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측천무후 (문단 편집) ==== [[과거 제도]]와 비(非) [[관롱집단]]의 양성 ==== [[과거 제도]]의 완성이자 황권의 강화책인 '''전시'''를 역사상 최초로 시행한 것도 측천무후였다. 측천무후는 능력에 따른 인재 등용 방식인 과거 제도의 전시 시도와 더불어, 인재 등용을 위한 여러 가지 파격적인 제도를 제시하여 시행했다. * 첫째, 스스로를 추천하는 '''자거'''(自擧) 제도를 처음으로 열었다. 이 제도가 시행됨으로써 천하의 인재들이 출신을 불문하고 모두 능력을 자랑하며 스스로를 추천했고, 합격하면 바로 채용되었다. * 둘째, '''무거'''(武擧) 제도를 시행하여 유능한 [[무관]]을 선발했다. * 셋째, '''시관'''(試官) 제도를 시행하여, 관리의 소질을 보증할 수 있도록 했다. * 넷째, 측천무후는 사회 최하층까지 사람을 보내 인재를 선발했다. 하층에서도 당나라 사회에 도움이 될 만한 인재가 여럿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다섯째, '''제과'''(制科)를 개설하여 특별한 능력을 지닌 인재를 선발했다. * 여섯째, 관원들이 유능한 인물을 추천하는 것을 장려했다. 이때 뽑혀서 측천무후의 친위집단이 된 것이 '''북문학사'''(北門學士)였다. 원래 관리가 궁궐에 입궐할 때, 주작대로를 중심으로 하는 궁궐 남문으로 입궐하여 정사를 논하는 것이 원래 예법이었는데, 북문을 통해 몰래 측천무후의 정치적인 브레인 역할을 했던 사람들을 칭하는 단어가 바로 '북문학사'였다. 더불어 훗날 [[개원의 치]]로 칭송받는 [[현종(당)|현종]]의 치세를 이룩하게 한 기본적인 시스템과 [[요숭]], [[송경]] 등의 인재 풀은 사실상 측천무후가 만들어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제위 계승에서 [[태평공주]]가 아닌 현종을 지지한 게 바로 이 신진 비관롱집단이었다. 이런 면에서 측천무후는 최소한 용인과 정치력 자체는 발군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다만 전시는 당중종의 복벽으로 폐지되는 바람에 전시가 본격적으로 시행된 것은 [[북송]]시대에 비로소 이루어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