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하나회 (문단 편집) === 군부의 반발과 최후 === 하나회 1차 숙청이 진정 국면으로 들어간 [[1993년]] [[7월 9일]], [[이양호]] 합참의장 취임 한달 기념으로 합참 장성들이 모인 회식 자리[* 서울특별시 성동구 옥수동 475. 사파리가든(舊사파리클럽), 폐업, 언제 재건축 되었는지는 모르나 흔적도 남아있지 않다. 현재 그 자리에는 한남 더 리버라는 오피스텔이 들어서 있다.]에서 하나회 소속인 합참 작전부장[* 지금도 작전직능 소장에게는 상당한 요직이다.] 이충석 소장(육사 21기)[* 당시 [[제1보병사단]]장을 마치고 소장 2차 보직을 수행 중이었다.]이 물컵으로 탁자를 몇 차례 내려치면서[* 먼저 불만 섞인 발언 후 얼마 지나 흥분에 못 이겨 중국식 찻잔을 던져 깨트렸고 이후 추가로 맥주컵을 던졌다는 설도 있다.] '''"군을 이런 식으로 막 해도 돼? 선배들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게 뭐냔 말이야. 소신도 없고, 다 죽었어! 정부가 장군들을 함부로 대하니까 외부에서도 제멋대로 군을 매도하잖아! 이래도 되느냐 말이야!"'''라는 불만 섞인 발언을 했고 회식 자리가 서둘러 마무리된 일이 있었다. 이른바 '사파리가든 회식 사건'이라고 한다. 당시 이양호 합참의장은 일어나 나갔으며, 합참1차장 편장원 대장은 직접 말렸고, 하나회 19기 선배인 김상준 작전본부장과 이택형 전략기획본부장은 보고만 있었다고 한다. 결국 이충석 소장은 술 취해 업혀 갔다.[[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3730701|당시 사건을 보도한 KBS뉴스]] 김영삼과 非하나회로 구성된 군 수뇌부는 이를 전해듣고는 이 사건을 하나회가 청산을 받아들이지 않고 군 통수권자에게 저항하려 한다고 판단했고[* 저항 수준이 아니라 이미 [[쿠데타]]를 벌이기 전 단계였다는 주장도 있다. 아래 문단에서 후술.], 새 합참의장인 이양호 대장은 분노했다. '''결국 하나회의 군사 반란을 우려해 일부러 내버려뒀던 일부 장성과 영관급 회원까지 모조리 쓸어내는 것으로 방침을 바꾼다.''' 먼저 문제의 발언을 한 이충석을 16일에 보직 해임[* 그 후임은 육사 동기인 이규환 합참 작전기획부장이 임명되었다. 이규환 장군은 현 수도방위사령관인 [[이진우(군인)|이진우]] 중장의 아버지다.]함과 동시에 강제 전역시키는 것을 시작으로 나머지 하나회 장성들을 모조리 강제 전역시켰다. 장성급을 정리한 이후에는 영관급을 숙청했다. 하나회 출신들은 계급을 막론하고 진급과 직위에서 철저하게 배척당했으며, 그렇게 하나회는 이전의 권력을 완전히 잃고 말 그대로 완전히 개박살났다. 이충석은 전두환의 대리인이라고까지 불리는 존재로 하나회 계보를 보자면 12기 박희도 - 14기 이종구 - 17기 김진영의 뒤를 잊는 21기의 전통 전두환맨이다. 전두환이 1사단장일 때 예하 대대장이었고 이후 수경사 30경비단장, 1공수여단장, 1사단장을 역임했다. 그야말로 진퉁 1-1 라인. 게다가 며칠이 지나고 육본 인사참모부장에서 교육사령부 참모장으로 내쫓긴 [[최승우]] 소장(21기 하나회)이 김진영 전 육군참모총장, 2군단장 김길부 중장(20기)과 모의해서 군사반란을 일으킨다는 문건이 [[기무사]]에 들어가면서 문제가 더 커졌으나[* 하나회 측에선 안기부의 이 모 소장이 작성했다고 주장. 본인은 부인함.] 무혐의로 결론났다. 그럼에도 최승우 소장은 육본 정책위원이라는 집에서 노는 자리로 옮겼다가 8개월 후 예편되었고, 김진영 전 육참총장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미국 유학길에 떠난다. 뒤이어 [[제1야전군사령부]]에 피바람이 불게 되는데, 하나회 인사인 [[조남풍]] 1군 사령관(육사 18기)이 율곡사업 비리에 연루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1군 장성들 상당수가 하나회 인사였는데 부사령관 서완수(육사 19기)[* 형식상으로는 자진전역. 이미 핵심 요직이던 기무사령관에서 잘렸을 때부터 전역준비를 하고 있었다.], 참모장 유회국(육사 22기), 작전처장 윤영정(육사 24기), 2군단장 김길부(육사 20기), 3군단장 김종배(육사 20기) 등 하나회 회원들이 1군사령부에 포진해 있었고 이들은 순차적으로 교체되었다. 후임은 [[이준(군인)|이준]](육사 19기) 국방부 군수본부장으로, 군단장을 지내지 않은 채 대장으로 진급한 이례적 케이스였다. 그리고 1993년 10월 인사에서 하나회원인 김정헌(육사 18기) 육사 교장[* 다만 이 쪽은 이미 동기와 후배들이 대장으로 진급한지라 대장 진급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후속 중장급 인사에 따라 전역했다는 것이 정설. 7군단장에 이어 육사 교장도 2년간 한 상황이었다. 이후 2004년 6월에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 및 심판|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이 [[헌법재판소]]에서 기각되자 이를 비관하여 모 호텔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택형(육사 19기) 합참 작전기획본부장, 안광렬(육사 20기) 국방부 시설국장, 최기홍(육사 22기) 국방부 정책기획관, 함덕선(육사 20기) 11군단장, 김종배(육사 20기) 3군단장, 최승우(육사 21기) 교육사 참모장이 모두 육군본부 정책연구관으로 발령받았고 이후 다른 한직으로 다시 내쫓긴 최승우 소장을 빼고 전부 전역했다. 6개월 뒤인 [[1994년]] 4월에는 [[김재창]](육사 18기) 연합사 부사령관, 장석린(육사 18기) 국방대학원장, 박광영(육사 19기) 육군교육사령관, 최권영(육사 19기) 777사령관, 김길부(육사 20기) 2군단장, 표순배(육사 21기) 9군단장, 김현수(육사 23기) 22사단장, 길영철(육사 23기) 11사단장이 교체되었다. 모두 하나회원이었고, 이로써 중장급 이상에 하나회원은 한 명도 남지 않게 되었다. 다만 하나회라고 모두 숙청된 것은 아니었다. 권영해가 동생의 [[율곡사업#s-3|율곡사업 비리 문제]]로 경질되자 후임 장관으로 적합한 사람을 물색했는데, 이때 김영삼은 "5.16 또는 12.12에 가담하지 않았어야 하고, 하나회 출신이거나 부정부패자는 안 된다"는 기준을 내세웠지만, 워낙에 하나회가 득실거린 터라 김영삼이 내건 조건을 모두 만족하는 사람이 군에 없었다. 하는 수 없이 하나회 출신이지만 김영삼의 [[경남고등학교]] 라인인 [[국가보훈처장]] [[이병태(군인)|이병태]](육사 17기, 예비역 중장)를 장관으로 임명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하나회 출신이라며 말렸지만 김영삼은 "진짜 하나회라면 왜 중장만 하고 예편했겠나."[* 각종 요직을 거쳐 합참 작전본부장이 되었으나 전두환계인 김진영과 노태우계인 이문석, 비하나회인 김동진, 김연각에게 밀려서 대장을 못 달았다. 이병태는 김영삼의 경남고 후배이기도 하며, 특히 김영삼이 민자당 대표시절 전방 순시때 수행역을 맞아 친분을 쌓았다. 당시 [[이경식]] 전 [[경제부총리]]의 5촌 조카였던 점도 등용에 도움이 되었다는 후문이 있다. 심지어 이병태가 국가보훈처장이 된 것도 운빨이 있었는데, [[문민정부]] 출범과 함께 여러 자리를 인선하는 도중 정부에서 국가보훈처장 임명을 빼먹고 이걸 뒤늦게 알아차리고 옮겨심기 식으로 임명된 것이었다고 한다.]라는 논리로 김영삼은 임명을 강행했다. 이후 이병태가 [[일산신도시]]의 군사전략적 측면 발언[* 유사시 [[아파트]]를 무너뜨려 [[북한군]]의 남침을 막는 장애물로 활용하겠다는 내용이었다. [[https://m.news.naver.com/read.nhn?mode=LSD&sid1=100&oid=001&aid=0003804938|#]]]으로 [[설화]]를 일으키며 둘의 관계는 최악이 되었고,[* 야당에서 이병태 장관 해임 건의안을 제출했으나 때마침 [[김일성]]이 사망해서 묻히고 만다.] 결국 이병태는 4개월 만에 경질된다.[* 김영삼이 이 망언에 화가 단단히 났는지, 박관용의 말에 따르면 이병태는 장관 자리에서 물러날 때까지 김영삼에게 '[[새끼(비속어)|새끼]]' 소리를 들어야 했다고 한다.] 심지어 하나회 중 최초로 목을 날린 전 [[육군참모총장]] [[김진영(군인)|김진영]]마저 [[1996년]] [[여소야대]] 형국이 되자 [[부산광역시|부산]]에 출마시킨다며 [[신한국당]]으로 영입하라는 황당한 지시를 박관용 정치특보[* 김진영 숙청 당시에는 비서실장.]에게 시켰다. 그런데 마침 며칠 전 방영된 [[MBC]]의 12.12 관련 다큐멘터리에서 당시 김진영이 험악하게 나오게 되는데, 이를 들은 김영삼은 김진영이 있다는 한 기도원에 이미 도착해서 기다리던 중이던 박관용에게 "그냥 (영입은 그만두고) 돌아오라"고 하는 해프닝이 있었다. 이 외에도 방산비리로 처벌받은 노태우계인 [[이진삼]] 전 육군참모총장과 하나회 인사였던 [[박세직]] 전 수도방위사령관에게 신한국당 공천을 주기도 했을 정도. 이러한 일화들로 짐작하건대, 김영삼의 목적은 하나회의 완전 척결이 아니라 자신에게 반기를 들 만한 세력의 축출이 목적이었다고 보인다. 하나회 자체를 뿌리 뽑으려던 것은, 하나회라는 말만 들어도 치를 떠는 비영남권 출신 非하나회 군인들이었다. 숙청이 마무리돼 가던 1994년 10월 25일에 3사관학교장인 오형근 소장[* 하나회 21기로 전두환 아래 공수1여단에서 근무 했고, 1사단 연대장을 거친 1-1인맥.]이 1군 부사령관(사실상 전역대기 명령)으로 발령받자 "일부 정치권도 군의 자존심을 짓밟고 사기를 저하시키며 분열을 조장하였다."이임사를 하였다. 이 발언이 언론에 보도되었고 이후 본인은 부인하였는데, 하나회의 마지막 저항으로 간주되었다. 이렇게 김영삼의 초기 전격적인 숙청과 93년 10월 정기 인사, 연말 전격 인사, 94년 4월과 10월 정기 인사까지 계속해서 하나회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반하나회로 바뀐 군부에서는 하나회 출신 장성을 하나도 남김없이 전역시키길 원했지만, 이병태 장관을 거쳐 청와대에서는 중장, 대장까지만 쓸어 버리는 것으로 결론 냈다. 대장은 김재창 한미연합사령관을 마지막으로 모두 전역, 중장급은 김길부, 김종배, 표순배까지 모두 전역하였다. 이 기간 중 하나회 장성 진급자는 한명도 없으며 대령 진급자는 3명뿐이었다. 그래도 22기 이하 36기까지 하나회원 약 100여 명이 군부에 남아 있었다. 명령에 의한 강제전역은 중장과 대장만 가능하고, 소장 이하는 계급 정년까지 임기를 보장해주어야 하기 때문에 한직에 처박아두는 것이 한계였다. 이 시점에 22기 2명(육본 정책위원 유회국 소장, 최기홍 소장), 23기 4명(김영철 국방대학원 부원장, 박영일 교육사령부 부사령관, 손수태 3사관학교장, 정정택 합참군수 차장)이 있고 24기는 전원 준장 계급 정년에 걸려 전역. 25~26기는 준장으로 한직인 동원사단장. 27~31기는 대령에서 승진이 안 되고 있으며, 32~36기는 중령이었다. 반면 오랜 세월 모진 핍박에 시달려 오던 非하나회 장성들은 '가만히 있어도 사단장, 군단장까지는 자동'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승진에 승진을 거듭했다. 대령~중령급에는 정치장교인 선배 기수들과 달리 육사시절 엘리트였던 군인들이 많이 포섭되어 있었는데, 승진철만 되면 '하나회는 안된다'라는 온갖 압력에 의해 계속 배제되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다시 승진 대열에 합류할 수 있었지만, 과거와 같은 특권은 더이상 누릴 수 없었다. 하나회 출신 영관급 장교들은 이전과 반대로 하나회 출신이라는 이유로 진급에서 지속적으로 불이익을 받으며, 차례차례 밀려나게 되었다. 대령들은 요직에서 잘려 행정부사단장으로 좌천, 중령들은 전부 부연대장 같은 한직으로 내쳐진 것이다. 심지어 전방지역 대대장을 마치고 참모로 근무하던 중령을 후방 지역으로 보내 향토, 동원사단이나 경비연대 대대장에 임명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때문에 26기까지는 어찌저찌 진급을 했지만[* 특히 1차 진급자까지는 진급 막차를 잘 타서 준장을 달았지만, 1차 진급에 실패한 인원들은 3명만 구제되고, 나머지는 모두 대령에서 군 생활을 끝냈다.] 27, 28기는 모두 대령에서 군 생활이 끝났으며, 29, 30, 31기는 각각 1, 2, 3명이 준장으로 진급했고 32, 33기는 그나마 대령까지는 갔지만 34기부터는 2명 빼면 중령 예편, 35기는 4명 빼고 중령 예편했고[* 이 중에서 [[류제승]] 혼자 살아남아 중장까지 진급하여 8군단장과 교육사령관을 하고 전역한다.] 36기는 10명 중 5명이 대령으로 진급했다.[* 이 중에서 [[김현집]]과 [[최익봉]]이 살아남아 중장으로 1차 진급했으나 최익봉은 성추문으로 잘렸고, 김현집은 끝까지 살아남아 [[3군사령관]]과 [[한미연합사 부사령관]]까지 하고 대장으로 전역했다. 김현집은 20년 만에 하나회가 배출한 3군 사령관이었다.] 한 마디로 26기 이후로는 오히려 진급에 페널티를 크게 받아 오히려 올라가기가 더 어려워졌다는 후문.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