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테르툴리아누스 (문단 편집) == 생애 == 원래는 [[카르타고]]의 비(非) [[그리스도교]] 가정에 태어나 자랐고, 법률을 공부하여 [[변호사]](혹은 법학자)가 되었다.[* [[로마법 대전]]의 '학설휘찬' 중에도 테르툴리아누스라는 법률가의 저작이 있는데, 그가 신학자 테르툴리아누스와 동일인인지 논란이 있다.] 그러던 중 신앙을 지키고자 [[순교]]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보고 감명받아 그리스도교에 입교하였다. [[그리스도교]] 신자가 된 뒤에도 테르툴리아누스는 끊임없이 [[신학]] 공부를 멈추지 않았다. 그러던 중 각종 [[이단]]들의 등장으로 그리스도교가 흔들린다고 판단, 기존의 정통이라고 간주된 교리를 정리, 체계화하여 이단들에 반박하고자 했다. 그는 특히 [[영지주의]]와 [[단일신론]], 특히 [[마르키온]]의 [[마르키온파]]를 공개적으로 논박하고 단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시기적으로 테르툴리아누스와 마르키온은 다른 시대를 살았기에 둘이 직접 만난 적은 없었다.] 이 시기에 <그리스도의 육신론> 등 여러 서적을 저술했는데, 본인이 의도한 바는 아니었으나 이 과정에서 라틴어 신학용어를 정립하는 기초를 놓았다. 법학 공부를 하여 법조인이 된 이력 덕분인지, 테르툴리아누스는 저술에서 논리를 정연하게 전개하고 [[라틴어]] 문장을 고급스럽고 명료하게 사용했다는 평을 받는다. 당시 [[그리스도교]] 신학이 정립되는 과정에서 [[그리스]]/[[로마]] 철학이 서서히 유입되었다. 이는 신학의 정교화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기도 했지만, 반대로 [[스토아 학파]] 등의 윤리규범이 일부 지역에서 그리스도교의 교리보다 오히려 더 영향력이 강해지는 등 부작용도 일으켰다. 이런 현상이 발생한 이유는 카르타고 등 [[아프리카]] 학파의 활동지가 신앙의 발원지였던 [[이스라엘]]과 너무 멀리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당시는 책이나 문서를 대량생산하는 방법이 당연히 없었고, 사람이 일일이 손으로 필사해서 전달해야만 했다. 당연히 사람 손을 거쳤으니 필사를 거듭할수록 정확도를 보장할 수 없는 데다, 책의 분량이 많으면 많을수록 필사과정에서 오류가 생기기도 더욱 쉽고, 필사하는 데에도 시간이 더 걸렸다. 그러니 [[로마 제국]]의 대도시이자 [[이스라엘]]과 비교적 가까운 [[알렉산드리아(이집트)|알렉산드리아]]에 비하면, 아프리카는 복음을 비롯한 [[성경]]과 당시 교부, 신학자들의 문헌을 확보하는 데에도 어려움이 많았다. 따라서 다양한 의견이 나오기 마련인 철학에 비해 신학의 영향력이 밀릴 수밖에 없으니, 이에 대응하여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고 실천함을 극히 중요시하게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나중에 안티오키아 학파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신앙을 변질시키고 신학을 말싸움으로 격하시키는 철학과 철학자를 격렬하게 ~~[[키배]]~~ 비판하며 철학이 신앙의 위에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맨 상단의 인용문이 바로 대표적인 발언들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