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탈아입구 (문단 편집) == 상세 == [[후쿠자와 유키치]]가 주장한 말로 많이 알려졌지만, 사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입구(入歐)' 즉 '[[유럽]]에 들어가야 한다'고는 한 번도 주장한 적이 없다. 오히려 후쿠자와 유키치는 [[아시아]]도 아니고, 유럽도 아닌, [[일본]] 그 자체로써 발전하고 영향력을 발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탈아입구(脫亞入歐)라는 용어를 처음 쓴 건 후쿠자와의 제자들 중 하나인 스즈키 켄타로(鈴木券太郎)라는 언론인이라고 한다.[* 마루야마 마사오『福沢諭吉の哲学 他六篇』松沢弘陽編 岩波書店〈岩波文庫 青N104-1〉2001년 6월] 스즈키가 1887년 4월 14일 [[오카야마현]]의 지역신문인 '산요신보'(山陽新報)[* 現 산요 신문(山陽新聞)의 전신이다.]에 '구화주의 없인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歐化主義ヲ貫カザル可ラズ)란 사설을 쓰면서 본문 도중에 집어넣은 것이 최초 용례이다. 일본이 [[메이지 시대]] 초기에 구화주의(유럽화) 경향이 있던 것은 사실이나 일본 민중 모두가 여기에 동의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급진적인 '위로부터의 서구화' 정책은 반대파나 민중들의 반발에 자주 부딪혔다.[* 다만 한국, 중국처럼 민중들의 절대 다수가 서구 문물 수용 자체를 반대하진 않았으며 이들 역시 귀족만이 아닌 민중들이 주도하는 '아래로부터의 서구화'도 필요하다고 주장하긴 했다. [[신센구미]]나 아이즈 백호대조차 서양식 복장과 무기를 받아들였음을 떠올려 보자.] 원래 [[메이지 유신]]의 명분은 [[천황]]을 드높이고, 외세(오랑캐, 서구)를 배격한다는 [[존황양이]](尊皇攘夷)[* 존왕양이(尊王攘夷)라고도 한다.]였다. 이를 위해 일본의 정신(혹은 고유한 것)을 바탕으로 서양의 기술을 활용한다는 화혼양재(和魂洋才)[* 한국의 동도서기, 중국의 중체서용과 맥락이 유사하다.]를 기본 골자로 하여 발전을 도모한 것이다. 1920년대 이후 일본 제국의 국가적인 사상에서 구화주의는 퇴출되고 [[아시아주의]]와 [[대동아공영권]]으로 바뀌었다. 속내가 어떻든 둘 다 일본이 [[아시아]]에 속한다는 것을 강하게 주장하면서 아시아를 부흥시키자는 게 명분이었다. 애초에 '구화주의'라면 모를까, 탈아론은 1885년 이후부터 패전 때까지 일본에 크게 알려진 적이 없었고, 다른 문헌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패전 이후인 1950년대 이후부터라고 한다.[* 히라야마 요우 (2004). Fukuzawa Yukichi no shinjitsu (福沢諭吉の真実). Bungei Shunju. pp. 193–239.]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