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측천무후 (문단 편집) === [[공포정치]]와 [[외척]]정치속의 안정된 내치(무주지치) === 무후는 반대파를 매우 엄격히 감시하고 통제했는데, '''사궤'''(四軌)라는 투서함과 [[불량배]], [[건달]]들을 중심으로 한 [[비밀경찰]]인 '''혹리'''(酷吏)들을 바탕으로, 상대의 비리를 먼저 고발하는 사람이 빠르게 승진하는 밀고 정치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이게 신하들 입장에서는 [[마녀사냥]]이 열리는 수준이라 조정에 출근할 때면 가족들과 작별의 인사를 나누고, 무사히 퇴근해 집에 돌아오면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온 양 크게 기뻐했다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지나친 고발로 인해 자신의 인기가 떨어질 것을 우려한 무후는 정적들이 거의 제거되고 제위를 차지하자 사냥개 역할을 하던 ~~[[예조프]]~~ 내준신과 삭원례 등의 혹리들을 차례로 없애 이들에 대한 원성이 자자하던 백성들에게 환호를 받는다. 그야말로 [[토사구팽]]이었다. 친정 가문인 무씨들은 그야말로 세도를 누렸다. 이런 일이 일어난 건 [[전한]] [[여후]] 이래 최초였을 정도였다. 측천무후가 [[조카]]인 [[무승사]] 및 [[무삼사]]에게 제위를 넘겨주려고 말은 했지만 '조카가 당신 제사를 안 지내줄 텐데? 믿을 건 아들뿐'이라는 신료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사실 무승사, 무삼사가 황제가 되고 싶어서 설친 것에 불과하다. 게다가 측천무후가 중종을 폐위한 이유가 가족주의인데 무씨가 황제가 되면 무후의 자식들은 숙청당할 것이 분명했다. 이때 측천무후가 자기 자식들이 죽는 꼴을 그냥 두고 볼 리가 없었다. 무씨가 제위에 오를 경우 일어날 반란에 대한 염려는 덤이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백성들의 생활은 안정되었다고 한다('''무주의 치'''). 혹자는 무후가 다스린 시기의 내치는 당태종의 [[정관의 치]]에 버금가며 이후 현종때 맞이한 [[개원의 치]]를 불러오는 기초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하기도 한다. [[북주]](北周)-[[수나라|수]](隋) 제국 관롱집단들보다는 넒어졌지만, 여전히 협소한 범위의 [[문벌귀족(중국)|문벌귀족]] 집단으로 정계의 고위직을 독점하던 현상을 해소하고, 수나라 시기 시범적으로 도입되던 [[과거 제도]]를 점차 확대시행하여 당나라 후기에 이르면 과거 급제 출신들이 주류를 차기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당삼채|당나라의 도자기]]가 그 특징을 확립한 것도 바로 이 시기의 일이었다. 심지어 이 시기에 [[여권]]이 크게 신장되어 [[일처다부제]]가 실시되기도 했었는데, 거대 제국들 중에서 이런 사례는 유례를 찾기 힘들다. 또한 인재를 아끼는 모습이 보이는데, 무후 시절 '초당 4걸'에 들 정도로 걸출한 문인 낙빈왕이 <토무조격>(討武曌檄)이라는 격문을 지어 이경업 거병의 정당성을 피력하고 무후를 혹독하게 비판한 글을 읽고 이 글을 누가 지었느냐고 물어보았다. 낙빈왕이 썼다는 말을 듣자 재상에게 >"왜 진작에 이 사람을 나에게 추천해 주지 않았나? 이런 인재를 내가 기용해 주지 않았으니 반란이 일어나는 것도 당연하지!" 라며 낙빈왕의 재능을 아까워했다고 하며, 낙빈왕이 죽은 뒤에도 그의 작품을 모아 엮도록 했다. 즉위 후에도 [[적인걸]], [[장간지]] 같은 뛰어난 재상들이 등용되기도 했다. 한국과의 관계를 보면 신라의 제31대 [[신문왕]]이 《예기》(禮記)와 더불어 문장으로 본받아 쓸 만한 것을 요청하자 담당 관청에게 명령하여 《길흉요례》(吉凶要禮)의 사본을 제작하고, 《문관사림》(文舘詞林) 가운데 모범으로 삼을 만한 글들을 골라 뽑아 50권으로 엮어서 보내주었다고 한다. 신라에서 온 왕자 김인문이 [[694년]]에 사망했을 때는 부음을 듣고 수의와 관작을 보낸 뒤 김인문에게 관직을 추증하고 그의 영구를 신라로 호송하도록 명령했으며, 또한 702년 제32대 [[효소왕]]이 붕어한 것을 전해듣고 애도 차원에서 2일 동안 조회를 열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효소왕의 왕제로 뒤를 이어 즉위한 왕자 김융기[* 당현종 이융기의 이름과 같다고 해서 나중에 '흥광'으로 고치기는 했는데, [[성덕왕]]이 즉위했을 때는 아직 당현종이 즉위(712)하기 이전으로 임치군왕 시절이었다.]에게 효소왕의 계승을 승인한 것도 측천무후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