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최무룡 (문단 편집) == 활동 == 1928년 음력 2월 25일 경기도 파주군 임진면(현 파주시 문산읍)의 유복한 집안에서 2남 3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배 한 척을 가진 선주로, [[임진강]]을 통해 [[중국]] 대륙을 오가며 곡물 특히, [[콩]]을 사고 팔던 도매업자였다. 1940년 [[문산초등학교(경기)|임진공립심상소학교]]를 졸업하고 개성상업학교에 진학해 1945년에 졸업했다. 당시는 [[일제강점기|분단 이전]]으로 지금같은 거리감이 없었고, 당시 고향 파주군 임진면에서 가장 가까운 대도시는 경성부가 아닌 개성부였기에 개성부에서 학교를 다녔던 것이다. 개성상업학교 졸업 후 [[일본인]] 교사의 추천으로 [[한국상업은행|조선상업은행]] 본점에 입사해 [[은행원]]으로 근무했다. [[8.15 광복]] 후 그해 11월 사직한 뒤 고향으로 돌아왔고, 문산금융조합에 입사해 대학 입시를 준비했는데 이때 [[연극]]을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다. 이듬해인 1946년 [[경성법학전문학교]]에 입학했고, 1947년 [[국대안 파동]]과 관련해 시위에 참여했다가 경찰에 연행되어 [[https://blog.daum.net/thskrl3582/13391044|고문을 받기도 했다]]. 그 뒤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중퇴하고 1948년 [[중앙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해 연극반을 창설했고, 당시 [[서울특별시]] [[중구(서울)|중구]] [[명동]]에 있던 시공관에서 연극 <[[햄릿]]>을 공연하면서 [[연극배우]]로 데뷔했다. 햄릿 공연을 통한 성공적인 데뷔로 이듬해인 1949년부터 [[KBS|서울중앙방송국]] 성우에 특채되기도 했다. 연극을 하던 시절에는 백조가극단에 속해 있었는데, 백조가극단을 운영하던 여배우 [[전옥]]의 딸이 바로 최민수의 어머니가 되는 [[강효실]]이다. 강효실은 부모가 이혼한 후 아버지 [[강홍식]]을 따라 평양으로 갔고, 일본인 계모의 슬하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아버지, 친어머니의 대를 이어 배우가 되었다. 이후 [[한국전쟁]] 도중 월남하여 어린 시절 헤어졌던 친어머니 전옥과 재회하게 된다. 그러나 모녀가 오랫동안 떨어져 있다 다시 만나 서로가 어색할 수 밖에 없었고, 자연히 갈등이 있었는데, 그러다가 어머니의 극단에서 같이 연기를 하던 최무룡과 가까워지게 된 것이다. 전옥은 후배 최무룡을 각별히 예뻐하며 아꼈지만, 사위로는 최무룡이 탐탁치 않았는지 최무룡과 강효실의 사이를 반대했는데, 두 사람은 결국 전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하였고, 최민수가 태어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최무룡과 [[김지미]]의 간통으로 최무룡과 강효실은 결국 이혼하게 된다. 최무룡과 강효실의 결혼식에 재밌는 뒷 이야기가 있는데, 최무룡과 강효실이 만나 결혼하게 된건 부산 피난 시절의 일인데, 미군의 함정을 빌려서 선상 결혼식을 하였다. 당시 결혼식에는 신랑의 가까운 친구들 가운데 입담이 좋은 사람이 재담을 섞어 하객들을 웃기면서 신랑, 신부의 앞날을 축복해 주는 축사라는 순서가 항상 꼈었는데, 최무룡과 강효실의 결혼식에서는 최무룡의 고향 친구라는 이가 그 축사 라는 것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축사가 한 시간이 다 되도록 끝날줄 몰랐고, 마침 그 때 몸이 불편했던 강효실은 함정이 좌우로 요동을 치는 바람에 뱃멀미를 하게 되었고, 뱃멀미를 견디다 못해 결국 졸도를 하고 말았다고 한다. 다행히 신랑이 신부를 재빨리 부축해서 무사할 수 있었지만 결혼식은 아주 우습게 끝이 나게 되었다고 한다. 1952년 중앙대학교 졸업 후 1954년 이만흥 감독의 영화 <탁류>를 통해서 [[영화]]계에 데뷔하여 개성 있는 연기와 목소리로 강한 인상을 남기며 [[허장강]], [[이예춘]], [[독고성]] 등과 함께 영화계 대스타로 성장하였다. 공교롭게도 앞에 세명 다 아들이 부친의 뒤를 이어 배우의 길을 걷고 있다. 각각 [[허기호]] - [[허준호]] 형제, [[이덕화]], [[독고영재]]이다. 1965년 영화 <피어린 구월산>을 시초로 감독까지 맡기도 했다. 1972~1976년까지 한국영화인협회 연기분과위원회 부위원장, 1982~1985년까지 위원장을 각각 역임했다. 원로배우 [[엄앵란]]의 회고에 따르면, 상당히 신사적이고 매너가 좋았다고 한다. 길을 가다 진흙탕이 있으면 겉옷을 그 위에 덮어 여배우가 밟고 지나가게 배려해줬다고... ~~[[신성일]]은 그런 경우 '야, 뛰어와서 건너!'라고 외친다는 부연설명도~~ [[김승호(1918)|김승호]], [[최남현]], [[김진규(배우)|김진규]], [[박암]] 등 다른 영화배우들과 함께 [[임화수]]에게 구타를 당한 적도 있다고 한다. 이 부분은 [[야인시대]]에서도 그대로 묘사되었다. 야인시대에서 청년기의 최무룡 역할을 맡은 배우는 [[무인시대]]에서 [[최우]]를 맡은 정재곤. 1960년 4월 24일 기사에 [[유지광]], [[임화수]]의 구속을 언급하는 기사에서 충무로 2가의 반공예술인단 사무실에서 동대문파 4, 5명에게서 용공 사상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구타당했다고 나온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