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무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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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무룡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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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우주연상
제2회
(1964년)


제3회
(1965년)


제4회
(1966년)

김진규
(잉여인간)

최무룡
(남과 북)


신영균
(시장)

제7회
(1970년)


제8회
(197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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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박노식
(돌아온 팔도 사나이)

최무룡
(30년만의 대결)


박노식
(소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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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
제6회
(1970년)


제7회
(1971년)


제8회
(1972년)

황해
(독 짓는 늙은이)

최무룡
(방에 불을 꺼주오)


허장강
(분례기)




최무룡
崔戊龍 | Choi Mu-ry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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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최한련
출생
1928년 음력 2월 25일[1]
경기도 파주군 임진면
(現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사망
1999년 11월 11일[2] (향년 71세)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신촌동 세브란스병원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직업
영화배우, 영화감독, 가수, 성우, 전 국회의원
가족
배우자 강효실(1932년생)(1954년 결혼~1963년 이혼)
배우자 김지미(1940년생)(1963년 결혼~1969년 이혼)
배우자 차금자
아들 최민수(1962년생) 외 슬하 2남 5녀
학력
임진공립심상소학교 (졸업)
개성상업학교 (졸업)
경성법학전문학교 (중퇴)
중앙대학교 (법학 / 학사)
종교
개신교
의원 선수
1
의원 대수
13
상훈
보관문화훈장

1. 개요
2. 활동
3. 가족관계
4. 가수 활동
5. 말년
7. 대중매체에서
8. 수상 경력
9. 여담
10. 선거 이력
11. 참고/관련 자료
12.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대한민국영화배우 겸 감독으로, 본명은 [최한련]이다. 배우 최민수의 아버지로, 수많은 영화에 출연하며 흥행 가도를 달렸던 [대 배우]로, 당대엔 아들(최민수)보다 훨씬 '존재감이 큰 배우'였다.
한마디로 '일세를 풍미했던 대배우'이자, '최초의 성우KBS 성우극회'라 할 수 있다.


2. 활동[편집]


1928년 음력 2월 25일 경기도 파주군 임진면(현 파주시 문산읍)의 유복한 집안에서 2남 3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배 한 척을 가진 선주로, 임진강을 통해 중국 대륙을 오가며 곡물 특히, 을 사고 팔던 도매업자였다.

1940년 임진공립심상소학교를 졸업하고 개성상업학교에 진학해 1945년에 졸업했다. 당시는 분단 이전으로 지금같은 거리감이 없었고, 당시 고향 파주군 임진면에서 가장 가까운 대도시는 경성부가 아닌 개성부였기에 개성부에서 학교를 다녔던 것이다.

개성상업학교 졸업 후 일본인 교사의 추천으로 조선상업은행 본점에 입사해 은행원으로 근무했다. 8.15 광복 후 그해 11월 사직한 뒤 고향으로 돌아왔고, 문산금융조합에 입사해 대학 입시를 준비했는데 이때 연극을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다. 이듬해인 1946년 경성법학전문학교에 입학했고, 1947년 국대안 파동과 관련해 시위에 참여했다가 경찰에 연행되어 고문을 받기도 했다.

그 뒤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중퇴하고 1948년 중앙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해 연극반을 창설했고, 당시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에 있던 시공관에서 연극 <햄릿>을 공연하면서 연극배우로 데뷔했다. 햄릿 공연을 통한 성공적인 데뷔로 이듬해인 1949년부터 서울중앙방송국 성우에 특채되기도 했다.

연극을 하던 시절에는 백조가극단에 속해 있었는데, 백조가극단을 운영하던 여배우 전옥의 딸이 바로 최민수의 어머니가 되는 강효실이다. 강효실은 부모가 이혼한 후 아버지 강홍식을 따라 평양으로 갔고, 일본인 계모의 슬하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아버지, 친어머니의 대를 이어 배우가 되었다. 이후 한국전쟁 도중 월남하여 어린 시절 헤어졌던 친어머니 전옥과 재회하게 된다. 그러나 모녀가 오랫동안 떨어져 있다 다시 만나 서로가 어색할 수 밖에 없었고, 자연히 갈등이 있었는데, 그러다가 어머니의 극단에서 같이 연기를 하던 최무룡과 가까워지게 된 것이다. 전옥은 후배 최무룡을 각별히 예뻐하며 아꼈지만, 사위로는 최무룡이 탐탁치 않았는지 최무룡과 강효실의 사이를 반대했는데, 두 사람은 결국 전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하였고, 최민수가 태어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최무룡과 김지미의 간통으로 최무룡과 강효실은 결국 이혼하게 된다.

최무룡과 강효실의 결혼식에 재밌는 뒷 이야기가 있는데, 최무룡과 강효실이 만나 결혼하게 된건 부산 피난 시절의 일인데, 미군의 함정을 빌려서 선상 결혼식을 하였다. 당시 결혼식에는 신랑의 가까운 친구들 가운데 입담이 좋은 사람이 재담을 섞어 하객들을 웃기면서 신랑, 신부의 앞날을 축복해 주는 축사라는 순서가 항상 꼈었는데, 최무룡과 강효실의 결혼식에서는 최무룡의 고향 친구라는 이가 그 축사 라는 것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축사가 한 시간이 다 되도록 끝날줄 몰랐고, 마침 그 때 몸이 불편했던 강효실은 함정이 좌우로 요동을 치는 바람에 뱃멀미를 하게 되었고, 뱃멀미를 견디다 못해 결국 졸도를 하고 말았다고 한다. 다행히 신랑이 신부를 재빨리 부축해서 무사할 수 있었지만 결혼식은 아주 우습게 끝이 나게 되었다고 한다.

1952년 중앙대학교 졸업 후 1954년 이만흥 감독의 영화 <탁류>를 통해서 영화계에 데뷔하여 개성 있는 연기와 목소리로 강한 인상을 남기며 허장강, 이예춘, 독고성 등과 함께 영화계 대스타로 성장하였다. 공교롭게도 앞에 세명 다 아들이 부친의 뒤를 이어 배우의 길을 걷고 있다. 각각 허기호 - 허준호 형제, 이덕화, 독고영재이다. 1965년 영화 <피어린 구월산>을 시초로 감독까지 맡기도 했다. 1972~1976년까지 한국영화인협회 연기분과위원회 부위원장, 1982~1985년까지 위원장을 각각 역임했다.

원로배우 엄앵란의 회고에 따르면, 상당히 신사적이고 매너가 좋았다고 한다. 길을 가다 진흙탕이 있으면 겉옷을 그 위에 덮어 여배우가 밟고 지나가게 배려해줬다고... 신성일은 그런 경우 '야, 뛰어와서 건너!'라고 외친다는 부연설명도

김승호, 최남현, 김진규, 박암 등 다른 영화배우들과 함께 임화수에게 구타를 당한 적도 있다고 한다. 이 부분은 야인시대에서도 그대로 묘사되었다. 야인시대에서 청년기의 최무룡 역할을 맡은 배우는 무인시대에서 최우를 맡은 정재곤. 1960년 4월 24일 기사에 유지광, 임화수의 구속을 언급하는 기사에서 충무로 2가의 반공예술인단 사무실에서 동대문파 4, 5명에게서 용공 사상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구타당했다고 나온다.


3. 가족관계[편집]


총 3번 결혼을 한 관계로 가정사가 꽤나 복잡하다. 첫번째 부인 강효실 사이에 1남 3녀를 두었고(이 중 아들은 배우 최민수다) 두번째 부인인 김지미 사이에서 1녀, 세번째 부인 차모씨 사이에서 1남 1녀를 두었다.

1962년 당시 김지미와 함께 간통 혐의로 구속되었다. 이때 최무룡의 아내는 배우 강효실로 부친은 월북 영화감독 강홍식으로, 그는 2011년에야 탈북자 김영순의 <열린북한방송> 증언을 통해 요덕 수용소에서 1971년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 수갑을 찬 최무룡 김지미 두 사람의 행복해 하는 모습에 당시의 언론은 연일 화제였다. 지금 관점으로도 충분히 파격적이지만 당시 시각으로는 그야말로 대형 스캔들이었다.

결국 1963년에 강효실과 이혼하는데, 이때 이혼 위자료를 김지미가 지불했다. 그 당시 대한민국 최고의 위자료인 400만원(위자료 330만원+채무 70만원)을 지급하면서 다시 화제가 되었다. 이때 400만원은 이루 헤아리지도 못하는 거액이었다. 심지어 6년 뒤 그과 이혼할 때도 김지미가 이혼 위자료를 전부 부담했다고 한다. 당시 여성 혼자 그 정도의 재력을 갖고 있기가 힘든 시대였고 통상적으로 이혼 위자료를 남성이 다 책임지던 시절임을 감안하면 김지미의 위력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참고로 강효실은 최무룡의 외도와 이혼에 크게 상처받아 수차례 자살 시도를 하는등 굉장한 마음 고생을 했다. 당시 이혼하면 자녀 친권은 남편쪽이 가져가는게 당연시되던 시절이라 강효실은 최민수를 직접 키우지도 못했다. 모자가 재회한 것은 최민수가 고2가 되어서였다.

김지미는 2003년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4번의 결혼과 이혼을 회고하며 '나이 많은 남자, 어린 남자, 능력 있는 남자, 다 살아봤는데 남자는 별거 아니더라. 남자는 다 어린애고, 부족하고, 불안한 존재다. 그렇지만 함께 자녀를 낳아 길렀던 최무룡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밝혔다.

간통 당시 이미 백일무렵의 갓난아들 최민수를 둔 상태였고, 이혼후 김지미가 잠깐 최민수를 맡아 기른적도 있다고 한다. 이런 복잡한 가정사 때문에 최민수와 최무룡은 부자 관계가 꽤 오랫동안 좋지 않았다.


4. 가수 활동[편집]


전성기 시절부터 가수로서 음반도 발매하여 "외나무 다리"와 "꿈은 사라지고"라는 자신의 명곡도 있어서 가요무대에 출연한 적이 있다. 곡들 대부분이 나쁘지 않으니 들어보자.


최무룡 - 꿈은 사라지고 (1959)


최무룡 - 꿈은 사라지고 (가요무대)


최무룡 - 외나무다리 (가요무대 / 1998. 6. 8.)


5. 말년[편집]


파일:최무룡 선거벽보.jpg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출마 당시 선거벽보.
1988년에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총재의 천거로 제13대 총선에서 국회의원(파주군, 신민주공화당민주자유당)으로 당선 후 역임했으나 정계에 별다른 족적을 남기지는 못했다. 1992년 14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공천에서 탈락한 후 1993년부터 한국영상자료원 원장을 지내다가 1994년에 분당 택지불하를 미끼로 22억원을 가로채 사기 혐의로 구속되어 집행유예 선고를 받은 바 있다.

1995년부터 우리영상사업단 이사장을 지낸 후 1998년부터는 악극 <이것이 유랑극단>, <아리랑> 등지에 출연하면서 연기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다 1999년 11월 11일,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 중동 중흥마을주공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져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신촌동 세브란스병원으로 긴급이송됐으나 결국 밤 9시 40분에 향년 71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사후 보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6. 출연작[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최무룡/출연작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7. 대중매체에서[편집]


김희갑 구타사건 묘사 당시, 김희갑이 잡혀오기 전 임화수가 다른 배우들을 갈굴때 사또복장을 한 배우를 '대학까지 나왔다고 건방지게 군다'며 유독 심하게 구는데, 이 사람이 최무룡일 수 있다.
실제사건답게 구타당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아들이 아버지를 욕먹였다고 명예훼손죄로 고소했으나 기각되었다. 임화수 역을 맡은 최준용 역시 해당씬을 찍기전 항의가 들어올 것 같다고 했으나 감독이었던 장형일 PD는 실제사건이라고 밀어붙였고, 우려는 현실이 되어 소송까지 이르렀다.


8. 수상 경력[편집]




9. 여담[편집]


  • 최무룡이 주연으로 등장한 인생 유학생이라는 영화가 배우 김영철이 최초로 등장한 영화이기도 하다.


10.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88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파주)

[[신민주공화당|
파일:신민주공화당 글자.svg
]]

34,219 (41.80%)
당선 (1위)
초선


11. 참고/관련 자료[편집]




12.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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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양력 3월 16일.[2] 그런데 포털 사이트 프로필에는 1999년 11월 13일에 사망했다고 오기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