: 지혜롭고 슬기롭다 하여 혜성. * 웅성 [[백운택]]: 남자다운 기질이 강하고 호방하여 웅성. 오성회는 일명 김태환회로도 불렸다. '''김'''복동, 노'''태'''우, 전두'''환'''해서 김태환회이다. 그만큼 이 3명의 영향력이 강했는데, 셋이 절친이기도 했으며[* 훗날 노태우는 김복동의 여동생인 [[김옥숙]]과 결혼하여 처남 매제지간이 되었다.] 특히 김복동과 전두환은 오성회 시절부터 주도권 다툼을 벌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이 싸움에는 전두환이 승리하면서 주도권을 쥐게 된다. 이 때문에 칠성회 혹은 일심회 초기 김복동이 잠깐 축출되었었다는 주장도 있다. 승진으로 보면 항상 [[손영길]]이 반발자국 앞섰고, 노태우는 한발자국씩 늦었다. 통상 손영길의 보직을 전두환에게 넘겨주고, 전두환은 노태우에게 넘겨주는 방식이었다. 준장 승진 때까지 치열한 경쟁이었는데 11기중 4명이 먼저 승진에 성공했는데 바로 전두환, 손영길, 김복동, 최성택이었다. 즉 100% 하나회원들끼리 승진했고 그중에서도 '김태환' + 손영길이 앞서 나갔다.[* 노태우는 다음해 준장 승진.] 손영길의 경우 공적으로는 박정희의 비서이고, 사적으로는 [[육영수]]가 집안 사람처럼 대우할 정도로 심복 중의 심복이었는데, 1973년 1월 준장으로 승진하자 그해 2월 박정희는 손영길과 전두환을 따로 불러 '일심'이라는 휘호가 새겨진 지휘봉과 함게 크라운 6기통 고급 승용차와 금일봉을 하사하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전두환-김복동-손영길의 3자 경쟁이 하도 치열해 군내 최대 실력자이자 하나회 후원자였던 [[윤필용]]은 "중장, 대장 올라갈 때 다투어도 되는데 왜 벌써부터 의리없게 싸우냐"고 호통을 칠 정도였다. 그들이 자주 다투던 이유는 전두환이 하나회 동기들까지 부하로 대했고, 이때문에 11기들은 좀 삐걱댔는데 특히 전두환과 김복동의 사이가 안 좋았다. 결국 전두환은 노태우와 짜고 최대 라이벌인 손영길을 준장 시절인 73년 [[윤필용 사건]]을 통해 제거하며 하나회 내의 주도권을 장악한다. 김복동은 12.12에 반기를 들었다가 1982년 육사 교장을 끝으로 예편하였다. 당시 20대 초반이었던 조직원들의 나이를 생각해 보면, 이 시기 오성회는 훗날 [[범죄 조직]]으로서의 모습보다는 친목 단체의 성격이 강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당시를 노태우는 오성회가 공개적으로 어울려 다니면서 다른 생도들이 우러러보는 집단이었다고 주장한다. 다만 공개 활동은 믿을 수 있어도 다른 생도들이 부러워했다는 주장은 믿기 어려운데, 오성회는 생도들이 동경할 만한 요소를 하나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육사에서 꾸준히 앞선 성적을 거두던 김복동[* 육사 졸업 이후 각종 교육 기관에서 항상 우등의 성적을 유지하였으며, 작전통으로도 뛰어났다.], 입학 당시 10위의 성적으로 영어가 유창하던 노태우 정도가 있지만[* 이것도 입학당시의 성적이었지 나중에 가면 노태우의 성적은 점점 떨어져 졸업때는 150여명중 67등의 그냥 중간권에 불과했다.] 전두환은 [[축구]]부 골키퍼로서 주장 정도만 했지 성적이 좋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고 전해진다.[* 이때 김복동은 송구부(핸드볼) 주장, 노태우는 럭비부.] 전두환은 국민학교를 4학년에야 시작했고 그것도 중간에 만주로 피신했다 오느라 2년 쉬는 바람에 공부가 부족하여 육사 입학시험부터 1차로 합격을 못하고 예비 후보로 겨우 입학했고[* 200명 정원이었지만 가입교에서 쳐낼 예정이라 228명을 합격시켰다. 전두환 자서전에 의하면 끝에서 2등.], 우수 생도가 하는 [[소대장]] [[생도]]를 한 번도 못 해본 것은 물론, 졸업 성적이 상당히 떨어져 성적순으로 부여되는 [[군번]]을 낮게 부여받았다. 심지어 다른 멤버 박병하는 아예 성적 미달로 유급당했다. 그렇다고 어디 잘나가는 연줄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단순히 그저 그런 친목 단체에 불과했다.[* 육사 11기 졸업생 156명 중 김복동만 13등으로 우수하고, 권익현 55등, 노태우 67등, 손영길 81등, 정호용 86등으로 전반적으로 성적이 안 좋았으며, 전두환의 경우 126등으로 유독 뒤떨어졌다.][* 그나마 저 126등조차 전두환치고는 많이 올라간 성적이다. 밤에는 연등을 하고, 아침 기상 점호 두 시간 전부터 변소에서 판초우의를 깔고 공부하고, 영어와 수학을 잘하는 생도(수학은 민석원 생도)를 찾아가 개인 지도를 받는 등 나름 열심히 성적을 올린 결과다.] 이런 문제로 사관생도 1학년~2학년 당시 전두환은 성적이 발목을 잡아 퇴교 위기에 몰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참고로 육사 11기의 수석 졸업자인 [[김성진(1931년 11월)|김성진]]은 입학 시, 재학 중, 졸업 시에도 몽땅 수석을 한 수학 천재였다. 일리노이대와 플로리다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육사 [[교수사관]], [[주미국 대한민국 대사관|주미대사관]] [[국방무관]], [[ADD]] 책임연구원 등으로 복무했다. 비하나회이며 1980년 준장 예편한 뒤, [[전두환 정부]]에서 안기부 기조실장과 1차장, 2차장, ADD 소장, 체신부와 과학기술처 장관, 국가과학기술자문위원장을 지냈다. 김성진은 대통령과 동기여서인지 전역 후에도 중용된 매우 특이한 케이스이고 그를 제외하면 이후 육사 수석 졸업자인 대통령상 수상자들은 소대장을 마치고 육사 전임직 [[교수]]가 되어 대령으로 예편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육사 11기에서도 김성진에 버금가는 성적 우수자였던 서우인, 강재륜, 김영국은 소대장 마치고 육사 교수로만 근무한다. 이 오성그룹 혹은 칠성회 인간들은 근거없는 [[선민사상]]에 쩔어있었는데, 이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육사 11기 기수 문제다. 이른바 '기칭 파동'. 이 사건을 이해하려면 육사의 역사를 조금 알 필요가 있는데, [[육군사관학교]]는 1949년까지는(훗날 1~9기) 단기 교육만 실시하던 사관학교였다. 그러던 중 1949년에 2년간 교육 과정을 정해서 교육생(훗날 10기)을 받았고[* 그러나 이들의 교육 과정은 입교 후 1년으로 변경되었다. 전두환 기수가 입학했을 때 구대장들이 이들 10기.], 다음 해인 1950년 6월 1일 처음으로 정규 4년제 교육 과정을 받는 교육생(기수 없음)을 받아 교육을 실시한다. 그러나 1949년 입학생이 임관을 코앞에 둔 시점이자, 1950년 입학생들이 기초군사훈련을 받던 6월 25일 [[6.25 전쟁|한국전쟁]]이 터져서 육군사관학교는 폐교되고, 아직 교육생 신분인 49년 입학생과 50년 입학생은 [[채병덕]]의 명령으로 전쟁 극초반에 소총병으로 포천에 투입되었다.[* 김재홍, 軍(군) 어제와 오늘 30화, 『동아일보』, 1993년 7월 29일 p5.] 이후 7월 10일, 교육이 거의 끝난 상태였던 49년 입학생들 중 생존자들을 찾아 임관식을 치렀다. 또한 국방부는 '전쟁 중이라도 장교 육성은 필요하다'고 깨달았고, 이후 아직 살아있던 50년 입학생들을 다시 찾아 육군종합학교에서 단기교육을 받게[* 따라서 이들은 육사 11기가 아닌 종합학교의 기수를 부여받았다. 육사 재개교 이후 이들을 복교시키는 논의가 있었으나, 이미 임관한 장교를 다시 사관생도 신분으로 내리는 것이 맞지 않다 하여 없었던 일이 되었다.] 하는 한편, 1951년 10월 31일 경상남도 진해에서 육군사관학교를 다시 개교하고 새로 4년 교육 과정의 교육생을 모집하는데, 이들이 바로 하나회 일당들이 입학한 11기 교육생들이다. 그러나 선민사상이 끝내준 것에 비하면, '''역대 육군사관학교 졸업생 중 최악의 자질들'''이었다. 인성이나 행보는 둘째치더라도 다들 공부를 매우 못했으며, 웃기게도 캡틴인 전두환이 제일 못했다. 이 시기의 육사 생도들과 비견되는 기수래봤자 [[내신]] 놀이로 입학한 54 ~ 58기, 그러니까 [[실업계]] 출신인데 내신만 좋아서 입학한 기수[* [[육군사관학교]]는 이 시기에 성적 미달 퇴교자가 독보적으로 많았는데, 이것 때문에 골치를 썩은 [[육군사관학교]] 당국에서는 결국 내신의 비중을 1차 전형에서 '''동점자 당락 기준''' 수준까지 매우 크게 줄였고, 국어, 영어, 수학 딱 3과목으로만 구성된 자체 고사를 1차 전형으로 바꾸게 된다. 그 결과 양주희(69기) 같은 매우 우수한 자질이 유입되었다. 참고로 양주희는 내신이 너무 개판이다 보니 추가 합격으로 겨우 입학했지만, 공부를 엄청나게 잘 했다. 소위 임관 성적이 '''수석'''인 사람이다.] 정도에 불과했다. 이 당시 육군사관학교 11기는 현재와 달리 [[갑종간부후보생]]에게 입지가 밀려있었으며, 2020년 기준으로 따지자면 거의 [[학사장교]]급 위상을 갖고 있었다. 갑종간부후보생이 육군사관학교 11기보다 위상이 높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는 게, 이들은 '''[[6.25 전쟁|한국전쟁]] 참전용사'''라는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육사 11기가 생도이던 시절에 이미 현역 장교로 수많은 전투에 참전했다. 위상 차이가 [[넘사벽]]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들 육사 11기는 자신들이 공부를 못 했던 것에 대한 콤플렉스로, 이후 육사 출신 후배 장교들 중 하나회의 회원을 고를 때 학업 성적을 보는 경향이 강해졌다. 그리고 이 교육생들이 졸업할 때쯤인 1955년 4월 27일, 육군본부는 '참전용사들의 대우를 겸해서 과거에 입학했던 군인들에게 육사 1기~10기를 부여한다'는 명령을 했다. 그런데 전쟁 중에 후방에서 안전하게 교육을 받던 1951년 입학생들은 이 조치에 반발했고, 그중 최우수 생도 김성진과 웅성(雄星) 백운택이 대표로 정일권 육군참모총장에게 항의하려다 만나지도 못하고 헌병대에 끌려가는 일이 있었다. 반면 전두환은 육사교장 [[박병권]] 장군에게 무릎을 꿇고 사죄하여 그냥 넘어 갈 수 있었다. 노태우는 이 일을 두고 회고록에서 "어려움과 배고픔을 견디고 간신히 졸업했는데 우리의 자존심을 무너뜨린 일"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위에서 언급했듯이 얘네가 후방에서 시험 걱정할 때 육사 1기~10기는 목숨 걱정부터 해야 하는 참전 군인들이었고, 객관적으로 봐도 3년간 실전 경험을 갖춘 군인들이었다. 참고로 얘네는 전부 생존했지만 육사 1기~10기는 '''매우 많은 인원들이 북한군과 처절하게 싸우다 __목숨을 잃었다.__''' 그냥 안전한 곳에서 교육만 받던 이들과, 감히 수많은 동료들의 죽음을 겪고 그 지옥 같은 곳에서 나라를 위해 싸운 참전용사는 감히 비교하는 것 자체가, 육사 1기~10기에게 죄를 짓는 것이다. 이 행동은 [[미국]] 같은 나라였으면 군인이기 이전에 사회에서 매장당할 발언이었지만, 1951년 입학생 중 유의진 1명만 퇴학 조치되는 걸로 마무리되었다.[* 출처: 노태우 회고록, 2장, p74~75.] 이런 소동 끝에 육사 11기가 된 이들은 1955년 9월 30일자로 156명이 졸업하였다. 동년 10월 4일 소위 계급장을 달았으며 초등군사반 과정을 마치고 다음해 3월 전방 소대장으로 일제히 나간다.[* 전두환은 21사단 66연대 1중대 소대장.] 한편 소대장 생활이 끝난 후 수석졸업자 김성진을 필두로 성적순 몇 명이 차출되어 미국 유학 또는 서울대 대학원 과정을 거쳐 1959년 2월 육사 교수요원으로 임명되었다. 이들은 이른바 '학구파'라고 불렸는데 전두환·노태우 등 '운동부'의 최대 라이벌이었다. 학구파들은 육사 교수생활을 하며 '[[청죽회]](靑竹會)'(서울 또는 이북 출신)를 만들었고 운동부들은 '하나회'를 만들었는데 이들은 매사에 부딪치게 되었으니 청죽회 vs. 하나회라고 할만하다. 1961년 4월에는 육사총동창회인 북극성회가 만들어졌다. 초기에는 실력있고 육사후배들과 계속 관계를 맺는 위치였던 육사 교수 신분은 학구파가 중심이 되었다. 초대 회장도 육사 교수 강재륜. 그리고 [[5.16 군사정변]]이 터졌다. 육사 교수는 못되니 대신 ROTC를 장악할 야심에 서울대 교관으로 나가 있다가 뒤늦게 소식을 들은 전두환은 다음날인 17일에 육사에 나타나 생도들을 이끌고 지지 시위를 하자고 하였다. 강영훈 육사 교장이나 동기생인 강재륜 교수등은 반대를 했지만, 쿠데타에 반대하던 교수들이 한명씩 끌려가자 상황이 달라졌다. 결국 18일에 육사 18기~21기 재학생들의 지지 시위가 있었고 5.16. 쿠데타를 결정적으로 성공시킨 사건으로 꼽힌다. 덕분에 전두환은 박정희의 눈에 들었다.[* 지지 시위는 전두환 혼자 했다는 것은 과장된 것이고, 실제로는 박정희의 기획이었다. 박정희는 쿠데타 하루 전날 11기 이동남에게 생도 지지 시위를 지시하였고, 이동남은 동기생인 강재륜 교수, 서우인 교수, 그리고 당시 서울대 ROTC 교관이었던 전두환 등을 만나 지원 요청을 하였다. 그리고 5월 17일 있던 육사 설득 과정은 당시 육본에 있던 [[박창암]] 대령(육사 생도대장 출신)이 전화로 지휘 하였는데, 그는 반대하는 강영훈 육사 교장을 쏴 죽이라며 강하게 푸시하였다. 그리고 현장에서는 육사 11기 손운익이 주역이었으며 강영훈 교장에게 "반대도 말고 찬성도 말고 가만히 계십시오."라고 설득하여 희생없이 생도 지지 시위를 이끌었다고 한다.] 이후 박정희는 자신의 경호를 위해 충성스러운 젊은 장교들을 원했는데 박종규 소령과 차지철 대위가 각각 10명씩 선발한다. 이중 [[차지철]](갑종장교 출신) 쪽은 별 볼일 없고[* 공수단 출신 위관 장교 10명으로 구성 되었는데 이른바 'GD'팀이라고 부른다. 중앙정보부가 창설되자 그쪽으로 들어가 주먹부대로 활약하였다. 결국 지들끼리 청와대에서 주먹질 하다가 자폭한다.], [[박종규]](육사 8기)는 정규 육사 11기생 10명을 차출했는데 이들이 바로 전두환, 노태우, 김복동, 최성택(이상 오성회), 손영길, 권익현, 박갑용, 노정기(전원 경상도 출신. 훗날 하나회 창설 멤버) 등이다. 이들은 경호실 근무로 권력에 핵심에 있었으며 이때 [[청와대]]에서 함께 근무하던 박종규와 차지철, 윤필용 비서실장 대리는 훗날 하나회의 최대 후원자가 된다. 이들 청년 장교는 경호실 근무가 끝난 이후[* 이런저런 일로 실제로 경호실에 근무하지는 않았다. 전두환은 의장실 민정비서관, 최성택은 총무비서관으로, 노태우는 방첩대 정보과(최고회의 담당 요원), 기타 다른 육사 11기들은 방첩대로 빠진다.] 한 계급씩 진급하여 끗발 있는 보직으로 갔는데, 손영길은 최고회의 박정희 의장 전속 비서, 전두환 소령은 중정 인사과장(김복동, 권익현도 중정), 노태우는 보안사 방첩 과장이 되었다. 그리고 1962년 말부터 오성회 중 김복동을 제외하고 전두환, 노태우, 최성택, 백운택 4명에 손영길, [[권익현]], [[정호용]]를 포함하여 '''칠성회'''로 개편되었다.[* 전두환에 회고록에 의하면 오성 장군이 되자는 뜻에서 '5성회'였기 때문에, 일곱 명이 모였다고 7성회라고 하진 않았다고 한다.] 이들 칠성회는 이후 하나회의 모태가 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워낙 보안을 철저하게 지켜 1973년 윤필용 사건 때까지 하나회가 아닌 칠성회로만 알려졌다. 그러다 1963년 2월 18일 박정희 전 의장이 원대 복귀 및 민정이양을 발표했다. 그러자 군인들은 최고회의 앞마당에서 반대 데모를 하는데, 이는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다.[* 박종규의 지시로 수경사 장교와 하사관들 벌인 시위를 했다.] 육사 11기의 정치 군인들도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박정희 의장의 전속부관 손영길을 앞세워서 전두환, 노태우, 권익현, 박갑용 등 5인은 의장 공관에 찾아가 원대 복귀 불가론을 제기한다. 그러자 박정희는 "여러분 뜻은 잘 알아. 그러나 정치는 그렇게 하는 거야."라며 자신의 민정이양이 페이크임을 알리고, "앞으로 일을 하려면 정규 육사 출신들이 똘똘 뭉쳐 나를 도와줘야겠어."라며 육사 장악을 지시한다. 이에 칠성회를 중심으로 노정기[* 소장 예편.], 박갑용[* 박정희의 당번병 출신, 월남전 때 중상을 입어 대령 예편.]이 합류했고, 김복동이 복귀하였는데 이를 '''텐 멤버'''라고 부르며 이들 10명이 1963년 일심회 창설 멤버가 되었다.(이후 하나회로 개명) 즉 '''오인회(1951년) → 오성회(1952년) → 칠성회(1962년) → 텐 멤버(1963년) → 일심회(1963년) → 하나회(1963년)''' 순으로 확대 발전한 것이다. 한편 육사 출신들을 이끌어 나가는 것은 11기생 중 생도 시절 성적이 좋았던 장교들이 모인 상술한 '청죽회'가 중심이었는데, 5.16. 군사정변 때 육사생도들의 지지 시위를 요구할 때 당시 육사교수부에 배속된 청죽회는 이를 거부했다.[* 다만 이상훈의 경우 육사 동기인 전두환과 친분이 매우 깊어 지지 시위 주도를 같이했고 이 공로로 대장까지 진급하는데 성공함은 물론, 국방부 장관까지 지냈다.] 평시였으면 당연히 성적이 좋았던 청죽회가 군대의 요직을 차지할 것인데, 박정희 입장에서는 청죽회의 충성심(?)이 의심되는 상황에서 전두환처럼 비청죽회 동문을 중용할 필요가 있었기에 이런 지시를 한 것이었다. 여기에 박종규 경호실장에게 "박 실장, 앞으로 이 친구들 일하는 데 적극 도와줘"라며 백업을 명한다. 이에 박정희를 만난 텐 멤버를 중심으로 육사 장악을 시도하는데 청죽회 등 육사 교관단은 학창 시절 공부도 더럽게 못한 전두환 소령이 나대는 것을 보고 "네가 뭔데 나서냐"라며 고깝게 여긴다. 또한 청죽회에는 이북파들이 많았고 이들이 육사 총동문회인 '북극성회'를 주도하고 있었다. 이에 전두환은 당장 북극성회를 장악하는 것은 무리라고 보고 영남 중심의 소규모 비밀 조직을 만들기로 한다. '''이것이 바로 육사 내부 영남 파벌의 일심회이다.''' 이 일심회가 바로 하나회의 초기 형태로, 뜻은 '[[박정희|태양]]을 위하고 조국을 위하는 하나 같은 마음'에서 나왔다.(윤필용 증언) 멤버 선정은 물론 전두환, 노태우, 권익현이 했다. 이때 노태우의 조직력이 뛰어나 후배들에게 호평받았다. 그런데 동기생들은 운동부인 전두환 자체를 싫어하니 합류할 가능성이 없었고, 12기~13기 역시 육사 생활을 함께 하며 전두환이 어떤 놈인지 잘 알았기 때문에 껄끄러웠다. 이에 럭비부 출신의 14기 [[배명국]][* 중령 예편. 청와대 민정비서실에서 근무중 윤필용 사건 때 워낙 하나회의 핵심이라 구속되었다. 훗날 3선 국회의원으로 보상받음.]이 후배기수 포섭에 주력하였고 이로인해 12기~13기가 14기보다 늦게 가입했다. 이때 일심회 11기는 텐 멤버 10명 + [[안교덕]][* 대령 전역 후 국회로 진출. 훗날 노태우 때 민정수석.], 남중수[* 경북 청송 출신에 대령 예편. TK 출신으로 오성회가 만들어지기 전부터 전두환-노태우와 어울렸다. 에너지관리공단 감사 역임.]로 구성된다. 이후 '''명칭이 하나회로 변경'''되는데, '국가도, 우정도, 충성도 하나'라는 뜻으로 11기가 정했다.[* 전두환 자서전에 의하면 '민주도 하나, 나라도 하나, 충정을 바칠 곳도 하나'라는 의미이다.] 가입 절차는 몇 년 동안 철저히 심사한 후, 약속한 시간에 11기 중 어느 집에 가면 11기 전체 회원이 일렬로 앉아 있는 곳에 혼자 가서 무릎을 꿇는다. 한 가운데에 전두환 회장이 앉아 있었고, 가입자는 무릎을 꿇은 채 오른손을 펴들고 다음 4개 항의 선서를 한 뒤, 11기 중 1명이 따라준 [[적포도주]]를 마시면 가입이 완료된다. >하나, 국가와 군을 위해 충성을 다하라. >하나, 선후배와 동료들에 의해 합의된 명령에 복종한다. >하나, 회원 상호간에 경쟁하지 않는다. >하나, 의리와 맹세를 저버리면 인간적 자격을 박탈당하는 것을 각오한다. 한 단어로 '''[[야쿠자]]''' 그 자체로, 특히 마지막 조항은 이들이 비밀 조직임을 확실히 하는 것이었다.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다. * 정규 육사 출신을 매 기수별로 정원제를 유지하여 가입시키되, 기수당 2~300명 중 약 5% 수준인 10명. 최고 13명까지 하며 자격은 위관급 장교에서부터 주어진다.(통상 중위~소령 때 가입했지만 더 높은 계급에서 뒤늦게 합류하는 경우도 있었다.) * 가입에는 만장일치에 가까운 동의가 필요하다. 일단 11기 중 1명이 한 기수에서 최초 1명을 추천하고, 그에 대한 '''철저한 뒷조사'''를 거쳐서 11기 전체의 동의를 받아서 선발했다. 그 최초의 1명이 자기 기수를 추천하고, 추천 받은 사람은 역시 11기와 해당 기수 동기 전체의 동의를 받아야 권유 명단에 포함된다. * 고위층으로부터 활동비를 지급받거나, 재벌로부터 자금을 수령한다. * 회원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혜택은 진급 및 보직 상의 특혜라고 하는데, 당시 육군에서는 인사 정체가 심화되어 정규 육사 출신들은 의무 복무 기간 5년이 끝나고 장기 복무에 들어가게 되면 재기별로 현역 총원의 1/2씩만 상위 계급으로 승진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하나회 가입은 군 내에서의 출세가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출처 <한국의 군부정치> 한용원, 321쪽.] 이러한 조건에 맞추어 일심회는 육사 졸업생 중에서 기수별로 10여 명을 선정하여 거의 [[스토킹]]에 가까운 설득과 강요로 가입시켰다. 선정 조건은 '''영남 지역 출신, 성적 우수, 정치색'''이었다. 대충 조건이 맞아 보이면 강제로 가입시키다시피 했다고 한다. 다만 처음부터 위 3가지 조건에 일치하는 사람만 골라 뽑기보다는, 한두 가지가 빠지더라도 다른 하나가 월등히 좋은 조건이면 가입시켰다. 예를 들면 영남 출신에 성향도 맞으면 성적이 평타만 되더라도 가입시켜준다거나, 혹은 성적 우수가 매우 중요한 요인이었기 때문에 육사를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한 이들은 영남 출신이 아니라도, 심지어 [[전라도|호남]] 출신이라도 뽑았다. 대표적인 예로 전라북도 부안군 출신 [[고명승]]이 있으며, 흔히 [[장세동]]도 호남 출신의 하나회원으로 꼽는데 사실 그는 [[전라남도]] [[고흥군]] 출신이지만 국민학교 때 이사하여 계속 서울특별시에 거주하는 바람에 하나회 가입 전이든 후든 서울특별시 출신으로만 알려져 있었다. 그가 하나회에 가입된 건 육사를 매우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 모든 조건과 상관 없이 하나회의 빽이 되어 줄 수 있는 고위 장성의 친인척이나 부관들은 최우선으로 가입시켰다. 그러나 이북 출신은 절대적으로 배제되었다. 이는 박정희가 하나회를 만들라고 한 이유 자체가 [[백선엽]], [[이종찬]] 등 당시 군을 장악하고 있던 이북 출신을 견제하기 위함이고, 전두환 입장에서는 서울·이북 출신이 중심이었던 청죽회랑 라이벌 관계였기 때문에 이북 출신은 배제된 것이다. 이 때문에 '한수 이남 지역 출생자만 가입 가능' 이라는 말이 있었다. 가입 후에는 점조직으로 관리했기 때문에, 동기 회원들끼리도 누가 하나회 회원인지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초급 간부 시절에는 몰라도, 하나회가 요직을 독점한 탓에 나중에 가면 진급이나 직책으로 어느 정도 파악이 가능했다. 워낙 가입이 엄격하다 보니 육사 13기 최세창[* 전두환과 미국 특전부대 유학 동기다.]의 경우에는 심지어 12.12. 사태 이후에나 가입이 가능하였다. 사전에 11기와 13기에게 엄격한 심사를 받아 왔고, 12.12. 와중에 보여준 충성심이 좋게 평가되어 가입이 된 것이다. 이렇게 신중에 신중을 기해서 결성했기에 작업에 착수한 지 1년 반이나 지난 후에야 [[이순자]]의 친척집에서 첫 모임을 하게 되었다. 이때 참석자는 서울 인근에서 근무하는 20명. 이후 연합 모임은 없었고, 1년에 한번 기별 정기 총회가 있을 뿐이었다. 이때 11기 중 1명이 반드시 참석해서 격려해주는 전통이 있다. 이 때문에 11기를 제외하고 같은 기수가 아니면 서로 하나회원인지 몰랐다고 한다. 위계질서가 생명인 군대에서 이들은 '형님', '아우'하고 호칭했으며 특히 11기의 경우 '큰형님'이라고 불렀다. 하나회의 후원자인 윤필용은 '대방동 큰형님'이라고 했으며, 박정희는 '태양'으로 칭하는데, 이들 사이에 일종의 암호 같은 역할을 하였다. 모르던 후임 장교가 와서 자신을 '형님'이라고 부르면 그제서야 하나회원인지 알게 되는 방식이다. 하나회를 영남 출신 위주로 꾸린 것은 5.16. 쿠데타 이후의 파벌 싸움과 관계가 있다. 5.16 쿠데타 이후 군사 정권 내에서 [[함경도]] 출신 [[정일권]], [[김동하(군인)|김동하]], [[박임항]] 및 [[평안도]] 출신 [[장도영]], [[백선엽]] 및 [[경상도]] 출신 [[박정희]] 간의 권력 투쟁이 벌어진다. 결국 박정희는 1961년 7월 3일 평안도 출신 장도영 장군을 쿠데타 음모 혐의로 구속하고, 11월에는 함경도 출신 김동하, [[박창암]]도 쿠데타 혐의로 체포하면서 군부 내에서 이북 출신 세력을 완전 제거하고 일인독재를 확립한다. 이런 이북 출신에 대한 일련의 숙청을 당시 군부 내에선 "알래스카 토벌작전"이라고 불렀다. 1948년 남북이 각각의 정부를 수립하고, 1950년~1953년 한국전쟁이 벌어지면서 이북에서 자유를 찾아 내려온 사람들이 있었고, 이들 중에서 적지 않은 수가 육사 5기와 군대에 입대하여 파벌을 형성하였다. 그런데 1945년~1950년에 이북은 '겉은 빨갛지만, 속은 하얀 사과'였고, 남쪽은 그의 반대였기에, 1953년 휴전 이후에 이북 출신들이 상당한 세력을 구축하였다. 그런데 비록 육사 2기였지만 박정희는 남로당 관련 논란으로 한때 사실상 군복을 벗고 있을 때도 있었기에 그 위치가 높지 못하였다. 이는 [[국가재건최고회의]] 활동 시기에 국정 주도권을 잡기 위한 권력 투쟁을 불러왔다.[* 장도영은 5.16 당시 육군참모총장으로, 박정희에 반대되는 세력을 지지하였기에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으로 추대되었다가 이후 쫓겨나 해외를 유랑해야 했다.] 또한 위에서 나온 육사 '기수' 문제에서 정기 4년제 1기인 11기생들에 대한 장악은 김종필을 필두로 한 육사 8기에 대한 견제가 작용하였다. 전두환은 이 긴박하고 혼란했던 시기에 하나회를 만들어냈다. [[함경도]] 출신 정일권, [[평안도]] 출신 백선엽 등 몇몇 이북 출신들이 살아남았지만 이후 군내에서 세력화는 하지 못하고 박정희한테 절대 충성하는 부하로 전락한다. 이 과정에서 박정희는 "군을 완전히 휘어잡기 위해서는, 믿을 수 있는 내 고향 후배들로 구성된 사조직이 필요하다"고 느낀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