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친일파 (문단 편집) == 역사 == [[일본]]은 1867년 [[메이지 덴노]]가 즉위한 후 근대 서양의 시스템으로 국가를 개조했다. [[중국]]이 정점에 서는 수천 년 간의 조공 제도로 고착된 [[동아시아]] 국제 질서를 깨고 천황의 이름으로 대등하게 [[청나라]]와 [[조선]]에 외교 문서를 보냈다. 특히 이듬해인 1868년 조선을 향해 자신들이 '왕정 복고'를 이뤘음을 국서로 통보했는데, 그동안 형님 정도로 자신을 생각하던 조선 조정에 [[황제]]를 참칭(?)하는 민감한 언어 선택으로 큰 충격을 줬다. 자연히 '왕'인 조선은 일본에 격이 한 등급 내려간다. 당연히 조선은 국서 접수를 거부하고 일본도 1872년 외교 사절단이 철수하는 등 갈등은 점점 고조됐다. 그러나 1876년 [[운요호 사건]] 때 이양선으로 일본이 무력 시위를 하자 조선 조정은 격론 끝에 문호를 제한적으로 개방하기로 했다. 당연히 일본과 통상은 텄다고 해도 조선 조정의 감정이 좋을 리가 없었다. 국론 역시 존왕양이의 외세 배척 여론은 더욱 강해졌고, [[흥선대원군]]과 위정척사파는 이런 여론을 잘 이용했다. 이 때만 해도 우의정 [[박규수]]와 영의정 이유원 정도가 외세를 이용하자는 의견이었는데 실상 그마저도 동도서기론, 즉 "서양 문명은 기술 면에서 앞서 있을지는 모르나 동양의 정신 문화를 존중하고 배울 점이 있다"는 식의 이상론이었지 일본을 좋아한다는 커녕 최소한 일본에게 뭘 배운다거나 가까이한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었다. 아예 안중에 없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 친일파는 이 때까지 제로. 그러다 1880년 대, 우의정 [[박규수]]의 제자들인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이 [[일본]] 책과 문물을 접하고 일본의 발전상을 흠모하게 된다. 물론 김옥균의 '일본은 동양의 [[영국]]을 자처하니, 우리는 [[프랑스]] 같은 문화 군사 강국을 이루자'는 언급을 볼 때, 일본과 동급으로 조선을 생각했지, 결코 부하가 된다는 생각은 그들 역시 하진 않았던 것 같다. 그렇지만 당시 [[청나라]]의 도움으로 [[임오군란]] 당시 전권을 잡은 대원군을 숙청하고 정권을 잡은 [[명성황후]]와 민씨들이 [[청나라]]식 근대화, [[양무운동]]을 개화 모델로 삼고 국정을 장악하면서, 상대적으로 일본식 급진 개혁을 바랐던 김옥균의 [[개화파|개화당]]은 친일파란 누명을 쓰고 권좌에서 밀려났다. 서양에 쓰러지기 직전인 [[청나라]] 모델로는 미래가 없다는 건 확실했던 개화파는 초조했다. 1884년 우리 나라 최초의 [[우체국]]인 [[우정국]] 완공 축하연에 난을 일으켰다. [[고종황제|고종]]의 신병도 확보하고 서울 요지를 선점한 그들의 난은 성공하는 듯 했으나 [[압록강]] 근처에 주둔했던 청나라 군대가 삽시간에 반격을 가하면서 실패한다. [[갑신정변]]이다. 역적이 된 개화파는 일본으로 탈출했고, 조선에 일본식 개혁을 말하는 사람은 없어졌다. 친일파가 처음 [[매국노]]의 멍에를 쓴 건 한일 강제 합병이 아닌 이 때가 최초다. 그러다 [[일본]]이 1894년 [[청일전쟁]]에,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자 한일 합병은 피할 수 없게 됐다. 그 전만 해도 친일 세력을 발본 색원할 것같이 굴었던 수구파(개화당을 제외한 민씨 쪽 친청파 + [[이완용]])들은 얼굴을 싹 바꿨다. 1905년 외교권을 뺏긴 [[을사늑약]]을 시작으로 [[정미 7조약]] 등등 [[대한제국]]을 해체할 치명적인 조약들마다 수구파들은 누구보다 일본을 위해 열심히 일했으며, [[이완용]], [[송병준]] 등 매국노들은 각기 무리를 짓고 친일 충성 경쟁을 벌일 정도였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전국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났지만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맨 앞에서 길 안내를 맡은 것은 친일파들이 심어놓은 헌병 보조원, 즉 조선인 --조센징-- 앞잡이들이었다. 1910년 강제 병합이 완성되자 이들은 [[일본 정부]]로부터 각종 은사금과 부동산 등은 물론 [[조선귀족]] 지위까지 나눠 받았다. 과거 [[대한제국]]이 부족한 재정에도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던 주미 공사관은 단돈 5달러에 일본에 넘어갔고, 개화파의 거두이자 왕실 종친 [[박영효]]는 28만원, [[이완용]]은 15만원, [[박제순]]은 10만원의 은사금을 받고 아주 떵떵거렸다. [[구한말]] 끝날 때까지 그동안 친일을 했든 친청, 친러였든 상관없이 합병 때까지 조선 조정에서 버틴 자들은 모두 친일파라고 봐도 된다. 그 후로도 [[일본 제국]]이 35년 간 한반도를 강점하면서 제국주의의 양상도 같은 듯 같지 않게 계속 변모했는데, 친일파들의 친일 부역 행위 역시 변모해 갔다. 조선이 점점 제국주의 일본에 동화되고 식민 지배의 정도도 깊어지고 점차 더 많은 조선인들이 시스템에 편입되면서, 일부 권세를 가진 집안들이 저질렀던 친일 부역 행위 역시 그 범위를 넓히고 곳곳에 스며들었다. 이런 시대를 시각적으로 리얼하게 잘 그려낸 작품이 옛 MBC의 불멸의 명작 [[여명의 눈동자]]. 친일파의 출신 성분은 조선 귀족들에서 점차 일반 서민 출신들까지 범위가 확대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