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하나회 (문단 편집) === 해체의 의미 === [[1995년]]에는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구속 사건|전두환과 노태우가 내란죄 및 횡령, 살인죄로 구속기소되고 법정 최고형인 사형까지 구형받았다.]] 그리고 모두가 알다시피 반란 수괴 전두환은 사형, 노태우는 징역 22년 선고. 그러나 두 사람 모두 [[김영삼]] 임기 말에 [[특별사면]]되었다. 당시 대통령 당선인이었던 [[김대중]]의 요청에 의한 사면이라는 게 대체적인 정론[* 사실 [[사면]]은 임기 막바지에 당선인과 함께 논의해서 정하는데, 임기가 얼마 안 남은 대통령은 끈 떨어진 갓 신세고 가장 힘이 셀 때가 당선인 때다. 김영삼도 당선인 신분 때 [[장세동]]을 날렸으니…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7/1772223_19482.html|기사]]. 이런 정치적 관행(?)이 꼬여서 훗날 문제가 된 사례가 바로 [[2022년]] 정권 교체기인데, [[윤석열 정부|후임 정부]]는 자기들 의견이 반영되는 걸 너무 당연하게 주장해서 전임 정부를 물먹였고 그걸 또 [[문재인 정부|전임 정부]]는 너무 대놓고 거부해서 후임 정부를 물먹인 것이다.]이기는 하지만 김영삼의 회고록에서는 김영삼 자신이 오래 전부터 이 두 사람을 사면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를 다음 정권에 넘길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김대중은 소극적으로 동의했다고 나온다. [[https://www.youtube.com/watch?v=jjaWpJ2P304|9분 43초부터]] 그런데 전반적으로 회고록의 성격이 "잘한 건 다 내가 하고, 못한 건 다 김대중이 했다"는 식이기 때문에 판단은 개인에게 맡겨야 할 것 같다. 다만 김대중 역시 특별사면된 전두환과 노태우에 대해 본인이 집권하고 있던 시절에 정치 보복을 하지않고 오히려 청와대에 초청해서 잘해줬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굳이 김영삼이 특별사면을 안했다고 해도 김대중 정부 시절에 특별사면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전두환도 DJ 시절이 전직 대통령들이 살기가 가장 좋았다는 발언을 한적이 있었다. 김영삼은 훗날 인터뷰에서 "내가 하나회를 해체하지 않았다면 [[김대중]], [[노무현]] [[전직 대통령|전 대통령]]은 당선되지 못했을 것"이라면서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사실 하나회 자체가 군을 실제로 동원할 수 있는 장성들의 사조직이었던 만큼, 그들이 해체에 반발하여 쿠데타를 일으킬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이야기가 '군 김대중 비토(veto)설'이다. 이 주장은 [[전두환 정부]] 때부터 흘러나오기 시작해서 김대중이 대통령 선거에 나설 때마다 흘러나왔다. 심지어 하나회가 완전히 숙청된 이후인 [[제15대 대통령 선거]]까지도 흘러나왔다. 그만큼 하나회 해체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고, 자칫 잘못하면 애써 이루어낸 민주화가 도로아미타불이 될 수도 있었던 절체절명의 순간이기도 했다. 실제로 하나회 출신 군 수뇌부를 제거할 때 국방부장관을 비롯한 군 지도부가 쿠데타 상황까지 경계하며 보름 동안 밤샘 대비를 하기도 했고, 실제로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숙청 과정에서 쿠데타설이 돌기도 했다. 아무튼 "김영삼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는 평가가 대세이다. 김영삼은 노태우 전 대통령 이후 [[민주정의당]] 측이 대통령 후보를 물색하다가 내세울 만한 사람을 못 찾고 [[3당 합당]]을 통해 여당으로 끌어들인 사람이기 때문에[* 물론 여기에는 김영삼의 계산도 작용했다.] 대통령 취임 이후 여당인 [[민주자유당]]을 전부 휘어잡을 명분을 얻었고, 이를 바탕으로 생각보다 쉽게 하나회를 해체시킬 수 있었다. 만약 김영삼이 다른 당 소속이었거나 김대중이 대통령이 된 상태에서 하나회 해체를 시도했다면 12.12. 군사반란 시즌 2를 찍었을 가능성도 있다. 하나회를 숙청하고 빈 자리에 주요 인사를 하는 과정에서 비밀 유지를 위해 김영삼은 국방부나 군 관련 인물을 배제한 채 최측근들과만 일을 논의했는데, 이런 인선 과정에서 위에서 언급했던 김동진 육군참모총장([[경복고등학교]]), 김희상 국방비서관(경복고)[* 이후 핵심 요직인 수도기계화보병사단장 -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장을 거쳤으나, 정권이 바뀌고 좌천되어 중장 한직인 1군 부사령관과 국방대 총장을 지내고 전역했다. 이후 참여정부 출범과 함께 대통령비서실 국방보좌관과 국가비상기획위원장을 지냈다.], 김영삼의 차남 [[김현철(1959)|김현철]](경복고) 등 이른바 [[경복고]] 라인이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이후 김현철은 권력 실세로 우뚝 섰다. 그러나 이렇게 권력 실세가 된 김현철은 이후 부패 권력의 상징이 되어 몰락하고 만다. 김현철이 하나회 숙청의 브레인이라는 말도 있지만, 김현철은 스스로 [[http://ilyo.co.kr/detail.php?number=57677&thread=02r01/|부인]]했다. 자기도 몰랐다는 것이다. 조언자는 김희상 당시 국방비서관이었는데, 김현철은 "김희상도 정확한 날짜는 몰랐을 것"이라고 할 정도였다.[* 김희상도 전혀 몰랐다는 말도 있다.] 흥미롭게도 "김영삼이 평소에 맺힌 것이 있었기 때문에 한 방에 날려버린 것"이라는 주장을 한 사람도 김현철이다. 이런 김현철의 언급에서 보면, 과거의 원한은 반드시 푸는 것과 절대적인 보안을 유지하면서 과감하게 일을 저지르는 김영삼 특유의 정책 시행이 잘 드러나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김현철 본인에게 가장 큰 업적이 될 수 있는 일을 부인한 것을 보면, 정말 몰랐던 것이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여러 증언을 종합해 볼 때, 숙청 과정에서는 김현철이 개입하지 않았고 숙청 이후 인선 과정에서 [[경복고등학교]] 라인으로 일부 개입한 것으로 보인다. 하나회 숙청 브레인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김영삼의 절친인 김윤도 변호사가 이끄는 조직과 [[제1야전군사령부]] 기무부대장 출신의 [[예비역]] 중령 A씨를 비롯한 예편 장교 그룹이 한 것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