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평양행궁 (문단 편집) == 상세 == [[조선시대]]와 [[고려시대]]에는 각 지방마다 역원과 객사를 세웠는데, 그 중에서 [[평양부]]에 있는 객사의 이름을 대동관이라 했다. [[고려시대]]에는 역원으로 운영되었으며 고려 후기 [[홍건적의 난]] 때 불탄 뒤 다시 지었다. 이후 [[조선시대]]에는 공식적으로 객사를 만들어 세웠다. 대동관은 [[의주행궁|의주객사 용만관]]과 성천객사 [[강선루]], [[안주시|안주객사 안흥관]]과 더불어 '''평안도 4대 객사 중 하나로 꼽혔다.''' 특히 [[명나라]]와 [[청나라]]의 관리들이 오가는 길목에 있어 평양을 지날 시 이곳에서 묵었기 때문에 객사의 크기도 상당히 컸다. [[임진왜란]] 때 [[선조(조선)|선조]]가 의주로 피난가던 당시에 여기서 머물기도 했다. 기록에 따르면, 대동관 경내는 꽤 화려했던 듯 하다. 먼저 현재 남아있는 일반 객사에서는 보기 힘든 [[정원]]이 존재했다. 또한 객사 크기는, 정청은 정면 4칸에 측면 4칸, 양쪽 익사의 크기는 정면 6칸에 측면 4칸이었다. 조선시대 건물치고는 굉장한 규모이며, 당시 그 정도 크기를 가지고 있던 객사는 전국에 손에 꼽을 정도였다.[* 당시 전라도에서는 전주객사 풍패지관, 나주객사 금성관과 같은 [[객사]]가 그나마 비슷했고, 경상도에서는 [[동래]]객사와 상주객사가 견줄 만 했다. 강원도에서는 강릉객사와 춘천객사가 가장 컸고, 충청도는 청주객사와 공주객사가 규모가 컸다고 전해진다. [[함경도]]의 경우는 함흥객사인 풍패관과 길주객사, 경성객사가 가장 컸다.] 그리고 왕권을 상징하는 위패와 영정을 모셨으니 대동관은 평양에서 규모 및 위상이 제일가는 건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평양객사의 경우 조선 초기, 중기에는 태조 이성계를 비롯한 다른 왕들의 어진을 모시는 어용전이 같이 위치했다.] 저렇게 대동관의 규모가 크고 화려했던 이유는 평양이 가지는 상징성 때문인 듯 하다. 평양은 역사적인 고도였고, 관서 지방의 가장 큰 도시였기 때문에 저런 큰 규모의 객사를 세운 것으로 보인다. 조선 중기까지는 보존되었으나 [[임진왜란]] 이후에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상술했듯 선조가 피난가다가 머물기도 했단 것을 보아 불탄 것은 그 이후인 듯 하다. 전쟁이 끝나고 다시 재건했다. 그후 1950년 [[6.25 전쟁]] 때 폭격을 맞아 완파되어 사라졌다. 현재 대동관 자리에는 만수대 분수공원과 평양 학생소년궁전이 들어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