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친일파 (문단 편집) == 주의할 점 == 그냥 [[일본 문화]]를 좋아하면서 우리 문화도 아끼는 사람들이 욕먹는 일은 거의 없다. 대부분 극우 컨텐츠를 옹호하거나 우리 것을 망가트리며 비웃는 식으로 윤리적 공분을 불러와서 비난을 받을 뿐이다. 실제로 [[초밥]] 좋아한다고 욕한다면 도리어 욕한 사람이 욕 먹는게 현실이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문화에 대한 선호와 일본의 [[일본의 전쟁범죄|죄악]]에 대한 맹목적 묵인은 구분하고 있다 말할 수 있겠다.[* 덮어놓고 [[일빠]]라 욕하는 악플러들이 있긴 하나, 그런 경우는 단순히 친일 문제로 판단할 게 아닌 [[취존]]의 영역으로 넘어간다. 문제는 [[문재인 정부]] 시기를 기점으로 여야 각 지지층이 상대 진영을 공격하기 위해 [[근첩몰이]], 친일몰이, 친일몰이몰이를 주 패턴 삼아 단순 글 및 댓글과 공론화 글을 하루종일 도배하는 등 인터넷 문화를 저급하게 추락시켰다는 것이다. 심지어 친일몰이 쪽은 [[이명박근혜]] 시기 [[민주당계 정당]] 팬덤부터 심했지만 당시 국민 대다수가 이명박과 박근혜를 비토하는 분위기라 묻혔으며 양쪽을 전부 비판하는 국민은 극소수였다. 저들은 사학자들에게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역사를 바르게 정리해달라고 말하긴커녕 됐으니까 우리들한테 유리한 사실만 대충 정리해서 상대 진영을 박살내버리라고 압박하여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중우정치]]에 일조하고 있다. 지금이야 상대방을 근첩, 친일, 친일몰이로 모는 것이 유행이겠지만 미래에 철 지난 [[뇌절]]로 평가 받으면 본인들한테 부메랑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애초에 우리 나라 사람들이 어릴 때 보고 자란 문화 매체는 자유로운 문화 교류가 허용되기 이전까지도 제대로 번안이 안 된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것에 영향을 받아서 선호도가 높아진 것도 있다. 어떻게 보면 아직까지도 지나치게 영향력이 남아있는 것같이 보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만 이야기 할 수는 없는 문제다. [[한국]]에서는 대부분 '''[[친일반민족행위자]]'''의 뜻으로 쓰이고 [[일본 문화]]를 좋아하는 사람의 의미로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친한파]]의 단어 쓰임과 완전히 반대된다. 일본 문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친일파보다 [[오타쿠]]로 불린다. 그냥 [[일본 문화]]를 좋아하는 사람이어도 한일관계가 악화된 시기에는 왠지 모르게 친일 반민족 행위자로 오해받는 일이 다반사. 상대국과 사이가 안 좋은 시기에 눈치 없이 상대국 문화를 대놓고 즐기면 적대적으로 보이는게 사실이다. 실제 사례로 미국 뉴욕의 '러시안 티 룸'은 100년 가까이 사교의 장으로 손님들을 받았고 현재 소유주가 러시아인도 아니지만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반러감정이 확산되어 이용이 매우 감소하였다. [[https://n.news.naver.com/article/020/0003414797|#]] 사실 이 때문에 [[친미파]]나 [[친러파]] 같은 친◯파도 어감이 안 좋아졌다. 그런데 반대로 [[친한파]]는 어감이 더 좋아졌다. 보통 지일파(知日派) 등 지◯파로 대체하는 듯하다. 그런데 지◯파와 친◯파는 사실 다른 의미로, 후자와는 달리 전자는 대상국에 '''관심을 갖고 잘 알고 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지한파는 한국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감정적이거나 무리한 주장을 하지 않을 뿐, 한국에 반드시 우호적이라거나 적대적일 이유는 없다. 예컨대 일제강점기에 극일(克日)을 외치며 일본으로 유학했던 독립운동가들은 지일파이지만 친일파는 당연히 아니며, 반대로 조선을 반드시 정복해야겠다는 의지를 갖고 조선에 대해 공부했던 옛 일본의 [[정한론]]자들은 지한파이지만 친한파는 아니다. 실제로 [[산케이신문]]의 [[구로다 가쓰히로]] 편집장은 지한파를 자칭하면서도 '''"한국은 일본에 재정복 당해야 잘사는 나라가 된다"''' 따위의 혐한에 가까운 망언을 내뱉기도 했다. 인터넷 커뮤니티(디시인사이드 등)에 친일 세력이 광복 후 '''[[한민당]]이라는 __전라도 대지주가 이끄는 보수정당__으로 거듭났다'''는 주장이 있으나[*예시 [[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immovables/4585536|#]][[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stock_new/5338499|#]][[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neostock&no=2214491|#]][[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city&no=2000349|#]][[https://m.dcinside.com/board/view/?id=mnet_k/85343|#]][[https://m.dcinside.com/board/view/?id=medicalscience/391193|#]][[https://m.dcinside.com/board/view/?id=drama_new2/12610216|#]]] [[전라도]] 혐오감정에 기반한 썰일 뿐 사실이 아니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운영하는 우리역사넷의 관련 설명을 보자. >미군의 상륙을 앞두고 동년 9월 6일 건준이 朝鮮人民共和國(이하 인공)으로 개편되자, 송진우는 9월 7일 ‘國民大會準備會’를 결성하였다.≪동아일보≫사옥에서 결성된 국민대회준비회에는 송진우(위원장), 김성수, 徐相日(부위원장), 元世勳(부위원장), 金俊淵(총무부), 張澤相(외교부), 薛義植(정보부), 尹致暎(경호부) 등이 참여하였다. 국민대회준비회는 重慶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한 지지를 선언하였으며, 이 조직이 모체가 되어 미군이 진주한 직후인 9월 16일 韓國民主黨(이하 한민당)을 결성하였다. >한민당 창당대회는 천도교 기념관에서 1,600여 명의 발기인이 참여한 가운데 개최되었다. 창당대회에서 300명의 중앙집행위원을 선출하고 이승만·徐載弼·김구·李始榮·文昌範·權東鎭·吳世昌 등 7인을 당의 영수로 추대하였다. 송진우가 당의 수석총무로 선출되어 당수 격으로 당을 대표하였으며, 지역 안배에 따라 원세훈·白寬洙·서상일·金度演·許政·趙炳玉·白南薰·金東元이 총무에 선출되었다. >초기 한민당은 ‘지주·자본가 및 친일파’들의 정당이라는 좌익 정치세력의 비난과는 달리 다양한 정치세력이 참여하였다. 연해주·상해·북경 등에서 항일운동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복역한 이후 국내에서 활동했던 원세훈은 1945년 8월 18일 高麗民主黨을 결성하였으며, 한민당에 참여하였다. 식민지시기 유명한 항일변호사였던 金炳魯와 李仁 등도 초기에는 건준에 참여한 安在鴻과의 합작을 추진하였지만, 건준의 조직개편으로 안재홍이 건준에서 탈퇴하자, 백관수·조병옥·金若水 등과 함께 한민당에 참여하였다. 식민지시기 친일을 하지 않았던 국내의 우익인사들이 8·15 직후 한민당에 모두 참여하게 된 데에는 공산주의에 반대한다는 이념적 동질성과 함께 민족통일전선을 표방한 건준이 인공으로 개편되는 과정에서 좌익세력들에 의해 독선적으로 운영되었다는 점이 중요한 이유로 작용하였다. >8·15 직후 한민당에 참여했던 주요 세력과 인물은 다음과 같다. >한국국민당:張德秀·허정·백남훈·윤치영·尹潽善 조선민족당:원세훈·김병로·백관수·조병옥·咸尙勳·김약수·이인 국민대회준비회:송진우·김성수·서상일·김준연·장택상·설의식 >---- >'''한국민주당''', 우리역사넷[[http://contents.history.go.kr/mobile/nh/view.do?levelId=nh_052_0030_0020_0010_0010|#]] 한국민주당은 소위 '친일 전라도 대지주'로 이루어진 정당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위의 자료에서 한민당의 주요 인물로 거론된 사람의 출신과 일제강점기 당시 활동은 다음과 같다:[*장덕수 황해도 출신. 합법적인 틀 내에서 독립운동과 사회운동을 했으나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전향서를 쓰고 40년대 친일 활동을 하였음.][*허정 경상도 출신. 이승만의 구미위원회 활동을 도움.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끌려가 고문을 당함.][*백남훈 황해도 출신. 1919년 [[2.8 독립 선언]]에 유학생 대표로 참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부원 역임. 비타협적 민족주의 운동에 관심을 가졌고, 마지막까지 [[창씨개명]]을 거부함.][*윤치영 한성 출신.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에 연루되어 고문을 당함. 40년대 일본의 전쟁수행에 협력하면서도 이승만 등 국외 독립운동가와 연락을 취함.][*윤보선 충청도 출신. 임시정부 임시의정원에서 활동함. 총독부의 요시찰 인물로 지정되었으며 창씨개명을 끝까지 거부함.][*원세훈 함경도 출신. 1910-20년대에 만주와 중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27년에 신의주로 압송되었고 이후 망명을 시도하다가 모두 실패하여 45년까지 국내에 은거함.][*김병로 전라도 출신. 1905년 [[을사의병]]에 가담함. 변호사 시절 수많은 독립운동 관련 사건을 무료 변론함. 1932년터 은둔생활하면서 창씨개명하지 않고 배급도 받지 않음.][*백관수 전라도 출신. 1919년 2.8 독립 선언에 참가. 1937년 동아일보 사장으로 취임. 1940년 동아일보가 폐간되었을 때 조선총독부로부터 체포되어 1개월간 투옥되어 칩거 생활을 함. 1937-40년 동아일보 사장 시기 친일의혹이 제기되었으나 사후 민족문제연구소 및 대통령직속 친일반민족행위자 진상규명위 보고서 발간위원 측은 '백관수는 친일행위자가 아님'을 확인함.][*조병옥 충청도 출신. 1925년 귀국한 뒤 신간회 총무부장을 맡음.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과 관련하여 일본 당국을 규탄하는 대회를 열어 수년간 옥살이를 함.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2년간 복역하고 전향서를 씀. 이후 1941년 보인광업주식회사의 이사로 취임했다가 광복을 맞음.][*함상훈 황해도 출신. 잡지 '조광' 등에 친일 논설을 발표하고 조선임전보국단 등 친일 단체에서 활동한 친일파.][*김약수 경상도 출신. 1925년 [[조선공산당]] 창당에 참여했으나 그해 10월 당에서 제명당함. 일본 당국에 체포되어 6년간 옥살이함. 일제로부터 조선임전보국단 가입을 권유받았으나 거절하고 수개월간 구금됨.][*이인 경상도 출신. 1923년 변호사 개업. 1935년 조선변호사협회장에 취임. 일제강점기 당시 가인 김병로, 허헌과 함께 다른 독립운동가를 상대로 무료변호를 하여 3대 민족 변호사로 이름을 떨쳤음.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창씨개명을 거부하였으며,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함흥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름.][*송진우 전라도 출신. 동아일보 사장으로 정간 후 사임함. 이후 일본의 협력 요청을 거절함.][*김성수 전라도 출신. 한때 독립운동가로 활동했으나 일제강점기 말기에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이사로서 일본의 침략전쟁을 지지하였으며 친일활동을 했음.][*서상일 경상도 출신. 3.1운동 참여.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 미국에 독립청원서 보냄.][*김준연 전라도 출신. 1920년대에 조선공산당에서 일함. 1930년대에 동아일보에서 주필로 일하다 일장기 말소사건을 계기로 사임함. 45년까지 김성수의 농장을 관리하며 소일함.][*장택상 경상도 출신. 해외의 파리위원부와 구미위원부 등에서 독립운동을 함. 귀국 후 독립운동 지원 혐의로 옥고를 치루거나 독립운동가에 자금을 지원하고 고향에 칩거함.][*설의식 함경도 출신.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 편집국장에서 물러남. 이후 금광 등의 산업에 손을 댐.] 이 인물들의 출신 지역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황해도 3, 전라도 5, 경상도 5, 한성 1, 함경도 2, 충청도 2. 보면 전라도 출신만 모인게 아니라 '''한반도의 각 지역 출신이 총망라되었다.''' 게다가 대부분 독립운동가에 가깝거나[* 그 중에는 김병로와 이인 등 다른 독립운동가에 뒤지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독립운동가는 아니더라도 소위 '유휴분자'에 가까웠다. 친일파로 변절한 사람들도 혹심한 고문을 견디다 못해 변절하여 적극적으로 친일을 한 사람은 거의 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