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측천무후 (문단 편집) === 신룡정변과 마지막, 그리고 역사의 전설 속으로 === 하지만 699년 이후 [[장역지]], [[장창종]] 등 측근 관리에 실패해 폐단이 발생했으며, 705년 말년에 측천무후가 병으로 건강이 악화되자 당 황실의 충성파들이 '''[[신룡정변]]'''을 일으켜 그만 자리에서 물러나라는 압박을 넣게 된다. 이에 무후는 당시 황태자로 있었던 아들 이현(중종)에게 양위했고, 무주는 1대만에 멸망하며, 당나라 농서 이씨 황실이 복벽했다. 놀라운 것은 보통 비정상적으로 제위에 오른 사람이 퇴위하면 죽음을 면하기 어렵고 측근들도 숙청되는 게 보통인데, 이때는 신하들이 거사에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측천무후에게 당을 부활시키고 [[태상황|태상황제]]로 물러나면 더이상의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선에서 일을 마무리한 것이었다. 이는 무후가 이미 병이 깊어서 오래 살지 못할 게 뻔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측천무후가 당중종과 당예종의 모후이며 당현종의 친조모라는 점이 가장 컸다. 아무리 측천무후가 당을 멸망시킨 역적이라지만, 당나라 부활 이후 황제들이 전부 고종과 측천무후의 직계였다. 무후에게 그 이상의 처벌을 가한다면 신정권이 친어머니를 핍박한 패륜아 취급을 받는 것은 물론이요, 이후 황제들이 대대로 역적의 자손이 되어 정통성 시비까지 벌어지는 빌미가 될 수 있었으니 처단에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또 측천무후가 순순히 물러나준 것도 한 몫을 했을 것이다. 본인이 제 발로 물러났는데 이후에 누가 무주 재건을 외치겠는가. 즉 위의 조건에 측천무후가 순순히 퇴위하여 뒤에 벌어질 불씨가 없어지니 이들도 부담없이 측천무후를 살려주었다고 볼 수 있다. [[파일:d01373f082025aaf425f4392f9edab64034f1a7d.jpg|width=400]] 그래도 권좌에서 쫓겨났다는 충격이 컸는지 그해 말 측천무후는 >"[[황후]]의 예로서 [[장례]]를 치르고, 묘비에 한 자도 새기지 말라." 라는 유언을 남긴 채 붕어했다고 한다. 측천무후가 왜 자신의 비석에 아무런 글을 새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는지를 두고 '내 삶에 대한 평가를 모두 훗날의 역사에 맡긴다.'는 겸허함으로 보는 해석과 '내 공적은 너무도 커서 이런 작은 비석 따위에 다 새기기도 모자란다.'는 자뻑으로 보는 두 가지 상반된 해석이 있다. 어쩌면 둘 다를 노렸을지도 모른다. 이런 식으로 겸손한 척하면서 자뻑하는 '무자 공덕비'는 측천무후의 전유물은 아니었고, 중국 [[역사]]상 몇몇 인물(대표적으로 명신종 [[만력제]])도 남겼다. 또한 자신이 모함해 죽인 폐후 왕씨 일가를 복권시키라고 [[태자]]에게 간청하기도 했다. 일설에는 >"나는 이 나라의 [[황제]]이다." 라는 말을 남겼다고도 한다. 아무튼 측천무후의 유언에 따라 측천무후의 묘비에는 [[글자]]가 없는데 그래서 '무자비'(無字碑)라고 부르기도 하는 모양이다.[* [[중국]]의 소설가 [[샨사]]는 측천무후의 무자비 앞에서 [[소설]] 《측천무후》를 구상했다고 한다.] [[https://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29412092&memberNo=33180239|측천무후 관련 포스트]]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