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최승우 (문단 편집) == 기타 == * [[신라삼최]] 중에서 생애와 행적에 대해서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최승우와 관련하여 남은 [[기록]]이 극도로 부실하기 때문이다. [[최치원]]은 [[고려]]에 귀부하지 않았음에도 고려 [[현종(고려)|현종]] 대에 문창후(文昌侯)라는 [[시호]]를 추증받고 [[문묘]]에 종사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국]]의 여러 [[서원]]에서 제향되기도 했고 [[조선]]에서도 여전히 문묘에 배향해 줄 정도로 영광을 누렸고, [[최언위]]는 최치원만큼의 유명세를 떨치지는 못했지만 고려에 귀부하고 나서 높은 벼슬을 받고 천수를 누렸으며 직접 남긴 고승들의 비문이 지금도 상당수 남아있기 때문에 그의 행적과 사상을 간접적으로나마 알아볼 수 있다. 하지만 최승우는 생몰년도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기록이 거의 없다. 최승우가 몸담았던 [[후백제]]가 [[고려]]에게 패배하여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린 점도 있겠지만 927년 견훤이 [[왕건]]에게 보낸 국서의 작성자가 최승우로 알려져있는데[* 일각에서는 최승우가 후백제에서 임관했는지조차 불분명하다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 국서를 작성했던 것으로 보아서 후백제의 [[관리]]였던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이 서신의 내용이 고려의 입장에서는 대단히 [[모욕]]적이었기 때문에 고려에서 더욱 우대해 줄 까닭이 없었던 점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 이러한 정황에 대해서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나름대로 [[상상력]]을 더해서 잘 묘사하였는데 최승우가 [[죽음]]이 얼마 남지 않은 [[최응]]과 마지막 대담을 하는 장면에서“허망한 것은 이긴 자는 자신의 행실을 기록에 남겨 역사라고 하지만 진 자는 그것마저 다 사라지고 [[변명]]의 여지조차도 없다. [[도적]]이나 화적떼의 이름으로 분류되어 오명으로 남을 뿐이다”며 “훗날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이 구차한 삶이 끝났는지 모를 수 있다”며 그것이 두렵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실제 역사에서 최승우의 [[운명]]을 알게 되는 입장에서 본다면 참으로 의미심장한 대사가 아닐 수 없다. * 저서로《호본집(餬本集)》이라는 최승우 본인의 문집으로 추정되는 책 5권을 지었다고 하나 오늘날 전해지지 않는다. * [[조선]] 시대의 일부 기록에서는 중국에서 [[도술]]을 배워 신라에 퍼뜨린 한국 도맥의 시조격 인물로 등장하기도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