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초주 (문단 편집) === 긍정적 평가 === 초주가 악평을 받게되는 이유는 항복에 대한 문제였다. 당시 서촉의 조정은 남만으로 도주하거나, 손오로 망명하자는 의견들로 갈라지게 되었다. 또한 성도 내는 위군의 침공으로 인하여 혼란에 빠져 성안의 치안과 질서가 어지러운 상황이었다. 이때 초주가 위에 대한 항복을 건의한 것. 초주의 의견은 다음과 같았다. 1. 남중은 옛부터 모반의 땅이므로 제갈량이 평정하고 나서야 고분고분해졌으나, 여전히 근심하고 원망하는 역심을 품고 있는데다가,[* 한때 [[습착치]]의 날조로 제갈량이 죽을 때까지 반란이 없었다는 말이 넷상으로 퍼져있었을 때도 있었지만 남중은 제갈량 생전에는 물론 사후에도 몇번이고 반란이 일어났다. [[장억]] 같이 현지인들과 관계가 좋았던 경우도 있었지만 [[상총]]의 죽음과 [[장익(삼국지)|장익]]과의 충돌 등. 계속된 반란과 분쟁으로 남중 도독들은 군수물자 충당하려다 고생했으니 나라 꼴이 엉망이었던 촉 말기 즈음에 와서는 초주의 말대로 도주조차 못할 만큼 민심이 나빠졌다고 볼 수 있다.] 만일 서촉 정부가 그곳으로 이전한다면, 위군이 거기까지 남진해 남중이 피폐해질 것이니, 남중인들은 이에 들고 일어나 모반하거나 변란을 일으킬 것이다. 2. 손오에 의지한들 독립군주는커녕 손오의 신하로 전락하여, 나라는 되찾을 수 없을 터일뿐더러, 오가 [[위(삼국시대)|위]]를 이기지 못하는 건 불보듯 당연한 이치다. 그렇게 되면 다시 위의 신하가 될 것이니 의미가 없다. 3. 항복한 자를 잔혹하게 다루면 손오가 결사항전하리라는 것과 검각의 강유가 죽을 때까지 싸워 위도 엄청난 피해를 보리라는 걸 등애는 모르지 않는다. 따라서 항복하면 관대하게 받아줄 것이다. 이와 같은 그의 판단은 현실에 근거한 논리라고 평할 수 있다. 어차피 수도 성도를 버린 상태에서 순수한 한족의 땅도 아닌 남중이나, 다른 나라 오나라로 건너가 봐야한들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으므로. 이런 초주의 의견에 "지금 등애는 멀리 있지 않고, 아마 위나라는 우리들의 항복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라며 항복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라 단언한 이들도 있었지만 사람들 가운데 초주의 말의 이치를 바꿀 자가 없었다. 연의에서는 강도 높은 영향력있는 [[유심]]의 반론이 존재한다지만 사실상 그냥 대책없이 끝까지 싸우다 죽자는 의견으로 현실성 있는 대책이 아니었던지라 반론이라 할 수 없다. 게다가 초주의 항복관은 단순히 패배주의적이지 않았으며, 그는 협상을 통해 유선의 안위와 몸값을 받아낼 것을 중요하게 보았다. 성도 치안도 안정되었다. 종회가 항장 강유와 손잡고 난을 일으켜 1년 만에 난장판이 되긴 했지만 이것은 등애의 잘못이 아니다. 진수는 '유선이 근심이 없고, 한나라 백성들이 의지할 곳을 얻은 것은 초주의 계책을 썼기 때문이다'고 스승이 옳았다고 평했다. 한편 제갈량과의 관계에 있어서 초주는 조정에서 딴지를 거는 역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는 제갈량의 북벌에 대해 반대한 적은 없으며, 제갈량이 죽자 그의 빈소로 가장 먼저 달려간 사람이 초주였다.[* 당시 유선은 제갈량이 죽은 곳으로 가지 못하는 조서를 내렸다.] 이로 보건대 현실주의적인 애국자라고 봐야 할 것이다. 거기에 통념과는 달리 강유의 북벌중단을 주장했던 당시에도 ''''일단 한고조는 포기해도 [[주문왕]]은 될 수 있다, 문왕의 고사를 따르자''''고 해서, 서촉의 기본적인 노선인 한실부흥과 천하통일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가 사치와 향락에 빠진 유선을 질책할 때도 ''''선제의 뜻은 천하를 통일하는 것이나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진실로 향락을 다할 때가 아닙니다. 단지 선제께서 펴시던 일만을 받들어 시행하십시오''''라고 해서 '''촉의 체제를 인정하고 촉의 천하 통일을 긍정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는 이 당시만 해도 초주가 서촉 체제의 옹호자였으며 그가 등애가 성도 근처에 와서 항복을 권할 때까지 대외적으로는 서촉의 이데올로기인 한실부흥에 충실히 따르는 학자임을 보여준다. 당장 그가 항복을 꺼낸 시점도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하자는 것이 아니라 강유의 답중 삽질로 한중이 넘어간 것은 물론 제갈첨이 전사하고 면죽관이 떨어지진데다가 강유가 검각에 고립된 게 명백한 시점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