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하나회 (문단 편집) === 비하나회 신군부 === 첫번째 기념 사진속의 인물들 중엔 쿠데타와는 별개로 하나회 멤버가 아닌 인물들도 더러 있는데, 앞줄 가장 오른쪽에 있는 김기택 준장은 신군부 세력의 서울 통과를 사실상 방조했고 위의 사진에 나와 있듯 사진 촬영에도 참여했기 때문에 [[반란군]]이라는 측면도, 또 반란 당시 수경사령관 [[장태완]] 소장에게 경복궁의 수경사 30경비단에 모여 있는 [[반란군]] 장교들의 명단을 적은 쪽지를 건넨 점, 반란 성공 직후 수훈명단에는 배제되었다는 점에서 진압군의 성격도 갖고 있다. 김기택 준장은 전두환과 육사 동기로, 이후 1980년 소장 진급에 성공해 [[제25보병사단]]장과 [[국방대학교 총장|국방대학원장]]을 지내고 1984년 소장 예편. 2010년 항년 80세로 사망했다. 둘째 줄 왼쪽에서 3번째의 [[권정달]] 대령 또한 하나회 출신은 아니지만, 12.12 군사 반란 이후 보안사령부 정보처장으로서 언론 통폐합과 검열을 주도하고 [[5.18 민주화운동]]을 불러온 1980년 5월 17일의 [[5.17 내란|5.17 비상계엄 확대 조치]]에 깊숙이 관여했다. 이 공로 민주정의당 초대 사무총장과 11대, 12대 국회의원으로 5공화국의 권력 핵심부에 진입했다. 그러나 [[장영자]], [[이철희(군인)|이철희]] 사건의 책임을 지고 사무총장을 사퇴했고, 노태우 정부 출범 이후에는 권력에서 완전히 소외되었다. 이후 권정달은 민주당 계열로 다시 자리를 옮겼다. 둘째 줄 왼쪽에서 7번째 인물인 우국일 준장도 하나회 소속은 아닌 사람인데 보안사 참모장 자격으로 사진 촬영에 나왔다. 한편, 전두환은 자기 부대 참모장인 우국일에게도 반란 거사 계획을 일체 비밀로 했기 때문에, 우국일은 쿠데타 계획을 전혀 모른 채 전두환 사령관의 지시에 따랐을 뿐이었다. 나중에 우국일은 전두환 일파와 코드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쿠데타가 끝나고 6일 후인 12월 18일 합동참모본부로 전출 명령을 받고 보안사를 떠난다.[* 우국일 준장은 통역장교로 임관하여 커리어 내내 보안부대에서 보내다가 말년에 합참으로 갔고 이듬해인 1980년에 준장 계급으로 군 생활을 끝냈다. 2009년 사망.] 셋째 줄 오른쪽에서 3번째 인물인 [[이상연]] 대령도 하나회 소속은 아니었으나 [[10.26 사건]]과 [[12.12 군사반란]] 당시 [[국군기무사령부|보안사]] 감찰실장, [[국군기무사령부/사령관|보안사령관]] 특별보좌관 등을 지내며 10.26 사건 때 [[국군서울지구병원]]으로 [[박정희]]의 시신을 옮긴 후 대통령 주치의 [[김병수(1935)|김병수]] 공군 준장을 인질로 잡고 있던 궁정동 안가 요원 유성옥, 서영준을 체포했고, [[전두환 정부]]에서 [[민주정의당]] 중앙정치연수원장, 정무장관 보좌관, [[서울특별시]] 제1부시장, [[대구광역시장|대구직할시장]], [[국가안전기획부]] 제1차장 등을 역임했고 이후 [[노태우]] 정권에서도 [[국가보훈처장]], [[행정안전부장관|내무부장관]],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비서관]], '''[[국가정보원장|국가안전기획부장]]'''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사진에 나오지 않은 [[이기룡]] 당시 제1공수특전여단 참모장은 제5공화국에서 승승장구하여 육군 소장까지 올랐고 전역했다. ---- || [youtube(Q1X8c2P2CKo)] || || 전두환 주축으로 결성 된 하나회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