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팔랑크스 (문단 편집) ==== 전술적인 사용례와 약점 ==== 팔랑크스는 근본적으로 매우 수세적인 대형이며, 팔랑크스 하나만 믿는다면 적을 막아낼 수는 있을지언정 적에게 큰 피해를 입히기도 어려웠다.[* 팔랑크스의 정면이 아무리 가공할 전투력을 지녔다고 한들, 물러나는 적을 추격하여 격멸할 순 없었다.] 따라서 팔랑크스로 적을 격멸하려면 적이 반드시 뚫고자 하는 길목에서 버티거나[* 물론 이 경우에도, 적이 큰 희생을 감수하고 팔랑크스에 공세를 취해야 했다.] [[망치와 모루]] 전술 등등등을 적절히 사용하여 어떻게든 팔랑크스 정면을 적에게 붙여야 했다. 팔랑크스는 분명 가공할 정면 방어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적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만전의 태세를 갖춘 팔랑크스에 {{{-2 (자신들도 같은 팔랑크스가 아닌 이상)}}} 정면으로 달려들지는 않았으며, 무지성 순수 팔랑크스만 고집할 경우 당장 [[병거]] 부대가 팔랑크스 주변을 돌기만 해도 인간과녁으로 전락할 수 있었다.[* 방패로 버틸 수야 있지만, 적을 추격하기엔 너무나 느린 팔랑크스 특성상 병거 부대가 원하는 전장과 타이밍에서 싸우는 걸 강요당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팔랑크스가 불리하다.] [[알렉산드로스 3세]]가 명장인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페르시아 정복은 '우월한' 헬라스군이 '저열한' 근동 군대보다 강해서 성공한 게 아니라, 알렉산드로스가 팔랑크스와 기병을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불세출의 명장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팔랑크스가 근동 군대를 다 때려잡는 무적의 군대라면, 알렉산드로스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이오니아의 헬라스인들이 근동을 정복했을 것이다. [[레기오]]와의 비교에서 보듯, 팔랑크스는 이상적인 조건에서는 매우 강하지만, 그 이상적인 조건을 뽑아내기 위한 지휘관의 세심한 컨트롤이 비교적 많이 요구되는 군대였다. 전통 팔랑크스의 공격법은 방패 뒤에서 창을 짧게잡고 찍는 원시적인 수준이었지만, 전진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수준의 파괴력을 가졌다. 반대로 기동성이 매우 떨어지기 때문에 정교한 전술을 발휘할 여지가 적었으며, 심지어는 장군들도 대열에 끼어서 그냥 묵묵히 전진만 했다고 한다. 팔랑크스에선 대대나 연대는 존재하지 않고 병사나 장교 할 것 없이 모두 한덩어리로 직사각형의 대열을 이루는 것이었다. 물론 편제가 존재하기는 했다. 명목상으로만. 20세기 중반까지 소대 단위 전술은 쓰일 여지가 거의 없었음에도 소대 편성이 있었던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단, 스파르타는 예외로 종합각개 훈련까지 했다. 물론, 그 그리스 최고라는 스파르타 귀족 팔랑크스조차 아테네의 펠타스트 등에게 측면을 찔려서 격파당하고 한동안 육상전을 회피한 것을 보면, 스파르타식의 장점은 펠레폰네소스 전쟁기에는 이미 무적이 아니게 된다.[* 스파르타의 강함은 애초에 다른 도시국가들을 노예로 복속하기 위한 잔혹한 살인병기로서의 강함이었기에 산악 수비전이나 소수의 산병전투에선 꾸준히 강했지만, 팔랑크스는 특성상 대규모 전쟁이 되면 단순히 질량 싸움이 된다. 페르시아 전쟁 이전까진 의외로 대규모 전투가 없었기에 스파르타의 평판이 매우 높았지만, 이후로는 추락한다.] 이는 애초에 팔랑크스라는 것이 개개인의 힘이 아닌, 전쟁을 잘 배우지 못한 그리스 시민들의 단결력과 질량을 이용하는 전법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깨를 나란히 하며 서로를 지지해주는 진형이 주력이었던 덕분에 '''그리스는 민주정이 발달할 수 있었다'''. 심지어 아테네에 비교해서도 악독할 정도의 이웃도시들을 노예로 삼는 노예제도와 귀족제를 병행한 스파르타에서도 시민의 대표들의 지위가 왕에 준할 정도로 높았다. 그리스에서 동성애가 장려된 것도 이런 땀내나는 진형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는 말도 있을 정도.[* 물론 이는 성인-청소년 관계에 한정, 그나마도 싫어하는 그리스인들이 있었으며 성인간의 동성애는 법적 처벌 대상만 아니었지 엄청난 규탄을 받았다.] 팔랑크스 대열은 빨리 움직이면 개인의 차이에 따라서 진열이 무너지므로 천천히 전진해야 했다. 그래도 빨리 걷는 속도 정도는 낼 수 있었지만 어쨌거나 '''팔랑크스의 기동성이 매우 떨어진 것은 부정할 수 없었고, 이것은 이 전술의 최대 약점이었다'''. 이 때문에 팔랑크스는 측면과 후방에 대한 공격, 특히 무기를 들되, 방패를 들지 않은 오른쪽에서 기병이나 경보병이 투사무기를 이용해 공격해오면 상당히 취약했다. 기원전 391년에 벌어진 레카이움 전투(Battle of Lechaeum)에서는 아테네군 경보병대가 스파르타군 왼편에 매복해있다가, 스파르타군 중보병대가 보급품을 호송하고 방향을 바꿔 돌아올 때 오른쪽이 노출되자 투사 공격만으로 집요하게 공격하여 600명 중에 250명을 사살해내기도 했다. 측면의 약점만 잘 찌를 수 있다면, 그리스 최강이라는 스파르타 완전시민 최정예 팔랑크스도 얄짤없이 평민들의 투사무기와 경보병한테 죽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비어있는 오른쪽을 옆 병사의 방패가 보호하고 있어도, 본능적으로 오른쪽을 보호하기 위해 옆 병사의 방패쪽에 자신의 몸을 더욱 밀착시키다보니, 그 결과 직선으로 전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비스듬히 오른쪽으로 전진하는 모양새를 띠었다. 그래서 전통적인 팔랑크스에서는 '오른쪽으로 도망치는' 현상 때문에 부대의 최우익에는 최정예 병사를 배치했다. 슬금슬금 도망치다 무너지면 안 되기 때문이기도 하고, 아군 우익이 상대하는 적 좌익은 점차로 '도망가고 있는' 적이므로 적 좌익을 먼저 무너뜨리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테베의 명장 에파미논다스는 '''팔랑크스의 약체 병사들이 모인 좌익을 역으로 비정상적으로 강화해 적 우익(최정예)을 격파하는''' [[사선대형]]을 만들었다. 이 사선대열은 오히려 적의 정예부대가 있는 쪽에 대규모의 질량을 집중시켜서 정예부대를 먼저 짓밟는 전략이었다. 전통적으로 그리스 최강이었던 스파르타의 완전시민 팔랑크스는 사선대열을 통한 대규모의 질량 집중 때문에, 싸움 실력을 떠나서 아주 일방적인 질량 차이로 최정예 완전시민들이 짓밟혀서 무너졌다. 이로써, 팔랑크스는 개개인의 싸움실력보다는 대규모 질량의 활용법이 중요한 전술이라는 것이 입증되고, 전통적인 최강의 팔랑크스였다는 스파르타의 전설은 완전히 무너지게 된다. 팔랑크스는 산악지형이 많은 그리스에서는 측면이 약하다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유용했다. 산악지형은 길목이 좁으므로 팔랑크스와 같은 정면대열을 피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또한, 팔랑크스를 이루는 병사들은 평시에는 경제를 담당하는 시민병이라는 특성 때문에, 공격자든 패배자든 너무나 튼튼한 방어력 덕분에 사상자가 많이 나오지 않는 팔랑크스 전술은 고대 그리스의 경제 상황에서도 가장 유용했다. 다만 기동성의 약점은 선명한지라, 기병이나 경보병 등이 달라붙으면 녹여버릴 수 있는게 팔랑크스의 장점이라면, 기병-경보병이 싸워주지 않고 그냥 우회해서 가버리면 멀뚱멀뚱 보고만 있어야한다는 전략적 약점을 가진 것이 팔랑크스였다. 도시나 마을 등을 지키라고 있는게 군대인데, 그 도시와 마을을 털어버린 다음 가버리면 중보병들은 뒤뚱거리며 뒷북을 치던가, 아니면 대형 해제하고 달려오다가 죽던가... 전술적으로도 군사전략이 발달하고 경보병과 기병들이 발달하자, 팔랑크스는 점점 약점을 노출했다. 수백년 후의 로마 [[레기오]]와의 대결에서 노출한 약점이 대표적이지만, 심지어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그리스 인들의 내전에서도 이미 약점이 보였다. 전쟁에선 스파르타가 이겼지만, '''스파르타가 자랑했던 팔랑크스는 아테네의 경보병과 테베의 사선대열이라는 새로운 전술 앞에선 오히려 대패를 연거푸 겪었기 때문이다'''. 결국, 스파르타의 승리 역시도, 육상전을 배제하고 페르시아의 도움&해양전에서 승리했던 것 뿐으로, 전통적인 팔랑크스의 강함과는 거리가 있는 전쟁이었다.[* 심지어 이 전쟁 시기의 스파르타의 최고의 전쟁영웅으로 스파르타를 구원했다는 평가를 듣는 브라시다스는 전형적인 스파르타 방식의 용장이 아니라 외교 전략에 능숙한 지장, 덕장, 외교관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이런 인물이 전쟁초기에 이미 망조가 들뻔 했던 스파르타의 문제점을 해결한 구세주였다는 점에서, 팔랑크스와 스파르타의 마초적인 전설은 이 전쟁에서 이미 시대에 뒤처진 전술에 불과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여담으로, [[사선대형]]을 만들어낸 테베에는 신전에 죽을 때까지 복무하기로 맹세해 [[신성부대]]라고 불리는 정예 보병대가 있었는데, '''150쌍의 동성커플 3백 명으로 편성했다'''고 한다. 굳이 동성커플을 쓴 이유는 애인과 함께 전장에 나오면 '''자신의 애인을 지키기 위해 더 잘 싸울 것이다'''고 생각했기 때문.[* 이는 의외로 효과적인 전술인데 단순 우정에 해당되는 전우애도 사기를 끌어올리는 수단이 될 수 있는데 사랑의 힘이라면 어떻겠는가? 거기다 단순 동성애 관계에만 유지한 게 아닌 스승-사제 관계도 있었고 이들의 생활비를 국비로 지원해 소속 병사들이 군사 훈련과 체력 훈련에만 몰두할 수 있게 하는 등 전투력 유지를 위한 다양한 수단을 활용했기에 신성부대는 단순한 동성애자 부대가 아닌 일종의 상비군이라 보는 것이 좋다.] 이 부대는 마케도니아와 맞붙은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괴멸되었으며 전사 254명 부상 46명이라는 구체적인 수치도 언급되었다.[* 1890년에 있었던 발굴 조사에서 정말로 7열로 눕혀진 254명의 주검이 발견되어 신성부대의 존재가 고고학적으로 확실히 증명 되었다.] 위의 테베는 사선대형은 전통적인 최정예 스파르타 팔랑크스의 완전시민부대를 완전히 짓밟아버리게 되는데, 이는 팔랑크스라는 것 자체가 개개인의 전사로서의 능력보다는 큰 규모의 질량을 어떻게 활용하느냐 하는 협동심, 대규모 질량의 분배가 가장 중요하다는 점을 증명하는 상징적인 전투이기도 했다. 그리고, 더 큰 싸움에서의 정면에 대한 질량과 저지력 만을 위해서 발달한 마케도니아식 팔랑크스가 탄생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