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하나회 (문단 편집) === 7.6. 거사 사건 === 그러다 전두환, 노태우(당시 육사 총동창회 3대 회장)는 간이 배 밖으로 나와 '''1963년 7월 6일 거사를 모의'''한다. 명분은 [[4대 의혹 사건]]으로 인한 부패 척결과 육사 출신 장교의 진급의 불공정이다. 그래서 거사 날짜를 7월 6일로 잡고 자신들이 실무를 담당하고 있는 중정, 방첩부대와 함께 공화당과 자민당의 합작을 반대하는 최고위원 및 공화당 요인 40여 명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이를 위해 손영길, 노태우는 중정부장 [[김재춘]](육사 5기)을 찾아가 "부장님만 묵인하면 그런 부패한 인물(김종필 계열을 뜻함)들을 전부 퇴진 시키겠습니다."라고 의향을 비추기도 하였다. 그리고 7월 6일 아침 경찰이 먼저 알게 되어 비상이 걸리고, 이를 보고받은 김재춘이 즉시 박정희에게 알렸다. 이에 쿠데타 음모는 분쇄되었고 이들 육사 11기생들은 구속이 거론되었지만 결국 선처로 끝났고[* 이때 [[손영길]]이 구명하였으나 후에 [[윤필용]] 사건때 배신한다. 또한 이때 정승화와 [[https://youtu.be/rFY6I4jynos?t=260|악연이 생긴다.]]] 김재춘은 중정 부장에서 물러나고 후임으로 [[김형욱]](육사 8기)이 임명되었다. 이것이 1963년 ''''7.6. 거사 모의'''' 사건으로 당시에는 알려지지 않고 조사로만 끝났다. 거사 모의라는 어마어마한 사건은 5.16. 자체가 군을 동원한 육사 5기와 계획을 짠 8기라는 두가지 세력에 의해 이루어 졌다는 것에서 기인한다. 쿠데타 후 서로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김재춘등 육사 5기와 JP등 육사 8기는 계속 충돌하였는데 초대 중정부장에 이어 제3대 중정부장이 된[* 중간에 [[김용순(1926)|김용순]]이라고 45일 한 2대 부장이 있다. 육사 5기와 8기의 갈등 사이에 새우등 터짐. 정확히는 차지철의 GD팀(중정 6국 소속)이 자기들끼리 총 꺼내고 싸우는 와중에, 무려 박정희 전 의장 공관을 포위하는 일까지 있었는데(박정희는 지방에 내려가 있었음) 이 사건으로 책임지고 김용순만 물러 났다. 물론 김재춘이 자기가 중정 부장 하려고 애꾿은 김용순에게만 책임을 지운 것이다. 실제로는 차지철 잘못인데도 불구하고.] 김재춘은 중정내 차장, 과장, 지부장을 하던 육사 8기 31명을 잘라 버렸고, 그래도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육사 11기와 손을 잡은 것이다. 마침 전두환 소령과 노태우 대위 등은 쿠데타로 인해 육사 8기인 JP가 중정부장 등 요직은 다해먹는 사이에 나이[* [[김종필]] 1926년생, 김재춘 1927년생, 박종규 1930년생, [[전두환]] 1931년생, [[노태우]] 1932년생, 권익현 1934년생, 차지철 1934년생.]로 보나 기수로 보나 별 차이가 안나며, 게다가 4년제 정규 교육을 받은 자기들은 중정에서 말단으로 있는 상황에 열받은 것이다. 즉, 진급에 불만이 매우 강했다. 물론 이들 뒤에는 육사 8기와 JP를 견제 하고 싶은 박정희가 있긴 했는데, 어디까지나 견제 정도였지 친위 쿠데타까지 원한건 아니었다. 어쨌든 전두환과 노태우는 쿠데타는 쿠데타인데 박정희와 김재춘이 견제하던 JP와 육사 8기 40명만 목표로 하는 희한한 쿠데타였다. 이때 사건을 조사한 것이 [[정승화]] 방첩대장이라는 것이 역사의 아이러니. 정승화는 이때 전두환, 노태우를 중심으로 처벌하려 하였으나 김재춘이 직을 내놓고 용서해달라고 했고, 박정희도 자신의 충복들이라 그냥저냥 흐지부지 끝나버렸다. 무엇보다도 처벌을 하려면 쿠데타가 일어난지 2년밖에 안되었는데 또 다시 쿠데타가 발생할 뻔 했다는 사실을 알려야 했기 때문에 이것이 정권에 부담이 된 것이다. 그리고 부하들끼리 상호 견제가 정치 스타일인 박정희의 뜻대로 김재춘 중정 부장의 후임은 육사 8기 강경파인 김형욱이 되었다. 이것이 하나회의 첫번째 위기였다. 하나회의 싹을 제거할 절호의 기회였지만 그냥 이렇게 어영부영 지나가버린 것이다. 노태우 회고록에 의하면 4대 의혹 사건으로 인한 국민적 불만을 해소하기 위한 충정 발언을 바친 것뿐이라며 간단히 지나간다. 2번째 위기는 10년 후 터지는데 바로 윤필용 사건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