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칸다하르 (문단 편집) === [[아프가니스탄]]의 중심지 === [[파일:미르와스 칸.jpg|width=700]] 시가지 서쪽 외곽에 위치한 호타키 조의 창건자 미르와스 칸의 영묘. [[파일:아흐마드샤.png|width=700]] 도심 한복판에 위치한 두라니 조의 창건자 아흐마드 샤의 영묘.[* 두 무덤이 거의 비슷하게 생겨 후자의 경우 굴뚝에 구멍이 있는 것 정도로만 구별이 가능하다] 도시는 1709년에 파슈툰 길자이족의 봉기와 함께 [[호타키 왕조]]의 수도가 되었으나 [[칸다하르 공성전|1738년에 나디르 샤에게 함락되어]] 구도심이 크게 파괴되었다. 나디르 샤는 자신이 파괴한 구도심 옆에 자신의 이름을 딴 나데라바드라는 신 시가지를 조성하였다. 1747년에 나디르 샤가 죽은 후 그의 부관이던 [[아흐마드 샤 두라니]]가 현 아프가니스탄의 전신인 [[두라니 왕조]]를 개창, 칸다하르를 수도로 삼았다. 1761년 3월, 아흐마드 샤는 현재의 위치에 도시를 재건하였다. 비록 1776년에 수도는 카불로 옮겨졌지만, 칸다하르는 여전히 아프간 지역의 중요한 도시였다. 19세기 초엽 두라니 조가 내전에 돌입하자 칸다하르에서는 1818년 [[바라크자이 왕조]]의 인척인 셰르 딜리 칸이 자립하여 칸다하르 공국을 세웠다. 1823년 세르 딜리 칸이 사망하자 그의 네 동생들이 내전을 벌이며 칸다하르는 성벽이 방치되는 등 쇠락하였다. 1826년에는 [[시크 왕국]]에 대한 지하드를 주장하던 인도 무슬림 학자 세이드 아흐마드 샤히드가 칸다하르에 당도하여 [[무자헤딘]]을 모집하자 4백여가 호응하였고, 아흐마드는 그렇게 모인 병력과 남하하여 [[페샤와르]]를 점령하는 쾌거를 올리기도 했으나 [[칼리파]]를 칭하는 등의 행보로 무슬림 기득권층에서도 반감을 산 끝에 결국 1831년 [[카슈미르]]에서 시크 군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그와 함께 1만의 무자헤딘과 전멸하였다.[* 시크측 사상자는 5천여였다] 1839년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영국군에게 손쉽게 점령되었다. 다만 [[케르만]]으로 추방되었던 코한 딜리 칸이 카불 봉기로 영국군이 철수한 1842년에 칸다하르로 돌아와 재집권하였고, 혼란을 틈타 [[시스탄]]과 [[발루치스탄]] 일대로 세력을 확장하였다. 헤라트 에미르 국과 대립하던 코한 딜리 칸이 1855년 사망하자 그의 동생과 아들들이 내전을 벌였고, 그 틈에 [[바라크자이 왕조]]의 도스트 모하마드 칸이 원정하여 일대를 병합하였다. 바라크자이 왕조의 아프가니스탄 에미르국 하에서 칸다하르는 간만에 평화와 안정을 누릴 수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