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측천무후 (문단 편집) == 여담 == * 측천무후는 '''[[미각]]이 뛰어났다고 한다'''. 재위 시절 중, 민가에서 엄청나게 큰 [[무(채소)|무]]가 나와서 그녀에게 진상했을 때, 측천무후는 황실 [[요리사]]에게 무를 이용한 요리를 만들라고 명령했다. 요리사는 무를 채 썰어 녹두 가루를 묻혀 볶은 후, [[오징어]], [[새우]], 살코기를 넣어 측천무후에게 바쳤다. 이 요리를 그녀가 '''가연채'''(假燕菜)라고 명명했다고 한다. 그녀는 무척이나 아름다운 모습이었다고 전해지는데, 그 이유는 그녀의 식습관과 연관이 깊다고 한다. 측천무후는 '''[[비타민]]과 [[무기질]]이 많이 들어있는 식품을 많이 섭취했으며, [[꽃]]으로 만든 음식을 즐겨 먹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 '''[[측천문자]]'''라는 것을 만들기도 했는데, 완전 다른 문자를 만들어낸 게 아니고 그냥 한자의 제작 원리에 따라 만든 글자, 즉 한자 몇 개를 더 만든 셈이다. 이들 문자는 기존 한자보다 획수가 더 많고 복잡한 경우가 많아서 측천무후 시기가 끝난 뒤로 사멸해갔다.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를 참조. * 스스로를 [[노자]] 이이의 후손을 자처하고 [[도교]]를 숭상한 당나라와 달리 측천무후는 '''[[불교]]를 숭상했다'''. 이에 한 몫을 거든 건 그녀의 내연남인 풍소보로, [[미륵]] 신앙을 이용해 측천무후를 떠받들었다. [[파일:/20120517_104/seejaelee_1337206380172rJeAj_JPEG/OPDkUhiBLt_e_RTPsKA8Jg.jpg]] 실례로 [[낙양]] 근처에 있는 [[룽먼석굴]]의 대불은 측천무후의 얼굴을 본따 만들어졌다고 한다. 위의 초상화와 비교해보자. 확실히 위압감이 느껴진다. * 불경을 읽을 때 해당 불경을 찬미하기 위해 서두로써 읽는 '''<개경게>'''(開經偈)는 측천무후가 직접 지었다고 한다. > 無上甚深微妙法 (무상심심미묘법) 무상(無上)의 깊고도 깊은 미묘한 법은 > 百千萬却難遭遇 (백천만겁난조우) 백천만 겁이 지나도 다시 뵙기 어려워라. > 我今聞見得受持 (아금문견득수지) 나 지금 듣고 보고 받아 지니고자 하오니 > 願解如來眞實義 (원해여래진실의) 바라건대 여래께서 진실한 뜻을 풀어 주옵소서. * 유달리 문자에 집착하는 성향을 보여, '''명칭을 갈아치우는 것을 상당히 즐겼다'''. 3성 6부를 근간으로 하는 [[당나라]]의 관제는 그대로 두고 이름만 바꾸는가 하면 정적들의 성씨를 나쁜 뜻의 글자로 고치기도 했다. 보통 황제들의 [[시호]]는 한 글자 또는 두 글자가 일반적이었으나 무후가 집권하면서 고조와 태종, 고종의 [[시호]]를 대폭 늘리는 바람에 '''시호 인플레가 벌어져 [[당나라]]부터는 부득이 [[묘호]]나 [[연호]]로 황제를 통칭하게 되었다'''. 그리고 15년도 채 되지 않는 재위기간 동안 [[연호]]를 14차례나 바꾸어 역사가들의 골머리를 앓게 했다. * 주변국들과의 전쟁에서는 큰 재미를 못보다 보니, 재미있게도 '''최초의 [[판다]] 외교를 시도한 인물로서 알려져 있다'''. 측천무후는 두 마리의 판다를 일본에 선물로 보냈다. 요동([[발해]]), 동([[신라]]), 서([[토번]]), 북([[돌궐]])까지 당나라의 군사 영역이 크게 축소되다 보니, 동부의 신라와 발해를 견제함과 동시에 외치의 안정을 취하려고 했던 것이다. [[당나라]]에게 있어서 가장 위협적인 방향이라고 할 만한 북쪽에는 [[돌궐]] 제2제국, 서쪽에는 [[토번]], 동북-동해에 이르는 영역에는 [[발해]]-[[신라]]가 들어서는 상황이었다. 이들이 제각기 한꺼번에 당나라를 견제하기 시작한다면, 연이은 참패로 군사적인 역량이 꺾인 당나라로서는 그 큰 땅덩어리가 도리어 악재로 작용하여 사방의 국경 지대가 공중 분해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괜히 그 자존심 높은 중국의 황제가 [[일본]]에게 다급한 화친 의사를 보낸 것이 아니다. [[https://news.joins.com/article/19670407|#]] * [[한국]]에서 그녀에 대해 안 좋은 평을 한 최초의 인물은 고려 중기의 [[김부식]]이었다. 심지어 조선 초기의 [[권근]]은 >"[[당태종]]이 [[선덕여왕]]을 왕으로 임명했기에 측천무후가 [[중국]]에 나왔다" 고 비난했다. 사실 좀 알고 보면 권근의 이야기가 웃긴 셈인데, 맨 처음에는 당태종이 오히려 사람을 보내어 대신 통치하도록 하려고 했고, 측천무후가 황제에 오른 것과 당태종은 큰 관계가 없다.[* 굳이 들자면 측천무후를 후궁으로 들인 것, 하지만 고작 그 정도로 비난하는 것도 뭣하다. 여기에 이미 중국에서는 [[3세기]] [[위(삼국시대)|조위]]에서 현 일본의 [[야마타이국]]의 여왕 [[히미코]]를 왕으로 인정한 바 있었으며 결정적으로 중국 입장에서는 [[신라]]나 야마타이나 제후국으로 보였다는 것이다. 즉 중국 입장에서는 신라나 야마타이나 다 자기 아래로 보였다는 건데 측천무후가 바보도 아니고 중화의 황제가 되고 싶으면서 제후국이 하는 것을 예시로 들었다는 것은 체면상 맞지가 않다. 진짜 선례를 찾아내서 하려고자 했다면 중국의 역사를 이 잡듯이 뒤져서 비슷한 사례를 들었을 것이다. 사실 당태종은 비웃음을 당할 만도 한 게 신라에 여왕이 있다고 비웃은 전력이 있는데 이후 2대만에 여성 황제가 등극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생판 남도 아니고 바로 자기 후궁이었다. 그것도 이미 입궁해서 바로 옆에서 이런 말들을 들었을 시점이다.][* 다만 측천무후가 살던 7세기에 이웃나라인 [[야마토]](일본), [[신라]](한국), [[동여국]](티베트), [[참파]](베트남)에서 계속 여왕이 나타났고, 중국 민간에서 여황제를 자칭한 [[진석진]]까지 나타났기 때문에 측천무후가 이들에게서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도 있다.] * 측천무후 이후로 [[중화권]]에는 [[서태후]] 등 실권자를 제외하면 공식적으로 여성 최고 지도자가 나오지 않다가, 2016년 [[대만]]의 [[차이잉원]] 총통이 집권함으로써 무려 1,311년만에 공백이 깨지게 되었다. * '관중 18릉'이라고 하는 당나라의 자연적인 산을 능침으로 만들었는데 기록으로는 [[5대 10국]] 시기의 온도가 건릉을 제외하면 모두 도굴했다고 하며, 건릉을 탐사해본 결과 도굴되었을 가능성은 없다고 한다. * 현재로서는 [[안정공주]]나 태자 이홍의 사망이 측천무후의 짓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지만, [[위키백과]]에서는 아예 정설인 것처럼 서술되어 있어서 받아들이는 데 주의가 필요하다. [[간다효]] 같은 전문성 없는 자칭 역사 유튜버는 물론, 심지어 전남대 사학과 이성원 교수처럼 나름 전공자라는 대학 교수마저도 [[벌거벗은 세계사]] 같은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마치 정설인 것마냥 소개하는 경우까지 있을 정도이다.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면 되지]] 정도로 무고하지는 않더라도[* [[장회태자]]의 경우는 실제로 측천무후 자신이 명령한 건 아니더라도 측천무후가 보낸 구신적에 의해 죽임을 당한 이상 측천무후가 분명히 그의 죽음에 일조했다.] 측천무후로서는 억울할 법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