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최석채 (문단 편집) == 생애 == [[1917년]] [[11월 21일]] [[경상북도]] [[김천시|김천군]](現 [[김천시]]) [[조마면]] 신안리[* [[화순 최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최무길]]·[[최익길]]과 배우 [[최란]]도 이 마을 출신이다.]에서 [[http://news.imaeil.com/CultureAll/2015091320520423899|태어났다]]. 1936년 [[일본]] [[보통문관시험]]에 합격한 뒤 1940년 3월 주쿄법률학교, 1942년 8월 [[주오대학]] [[법학부]]를 졸업하였다. 1942년 3월부터 1945년 8월까지 일본 잡지 호세이(法政)의 편집기자를 지냈다. [[8.15 광복|광복]] 후 건국공론 편집부장, 경북신문 편집국 차장, 부녀일보 편집국장 등을 지냈고 [[대한민국 정부|정부]] 수립 후 [[대한민국 경찰|경찰]]에 입직했다. 1949년 10월 27일부터 1950년 7월 9일까지 [[https://www.gbpolice.go.kr/PageLink.do?link=/sj/50/501030|제13대]] [[성주경찰서]]장, 1950년 9월 24일부터 1951년 4월 24일까지 [[https://www.gbpolice.go.kr/PageLink.do?link=/mg/50/501030|제12대]] [[문경경찰서]]장, 1951년 4월 25일부터 1952년 5월 18일까지 [[https://www.gbpolice.go.kr/PageLink.do?link=/yj/50/501030|제12대]] [[영주경찰서]]장을 역임했다. 1952년 화랑무공훈장을 수여받았는데 [[6.25 전쟁]] 당시 경찰서장으로서 무공을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1952년 7월 2일 [[이승만 정부]]와 [[자유당]]의 [[제1차 개헌|발췌 개헌]]에 반발해 사표를 내고 경찰을 떠났다. 1954년 언론계로 돌아갔고 대구일보를 거쳐 대구[[매일신문]]에서 편집국장, 주필을 지냈다. 1955년 9월 10일 주유엔 한국대사 [[임병직]]의 대구 방문 당시 폭염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을 관제시위에 동원하고 방치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최석채는 이 사건을 빌미로 9월 13일자 대구매일신문에 자유당 정권이 정치행사 때마다 학생들을 동원하여 학업에 지장을 주는 것을 비판하는 사설을 게재했다. 그러자 다음날인 14일 [[대구 매일신문 테러 사건|관변단체 정치깡패들에게 매일신문사가 테러를 당했다]]. 이때 경찰과 검찰은 가해자들을 제대로 수사하기는커녕 피해자인 최석채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기소하는 추태를 보였다. 다행히도 이듬해인 1956년 5월 대법원이 무죄를 확정했다. 1959년 [[조선일보]]로 이직했고 같은 해 10월 논설위원이 되었다. 이듬해인 1960년 [[4.19 혁명]]을 전후한 시기에도 이승만 정권을 비판하는 언론투쟁을 전개하였다. 1960년 3월 17일 최석채는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사설「호헌구국운동 이외의 다른 방도는 없다」를 게재하여 다시 한 번 역사의 한 페이지에 이름을 남긴다.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몰락한 후 치러진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재야 진보정당인 [[사회대중당]] 후보로 대구시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당(1955년)|민주당]] [[서동진]]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본업으로 돌아와 1960년 9월부터 [[경향신문]] 편집국장을 지내다가 1961년 1월 다시 조선일보로 이직, 편집국장에 취임하였다. [[박정희]]가 정식으로 대통령이 되기 전([[국가재건최고회의]] 시대)이었던 1963년 3월 현역 군인들이 군사혁명 지지 및 민정참여를 촉구하는 관제시위를 하자 3월 16일「일부 군인들의 탈선행동에 경고한다」라는 사설을 실어 이를 비판하였다. 이 사건이 있은 직후「비상사태임시조치법」으로 정치비판이 봉쇄되자 3월 17일부터 28일까지 사설을 보이콧하는 방식으로 항의했다. 1964년 4월 한국신문편집인협회 부회장으로 선출되었고 같은 해 [[6.3 항쟁]]과 [[언론윤리위원회법 파동]]이 일어나자 언론윤리위원회법 반대 투쟁에 앞장섰으며 반대투쟁위원회 실행위원으로 활동했다. 1966년 4월부터 1971년 1월까지 신문편집인협회 제3대 회장을 역임했다. 1965년부터 1971년까지 [[조선일보]] 주필을 역임했는데 1971년 12월 국회에서 날치기로 통과된「국가보위법」에 대해 지지 보도를 하라는 정부의 압력을 받자 이에 굴하지 않고 주필직을 사임하였다. 1971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언론부문), 1977년 금관문화훈장을 수상했고 같은 해 2월 [[경북대학교]]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1973년 2월부터 1980년 6월까지, 1988년 11월부터 1989년 2월까지 [[문화방송]] [[회장]]을 역임했다. 또 [[10.26 사건]]과 [[서울의 봄]], [[전두환]]의 집권을 전후한 시기인 1979년부터 1980년까지 [[정수장학회]] [[이사장]]을 역임했는데 최석채의 그간 행적과 비교하면 아쉬운 행보로 볼 수 있겠다.[* 참고로 [[문화방송]] 역시 1962년부터 1988년까지 정수장학회 소유였다. 시기를 보면 1972년 [[10월 유신]] 이후 독재정권에 협조적 태도로 돌아선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 1981년 4월부터 1987년 4월까지 대구매일신문 명예회장을 역임하면서「몽향칼럼」을 연재했다.[* 지금으로 치면 '대기자'와 비슷한 지위였다고 볼 수 있을 듯하다.] 1988년 이후에는 신문편집인협회 고문으로 위촉되어 활동했다. 1991년 지병인 [[심장병]]이 악화돼 3월 31일부터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 [[서울아산병원|서울중앙병원]](現 [[서울아산병원]])에서 투병했다. 같은 해 4월 11일 오후 1시 30분, [[서울특별시]] [[은평구]] [[응암동]] 2-21번지[* 현재 이 자리에는 [[https://naver.me/xWiyKTSc|힐스테이트 녹번역]]이 위치해 있다.] 자택에서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1041200329101007&editNo=15&printCount=1&publishDate=1991-04-12&officeId=00032&pageNo=1&printNo=14018&publishType=00010|사망했다]]. 저서로는『서민의 항장(抗章)』(1956),『한국의 신문윤리』(공저, 1965),『일제하 명논설집』(1975),『속 서민의 항장』(1990) 등이 있다. 사후 한국신문편집인협회에서 본적지인 김천시 조마면에 추모비를 건립하고 그가 생전에 쓴 글을 엮은 책『지성감민』과 추모문집 『낙동강 오리알』을 출간하였다. 1964년 [[언론윤리위원회법 파동]] 때 언론자유 수호에 앞장선 공로로 2000년 국제언론인협회가 선정한 20세기 언론자유영웅 50인에 선정되었다. [[https://www.donga.com/news/Inter/article/all/20000408/7523616/1|#]]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