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치마 (문단 편집) ===== 한국 ===== || [[파일:external/cfs3.blog.daum.net/download.blog?fhandle=MEFKTjZAZnMzLmJsb2cuZGF1bS5uZXQ6L0lNQUdFLzAvMS5qcGcudGh1bWI=&filename=1.jpg|height=300]] || [[파일:external/cp.culturecontent.com/dreamhans_koryo_big_53_01.jpg|height=300]] || [[파일:external/kosilk.evezon.net/22.jpg|height=300]] || ||<:>[[고구려]] 왕조[* [[백제]], [[신라]], [[가야]]도 동일한 구조이다.] 한복 ||<:> [[고려]] 왕조 한복 ||<:> [[조선]] 왕조 말기~[[대한민국]] 한복 || ##어베스트에서 위 고려 여성복 이미지를 악성코드로 진단하는 경우가 있으나 [[https://namu.wiki/topic/42806|오진이니]] 삭제하지 마세요.##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5d5cb908b102741d4aa8ae1ca7ea78c9.jpg]] 한국의 [[한복]]은 북방계 기마민족이 입던 옷인 [[호복]]에서 비롯했기 때문에 원래부터 [[바지]]가 있었고, 사람들은 [[삼국시대]] 특유의 주름잡힌 풍성한 치마[* 크게 상(裳)과 군(裙)으로 나누었는데, 상은 길이가 더 길고 더욱 풍성했고 군은 길이도 땅에 질질 끌리지 않고 옷감 역시 상보다 적게 사용했다. 전체에 주름잡힌 주름치마도 많이 등장했다.]를 입고 속에 바지를 같이 입었다. 그리고 이러한 주름치마는 주로 [[귀족]]층의 복식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길이는 발목을 넘어 길게 내려왔다. 신분이 낮은 여성도 치마를 입었으나 길이가 비교적 짧아서 속에 입은 바지가 살짝 보이는 형태였다. 이러한 복식은 주로 [[고구려]] 벽화 등 옛 시각자료를 통해 해당 모습을 추정할 수 있다. 이후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쳐 현재 흔히 알고 있는 한복 치마 형태가 된다. 조선 후기에서 흔히 보이는 치마 말기가 드러나는 양식을 [[기생]]복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말기는 치마를 구성하는 한 부분일 뿐이고 옛날에는 말기의 노출을 크게 터부시 하지 않았으며 기생복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기생이 입는 것이 곧 유행이었다. 조끼허리식 풀치마는 가슴 부근을 압박하듯이 매어 입던 기존 치마를 [[개화기]] 때 성장기 여학생들의 건강을 고려한 서양 선교사의 조언으로 개량한 형태이며, 원래는 어깨끈이 없는 치마를 허리에 두르고 치마 말기에 달린 넓고 긴 치마끈으로 묶어 고정시켰다. 조끼허리 풀치마가 나오기 이전의 치마는 치마끈을 묶고 남은 것을 숨기지 않고 길게 늘어뜨렸는데, 간단하게 매듭지어도 치마가 흘러내리지 않게 고정이 가능한 조끼허리 말기 방식이 도입되면서 넓고 긴 치마끈이 사라졌다. 현대에는 치마끈이 좁고 짧아졌으므로, 장식의 효과를 위해 눈물고름(향대)이라는 것을 치마끈을 늘어뜨린 것처럼 달기도 한다.[* 옛날에 시집갈 때 눈물고름으로 눈물을 훔쳤다는 설은 허구이다. 하지만 옛 치마끈은 면이나 마 재질로 만든 것이 많았던 데다 상의의 옷고름 만큼 넓고 길었으므로 충분히 눈물이든 땀이든 닦는 데 사용할 수 있었다. 옛 영화, 문학작품, 그림에서도 나오는 사용법이다. 치마끈에 수를 놓았다는 것도 조선시대까지의 방식이 아니며, 전해 내려오는 유물이나 그림 등 기록에도 없고 현대의 고 이영희 디자이너가 처음으로 수 놓아 장식한 치마 말기와 끈을 창시했다. 조선시대의 치마는 치마끈이나 속바지의 끈, 그리고 하의의 말기를 염색하지 않은 면이나 마 소재 처럼 마찰력이 좋은 소재로 만들어 어깨끈이 없어 쉽게 벗겨지는 단점을 보완했다.] 또한, 개화기에는 치마가 오늘날의 롱[[스커트]] 정도로 짧아져서 다리가 보이는 정도의 치마를 일상용 한복으로 입기도 했으나, 현대에는 일상용으로 한복을 거의 입지 않게 되면서 조선 후기식의 긴 예식용 치마만 남아있다. 한복 치마의 여밈법은, 현대에 남은 방식이지만 오른자락이 위로 가게 하여 몸 왼쪽으로 여민다. 신분이 낮은 여인은 그 반대로 여몄다. 물론 지역과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었으며 상술한 여밈법은 주로 서울, 경기도, 경상도 지역 풍습이 표준이 된 것이다.[* 조선시대 붕당 정치기에는 치마만 보고도 당파를 가늠할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이북에서는 치마를 오른쪽으로 여며야 양반이라 여겼다.] 한복 치마는 최소 [[삼국시대]]부터 속치마, 속바지 등 속옷을 겹겹이 입어 이웃 나라들의 복식에 비해 풍성한 치마폭을 자랑했다. * 모양별 * 풀치마(자락치마): 치마폭의 자락이 막히지 않고 펼쳐지게 만든 치마. * 통치마: 치마폭을 모두 박아 통처럼 만들어 트임이 없게 만든 치마이다. * 허리말기별 * 띠허리식 말기: 조끼나 어깨끈이 없다. 허리나 가슴에 말기 부분을 대고 둘러서 치마끈으로 묶어 고정하는 치마. 조선 중기까지는 허리에, 후기부터 허리선이 높아짐에 따라 가슴께까지 높게 매어 입었다. * 조끼허리식 말기: 치마 말기에 조끼 모양의 어깨끈이 달린 치마. 개화기에 들어온 [[선교사]]인 [[이화학당]] 제6대 교장 자네트 월터에 의해 만들어지고 보급됐다. * 띠허리 풀치마: 전통적으로 입어온 치마. 허리나 가슴에 입는다. * 조끼허리 통치마: 개화기 이후 주로 여학생이나 어린 아이들이 입었다. * 조끼허리식 풀치마: 개화기에 가슴가리개가 건강과 활동성에 좋지 않음을 안타깝게 여긴 외국인들에 의해 보급되어 현대까지도 많이 입는 양식. 말기 부분이 가슴 위로 올라온다.[* 모양이 포대자루 같다고 대차게 까이기도 한다...] * [[갈래치마]]: 세 가닥으로 나뉘어 있는 웃치마로 아래에 치마를 입고 위에 한 번 더 껴입은 예복용 치마. * [[스란치마]]: 금박이 찍힌 천을 덧댄 스란단을 한 층 붙인 것. 소례복에 착장했다. * [[스란치마#s-2.2|대란치마]]: 스란단을 이층으로 붙인 것. 대례복에 착장했다. 가례[* 왕과 왕세자의 혼례]나 길례[* 세자 이외의 왕자(대군, 군)나 왕녀(공주, 옹주)의 혼례] 시에는 남색 대란치마를 속에도 입었다. * 속치마 속치마는 4~5겹으로 이르는 속바지를 겹겹이 껴입은 뒤에 입었다. * 무지기치마: 길이가 서로 치맛단을 겹겹이 달아 층이 생기게 만든 속치마. 층 수에 따라 3합 무지기, 5합 무지기, 7합 무지기로 분류된다. * 대슘치마: 궁중에서 입은 속치마. 모시에 풀을 먹여 빳빳한 백비나 창호지에 싸서[* 백비나 창호지만 붙이거나 대나무에 창호지를 여러 겹 감싼 것도 있다.] 아랫단에 붙여 겉치마의 아랫자락이 자연스럽게 퍼지게 만들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