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충숙왕 (문단 편집) == 생애 == ||<-3> '''역대 강릉(江陵)의 가신''' || || '''1대''' ||'''강릉대군(江陵大君)''' ||'''왕만(王卍)''' || || '''2대''' ||'''강릉부원대군(江陵府院大君)''' ||[[공민왕|왕전(王顓)]] || || '''3대''' ||'''강령부원대군(江寧府院大君)''' ||[[우왕|왕우(王禑)]] || 1299년 강릉군에 봉해졌고, 이후 강릉대군(江陵大君)으로 진봉되었으며 그의 친형인 세자 [[광릉군|왕감]]이 왕위 계승 문제로 인해 1310년 부왕인 충선왕에 의해서 살해당한 뒤에 후계자가 되었다. 1313년 [[원나라]]의 [[심양왕|심왕]] 자리를 지키던 아버지의 양위를 받아 즉위했지만 '''이 책임감없고 이상한 아버지 충선왕은 평생 아들의 발목을 잡게 되는 결정을 남겼다'''. 안 그래도 충선왕이 [[상왕]]으로 건재해서 충숙왕의 왕권이 약한 상황에서 충선왕이 1316년 자신의 원나라 작위인 심양왕, 즉 심왕 자리와 고려의 [[세자]] 자리를 이복형 [[강양공]][* 제25대 [[충렬왕]]과 고려인 [[정화궁주]] 왕씨의 아들. 이름은 '왕자'였다.]의 차남인 연안군 [[왕고(고려)|왕고]]에게 물려준 것이다. 물론 온전한 자의가 아닌 정치적으로 압력을 받은 탓에[* [[제국대장공주]] 보르지긴 쿠틀룩켈미쉬나 그 소생인 충선왕이 아니었다면 고려의 왕위는 당연히 강양공 왕자에게 돌아갔을 것이다. 충선왕 입장에서 심왕 자리를 조카에게 준 건 미안한 마음에 챙겨준 보상 비슷한 것이었을 수 있다.] 조카에게 물려준 듯하나 이는 충숙왕에게 큰 위협이 되었고, 고려 조정을 어수선하게 만드는 근본적인 원인이 되었으며, 명목상으로 포괄하게 된 [[요동]]의 영토 역시 사라지게 되었다. 심왕 왕고는 고려 국왕 자리에 욕심을 품고, 지속적으로 사촌인 충숙왕을 모함했다. 결국 왕이 주색에 빠져 정치를 소홀히 한다는 것을 명분으로 충숙왕은 원나라에 소환되었다가 풀려나기를 반복했다.[* 심왕 왕고의 모략 때문만이 아니라 충숙왕의 아내인 [[복국장공주]] 보르지긴 이린친발라가 갑자기 [[승하]]한 일이 있었는데 충숙왕이 복국장공주를 피흘릴 정도로 두들겨 패 죽였다는 혐의를 받고 원나라에서 문제삼은 적도 있었다. 그런데 사실 복국장공주는 고려에 올 때부터 몸이 이미 좋지 않은 상태였으며, 애당초 부부의 사이는 좋지 않아서 하루가 멀다하고 부부싸움을 벌였다고 한다.] 하지만 업적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닌데 '''1318년의 업적이 특히 많다'''. 원나라에 보내는 무리한 세공을 삭감하는데 어느 정도 효과를 보기도 했으며, 당시 백성들의 큰 고통이었던 [[공녀]]나 [[환관]]들을 원나라로 보내는 것을 줄여 달라고 청원하기도 했다. [[제주도]]에서 사용(使用, 또는 士用)·김성(金成)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검교평리 송영(宋英)을 보내어 안무하게 하였다. 같은 해 폐단이 많았던 사심관을 폐지하였으며, '제폐사목소'(除弊事目所)를 설치했다가 '[[찰리변위도감]]'(察理辨違都監)으로 고쳐 [[권문세족]]이 점령한 땅을 색출하여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도록 했다. 채무에 있어서 [[사채|고리대금업]]을 막아 [[이자]]가 원금에 상당할 때는 정지시키는 등 단속에 힘을 기울였다. 고려에 [[남송]]의 대학자 [[주자(철학자)|주자]]의 성리학을 들여 온 [[안향]]을 [[문묘]]에 배향했으며, '화자거 집전민추고도감'(火者據 執田民推考都監)을 설치했다. 최소한 고려 국왕이라는 책임감이 부족해 [[베이징|대도]]에서 원격 통치를 하며 자신의 학문 사업과 원나라의 정치 싸움에만 몰두하던 부왕 충선왕보다는 충숙왕의 치세가 그나마 나았다. 1321년 심왕 왕고가 원나라 [[영종(원, 5대)|영종]]의 명령으로 충숙왕이 압송되자 2년간 고려 국왕을 자칭하기까지 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충숙왕이 잘 해보겠다는 의욕을 상실하는 것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결국 싫증이 난 충숙왕은 왕 노릇을 못 해먹겠다며 자신을 위협하던 심왕 왕고에게 양위할 뜻을 내비쳤으나 중신들의 반대로 무산되기도 했다. 충숙왕은 이전에도 왕고의 형제들에게 작위를 주는 등 심왕파에게 유화적인 자세로 나갔었다. 왕고는 지속해서 사촌인 충숙왕을 모함했으며 1323년 심지어는 원나라 황제에게 "고려를 [[성(행정구역)|성]](省)으로 만들고 원나라가 직접 통치하죠"라는 어이없는 주장을 펴기도 했는데 이를 '''[[입성책동]]'''이라고 한다. 그러나 '입성책동'은 굳이 그럭저럭 안정된 정국에 괜히 평지풍파일으킬 필요가 있냐는 원나라 조정 내부 반대 의견과 대학자 [[이제현]]의 노력 등으로 무산되었다[* 실제로 [[원나라]] 내부에서 고려를 간접종속국이 아닌 직할통치령, 즉 원나라 영토로 편입시키고자 하는 의사가 있었다 한들, 이 시기의 원나라 상황을 감안했을 때 현실적으로 힘들었을 것이다. 원나라는 건국 초기부터 한줌도 안 되는 극소수의 몽골인들이 절대 다수의 한족 및 소수민족들을 통치하는 구조였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불안정한 국가 구조를 안고 갈 수밖에 없었고, 더군다나 이 시기는 원나라 후기여서 안 그래도 허약한 행정력 때문에 내부적으로 굉장히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이때 고려가 원나라의 직할령 시도를 방어하는데 내세운 것 중 하나가 바로 원종과 세조 [[쿠빌라이 칸]]이 각자 태자 시절[* 그리고 원종은 아들 충렬왕을 쿠빌라이의 딸 [[제국대장공주]]에게 장가 보내어 사돈을 맺었다. 따라서 쿠빌라이는 충렬왕의 [[장인어른|장인]]이기도 하다.] 맺은 협약인 '''세조구제'''였다. 실제로 원나라가 몇 차례나 고려를 완전 합병하려 할 때마다 '세조구제'는 가장 확실한 방어막이 되어 주었다. 그런데도 심왕 왕고와의 알력이 계속되자 1330년 충숙왕은 아들 왕정에게 양위하고, 원나라로 갔는데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아들이 바로 '''[[한국사]] 최악의 폭군인 [[충혜왕]]이었다'''. 충혜왕의 막장 짓을 보다 못한 원나라는 결국 2년만에 충혜왕을 폐위시키고, 다시 충숙왕을 복위시켰으나 정치에 뜻을 잃은 충숙왕은 신하도 만나지 않고, 사냥과 음주가무로 소일하다가 8년만인 1339년 3월 향년 46세에 승하했다. 시호는 '충숙의효대왕'(忠肅懿孝大王)이었다.[* 원나라의 시호를 쓰지 않는 경우에는 '의효왕', 고로 '의왕'(懿王)으로 줄여 부르는 것도 가능하다. 전대인 제18대 [[의종(고려)|의종]]과는 한자가 다르다.] 그나마 충숙왕에게 다행한 일은 어린 [[충정왕]]이 폐위된 이후 3남인 [[공민왕]]이 즉위했다는 점이다. 공민왕도 초기에는 반원 개혁을 일으키며 고려를 부흥시키는데 노력했지만 부인인 [[노국대장공주]]의 승하 뒤 폐인이 된채 암군으로 타락해버렸고 끝내 자제위에게 참혹하게 시해를 당하며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여러모로 자식 농사에는 완전히 실패한 왕이라 할 수 있는데 장남 충혜왕은 말할 것도 없고, 3남 공민왕도 초반에는 잘했다가 나중에는 암군으로 타락했으며, 차남 용산원자는 어린 나이에 요절했다. 큰손자 [[충목왕]]은 명군의 자질이 보였으나 요절했고, 둘째 손자 [[충정왕]]과 셋째 손자 [[우왕]]도 좋은 임금이 되지는 못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