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측천무후 (문단 편집) ==== 고종의 무후 기용설 ==== 무엇보다도 이 과정에서의 고종의 역할에 대해서 [[재평가]]를 하는 이들도 많다. 실제로 고종이 체력적으로 약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아무런 세력도 없는 측천무후가 고종의 협력관계 내지는 동조없이 무천진 군벌을 등에 업은 황후 왕씨를 몰아내는 것은 사실상 무리였다는 것 때문에 측천무후가 고종을 쥐고 흔든 것이 아니라 조선의 [[숙종(조선)|숙종]]과 [[장희빈]]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고종 입장에서 무천진 군벌 정리를 위해서 측천무후를 기용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한국사에서 비슷한 예가 [[고종(대한제국)|고종]]과 [[명성황후]]이다. 그러나 나름 국가 시스템을 정비하고 민생을 안정시킨 측천무후를 외척 세도의 탐학과 외세 줄타기로 국가 멸망으로 이끈 명성황후와 암군인 조선 고종에 비유하는 건 무리이다.] 실제로 무천진 군벌 축출은 측천무후의 입궐과 거의 동시에 이뤄지기 시작하는데, 이때는 측천무후가 자기 앞가림하기 바빴던 시절이다. 그리고 고종이 살아 있는 동안 측천무후는 절대 주도적으로 나선 적이 없는 것도 분명하다. 다만 고종의 경우는 워낙 체력이 약해서 수시로 쓰러졌기 때문에 사실상 고종과 측천무후의 협치에 가까웠는데, 사실 이것도 [[수문제|수나라 문제]]가 보여준 장면이었다. 수와 당 초기처럼 북방 계통의 직접적인 영향력 아래 있을 때나 종종 보이는 모습이다. 이후 고종이 상관의를 통해 무후를 폐위시키려고 했지만 결국 상관의가 잘리고 무후가 고종을 협박했다는 대목이 있는데, 이것도 고종이 무후의 목줄을 부여잡은 것이지 어디까지나 최고 권력은 고종에게 있었다. 더욱이 고종이 그 당시 골골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황권의 진공 상태를 고려한 조치일 수도 있는 것이다. 무후는 이후 고종에게 한동안 허리를 굽혔다. 게다가 고종 시기에도 측천무후의 포지션은 어디까지나 현명한 황후이자 보조자에 불과했던 탓에 고종의 첩들을 자신이 화가 난다고 죽일 만한 세력이 아니었으며, 결정적으로 죽였다는 첩들 외에도 고종에게는 여러 첩들이 존재했다.[* 무후가 죽였다는 첩 혹은 고종의 여인들은 폐황후 왕씨, 숙비 소씨, 한국부인 무씨, 위국부인 하란씨로 왕씨, 소씨는 무후가 황후로 책립되는 과정의 정쟁에서 제거되었고, 한국부인, 위국부인은 무후의 언니, 조카로 고종의 총애를 받았지만 이것이 [[간통|통정]] 관계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도리어 고종의 자식을 낳은 유씨, 정씨, 양씨 등은 살해당하지 않았다.] 고종 사후에야 여러 남첩들을 들였으나 그들이 정국을 쥐고 흔들만한 권력을 소유했다는 증거는 그다지 없다. 다만 무측천 재위 말년에 통치력이 쇠퇴한 시점부터는 이들 남첩들이 궁중을 장악하면서 점차 입김을 늘려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